
"대본을 정말 많이 읽었어요. 영훈은 행동보다도 태도와 분위기로 설명되는 인물이라, 말투 하나, 몸짓 하나까지 고민했죠."
정성일은 이번 작품을 통해 보이지 않는 감정의 결을 연기하는 데 집중했다고 말한다. 그는 또 한 번 익숙한 얼굴을 낯설게 뒤집으며, 자신만의 스릴러를 완성해냈다.
"'영훈'은 나쁜 놈이죠. 다만 연기 하는 배우 입장으로 (감정) 이입 해야하고 분석해야하니까 제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까지 이해하려고 노력했어요. 역할 특성상 정신과 의사라고 해서 전문성이 드러나기 보다는 기자 '백선주'를 설득하고 이 판을 설계하는지에 대한 치열함이 조금 더 드러나길 바랐습니다."

정성일은 영훈을 연기하며 가장 경계했던 지점을 미화라고 단언했다. 연쇄살인범의 행위를 일종의 통쾌함이나 대리만족으로 소비하게 만드는 순간, 영화가 지닌 질문은 무뎌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끝내 영훈을 다크 히어로로 호명하지 않았다. 대신 끝까지 관객 스스로 선택하도록 여지를 남겼다.
"영훈이라는 캐릭터가 자칫 미화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다크 히어로처럼 비치지 않도록 늘 조심했죠. 보는 분마다 감정이나 기준이 다르니까 영화는 마지막까지도 선택권을 관객에게 던져 놓는 것 같아요."
영화의 대부분이 한정된 공간, 밀실 안에서 벌어지는 만큼 정성일은 리딩 단계부터 "얼마나 열어 두고, 어디까지 헤집고 다닐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다고 말했다. 인터뷰의 첫 장면 문을 열고 선주를 맞이하는 영훈의 태도 역시 배우 스스로 수많은 가능성을 탐색하며 조율한 결과다.
"사전 리딩하면서 이런저런 고민을 많이 했죠. 어떤 걸 표현하고 말고를 떠나서 해보고 싶은 방식들이 있었거든요. 예를 들면 선주가 말을 하면 영훈이 살짝 고개를 기울이는데 처음에는 제가 그걸 많이 기울였어요. 방에 들어가면 놀고 싶고, 헤집고 싶잖아요. 그 범위를 어디까지 설정할 수 있을까 시도했죠. 그런데 어느 순간 감독님이 '조금만 줄여볼까' 하시더라고요. 아, 이 사람 쉽지 않네 싶었죠. 그런데 그렇게 말해주는 방식에서 신뢰가 느껴졌어요. 더 넓게 써볼까, 이 공간 안에서 어디까지 열 수 있을까, 그게 좋았죠."

인터뷰가 진행되는 배경은 호텔 스위트룸. 구조적으로 제한된 공간 안에서 오직 대화만으로 긴장감을 유지해야 하는 만큼, 배우에게도 연출자에게도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정성일은 그 안에서 변화를 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결국 밀도라고 말했다.
"어떻게 해도 안 되는 부분은 있어요. 조명이나 배경 같은 시각적인 부분은 감독님이 만들어 주시는 거고, 그런 변화가 있더라도 저와 상대가 만들어내는 밀도가 없으면 공간 안에서 아무리 바꿔도 소용없죠. 제가 할 수 있는 건 연기뿐이에요. 관객들이 이 인물을 보면서 어떤 질문을 떠올릴까, 그런 걸 던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예를 들면 '왜 이렇게 여유롭지?' 같은 궁금증이요. 그 여유가 상대가 들어올 공간이기도 하고, 그런 틈을 통해 관객이 끼어들 수 있다고 봤어요. 그래서 템포도 일부러 변칙적으로 가져가고, 리듬도 흔들어 봤죠. 그게 어쩌면 관객에게 지루함 대신 긴장을 줄 수 있는 방식이 아닐까 싶었어요."
정성일은 오랜 무대 경험이 오히려 이번 영화와 잘 맞아떨어졌다고 말한다. 밀실 구조와 정적인 카메라, 제한된 동선 속에서 그가 느낀 건 낯섦보다 익숙함에 가까웠다.
"전혀 다른 느낌이라기보단 익숙한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오히려 더 집중할 수 있었죠. 무대라는 공간 자체가 한정되어 있으니까 그런 점에서 이번 촬영도 저에겐 편안했어요. 영화지만 공연에서 볼 수 있는 매력들이 있었고, 공연 같지만 또 영화인 거고요. 동선이나 소품처럼 익숙한 요소들도 있었고, 거기에 카메라라는 장치가 더해지니 새로운 걸 시도할 수 있는 여지도 생겼죠. 저한텐 너무 재밌고 자유로운 경험이었어요. 익숙한 무대 같은 공간이지만, 영화라는 다른 환경들이 있으니까 더 흥미로웠던 것 같아요."

촘촘한 긴장감이 흐르는 1:1 밀착 구조에서 액션과 리액션의 호흡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정성일은 "상대 배우에 따라 연기가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하며, 이번 작품에서 조여정과의 호흡이 결정적인 영향을 줬다고 강조했다.
"저는 상대 배우에 따라 변화가 많이 생기는 편이에요. 그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제 감정도 더 올라올 수 있고요. 그래서 촬영 전에는 대본을 공연처럼 완전히 외우고 갔어요. 현장에서 조여정 배우와 마주하며 자연스럽게 생긴 게 많았죠. 영훈이라는 캐릭터는 사실 백선주라는 인물 덕분에 완성됐다고 생각해요. 만약 다른 배우였다면 전혀 다른 영훈이 나왔을 거예요. 조여정 배우는 베테랑이고 정말 잘하는 배우잖아요. 긴장감도 있었고, 덕분에 저는 그 안에서 그냥 주고받기만 하면 됐어요. 다른 건 신경 쓸 필요가 없었죠. 너무 좋았어요."
극 중에서만큼은 긴장감이 팽팽했지만, 촬영 현장 밖 두 사람의 모습은 완전히 달랐다. 정성일은 조여정과의 작업을 떠올리며 웃었다. 촘촘하게 맞물린 호흡만큼이나 서로의 있는 그대로를 주고받을 수 있는 동료였다고 했다.
"둘이 허당이에요. 바보들이에요. 극 중에선 되게 차갑고 치밀해 보이지만, 세트 안에선 진짜 숨도 못 쉴 정도로 치열했거든요. 감독님도 계산적으로 치밀하게 디렉팅하시고, 저희도 감정적으로 치열하게 맞붙었는데… 컷 소리 나고 세트 밖에 나오면 그 숨 막히던 게 확 풀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거기선 무조건 웃어야 해요. 웃고 환기해야 살 수 있었어요. 거의 개그콘서트, 코미디 빅리그였죠. 누가 누가 더 웃기나 내기하듯이. 조여정 배우가 리액션을 너무 잘 해주니까 감독님이 한번 웃기고 저도 또 웃기고, 그렇게 계속 웃다가 결국 서로 바닥까지 다 드러낸 거 같아요. 서로 가식도 없고 결이 잘 맞았죠. 있는 그대로를 보여줘도 괜찮은 사람들이었고, 그걸 봐줄 수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진짜 너무 좋은 친구들이죠. 없어서는 안 될 친구들 같아요."
넷플릭스 '더 글로리'에서 하도영 역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이후, 정성일의 행보는 단숨에 대중의 관심권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 만큼 차기작에 대한 고민도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도영 이후에 들어오는 역할들은 다 결이 비슷했어요. 굳이 하기 싫다는 건 아니지만, 자꾸 비슷한 걸 반복하게 되니까 '내가 이걸로 하도영을 넘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죽을 때까지 정장만 입고 살아야 하나 그런 농담도 하고요. 그래서 가능하면 조금 더 밖으로 갈 수 있는 새로운 포지션이 있으면 선택하려고 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영훈이라는 캐릭터는 같은 정장을 입더라도 튈 수 있는 방향이 많은 인물이었어요. 그 점이 저한테는 흥미롭게 다가왔어요."

"요즘 재충전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해요. 그래서 대학로로 가는 거예요. 연출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요즘 친구들은 어떤 방식으로 연기를 접근하는지… 그런 걸 보러 공부하러 가는 거죠. 그게 맞다고 생각해요. 이 일이 답이 있는 일이 아니니까, 고민 안 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어요. 나이가 들면서 느끼는 건, 예전에는 내가 볼 수 있는 시점이 한두 개였다면 지금은 경험이 많아지고 보이는 게 많아지면서 선택지가 훨씬 넓어진다는 거예요. 그중에서 어떤 걸 선택하느냐는 결국 현장에서 제로백으로 맞닥뜨리면서 결정하게 되더라고요."
정성일은 이번 작품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로 '형식의 새로움'을 꼽았다. 연극 무대에서 시작한 배우로서 영화 속에 녹아 있는 무대적 호흡이 오히려 자신을 끌어당겼다고 말한다.
"아마도 몰입도 있게 보실 수 있을 거예요. 그게 제가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기도 하고요. 지금까지 한국 영화에서는 잘 보지 못했던 형식이고, 제가 좋아하는 무대의 감각이 섞여 있으니까요. 1:1로 상호작용하고 그 긴장을 오롯이 따라갈 수 있다는 점에서 관객 분들도 특별한 경험을 하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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