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가 중대재해를 줄이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강화하는 가운데, 공공기관이 공사를 기획·발주하는 단계부터 안전을 최우선 가치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처벌을 중심으로 한 접근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만큼 사전 예방 대책을 병행해야 한다는 제언이다.
10일 국회 입법조사처의 ‘중대재해처벌법 입법 영향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12만2713명이던 산업재해 재해자는 지난해 14만2771명으로 3년 새 2만 명 넘게 늘었다. 같은 기간 산재 사망자는 2000명 안팎 수준에서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중대재해처벌법과 산업안전보건법 등 제도적 장치가 마련됐지만 노동 안전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공공부문도 예외가 아니다. 공공기관은 안전관리 인프라를 갖추고 있지만 사업계획 수립부터 설계·입찰·시공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위험 요소를 사전 점검하는 체계가 미비한 실정이다. 공공기관 발주처가 대표이사 직속 안전부서를 두고 있으나 순환보직 때문에 사업계획 단계의 위험 분석이 형식에 그칠 때가 많다.
주요국은 이러한 구조적 허점을 줄이기 위해 참여형 안전관리 체계를 공공부문에 적극 도입하고 있다. 일본은 공공발주공사 안전추진위원회를 중심으로 발주·설계·시공 전 과정에서 위험 요소를 엄격히 점검한다. 특히 원청이 하청의 안전관리 책임까지 부담하도록 하고, 하청 노동자를 포함한 전 근로자에게 안전교육을 확대 실시하고 있다. 독일은 산재보험조합이 주도해 기업별 안전기준을 세분화하고 발주처가 직접 위험 요소를 관리하는 체계를 운영한다.
전문가들은 공공기관 발주 단계부터 안전 기준을 명확히 하고, 노동자 참여를 확대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처벌 강화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만큼 안전 문화 정착을 위한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해외에서는 발주처가 위험 요소를 직접 관리하는 구조가 일반적이지만 한국은 여전히 다단계 하도급 구조 때문에 책임이 분산되며 사각지대가 발생한다”며 “서부발전 사고 역시 정비사업을 한국전력공사 자회사인 KPS에 위탁하고, KPS가 이를 다시 하청업체에 재위탁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례”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노란봉투법 등에서도 원청 책임 강화를 강조하는 만큼 공공기관 역시 예외일 수 없다”며 “형식적으로는 하청업체 소속이더라도 실질적으로 업무를 지휘하고 구조적 책임을 지는 주체가 원청이라면 그 책임을 분명히 물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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