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승준 논설주간]
9월 3일 오전 10시 중화인민공화국 수도 베이징(北京)시 중심 톈안먼(天安門) 위에는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김정은 조선노동당 총비서가 나란히 설 예정이다. 중국 외교부 부장조리(차관) 훙레이(洪磊)가 지난 28일 ‘중국 인민 항일전쟁 세계 반(反)파시스트 전쟁 승리 80주년’ 기념활동 뉴스센터 첫 기자회견에 나와 밝힌 행사 참가자 명단은 모두 26명이다. 푸틴과 김정은에 이어 캄보디아 국왕 시하모니, 베트남 국가주석 루옹꾸옹(梁强), 라오스 국가주석, 인도네시아 대통령, 말레이시아 총리, 몽골 대통령, 카자흐스탄 대통령, 우즈베키스탄 대통령, 이란 대통령, 콩고 대통령, 쿠바 국가주석 등이다. 훙레이는 평소 중국이 북한보다 훨씬 중요시하는 국가수반들을 모두 제쳐두고 푸틴에 이어 두 번째로 김정은을 호명했다. 행사 기간에 중국 외교당국이 김정은을 어떻게 접대하는지를 보면 앞으로 중·북 관계를 짚어볼 수 있을 전망이다.
중국공산당은 제2차 세계대전을 ‘반파시스트 전쟁’이라고 부른다. 독일 히틀러의 나치스와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일본의 군국주의자, 이들 세 나라가 1931년 9월 18일 일으켜서 1945년 9월 2일까지 계속된 전쟁이다. 일본군이 만주를 공격한 만주사변이 시작된 날부터 일본 왕을 대신한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외무대신이 도쿄(東京)만에 정박한 미군 전함 미주리 갑판 위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한 날까지다. 중국공산당 공식 문서에는 “항일전쟁은 1937년 7월 7일 일본군이 베이징 서남쪽 루거우차오(盧溝橋) 사건을 일으키면서 시작됐고, 일본군이 8월 13일 상하이(上海)를 침공하자 9월 하순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과 국공합작을 통해 민족적인 항전을 전개했다”고 기록해 놓았다.
잘 알려진 것처럼 마오쩌둥(毛澤東)이 톈안먼 위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을 선포한 것은 제2차 대전 종전 4년 후인 1949년 10월 1일이었다. 일본이 1945년 9월 2일 맥아더 장군 앞에서 종전 항복문서에 서명할 때 중국 대표로 참석한 사람은 중화민국 쉬융창(徐永昌) 중장이었다. 2차 대전은 유럽 쪽에서는 1945년 5월 8일 오전 10시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가 “오늘 밤 자정으로 독일군의 적대행위가 공식적으로 끝난다”고 방송함으로써 종전됐다. 이에 따라 러시아는 5월 9일을 전승절로 기념하고 붉은광장에서 열병식을 거행한다. 지난 5월 9일 블라디미르 푸틴은 시진핑 국가주석과 함께 나란히 러시아군 열병식을 참관했다.
중국공산당에게 전승절은 '중국 인민들이 모두 나서서 일본과 싸워 이긴 날'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일본군이 항복문서에 서명한 1945년 9월 2일 중국을 대표하는 정부는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이 주도하는 중화민국 정부였지만 중국공산당은 이미 1937년 9월 하순부터 국공(國共)합작을 한 뒤 일본군과 전쟁 상태에 돌입해서 항전을 해왔기 때문에 '전 인민과 함께 항일전쟁을 전개한 것'으로 정리했다. 그럼, 2차 대전 승리의 주역이었던 미국과 유럽이 하지 않는 승전 기념행사를 왜 중국과 러시아는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을까.
이에 대해 미 싱크탱크 브루킹스 연구소 소속 카이난 가오 (메릴랜드 대학) 교수와 마거릿 피어슨 연구원은 '군사 퍼레이드와 전쟁의 기억 : 중국과 러시아는 역사의 기억을 통해 국제 질서의 재편을 시도하고 있다'는 논문을 최근에 내놓았다. 2차 대전 이후 국제 질서 재편 과정에서 특히 나토(NATO)와 유럽연합(EU)의 세력 확장이 두드러진 데 대해 전승절 기념 군사퍼레이드를 통한 무력 과시로 재편된 국제질서에 대해 이의 제기를 하는 데 중요한 목적이 있다고 진단했다. 다시 말해 중국과 러시아는 2차 대전이라는 역사의 의미를 재조정하기 위해 세 가지, 즉 첫째는 파시즘을 패배시키는 데 중국과 러시아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달리 공헌이 컸다는 사실을 과시하고, 둘째는 2차 대전 후 전후 국제질서 재편에 중요한 역할을 한 카이로 협정과 포츠담 협정이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공정하지 못했으며, 현재의 영토적 질서나 전략적 질서에 중국과 러시아가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표현하고, 셋째로 앞으로 전후 국제질서에 대한 자신들의 의사를 전달하는 데 행사의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지난 5월 9일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러시아의 전승절 기념식 퍼레이드를 참관한 시진핑 국가주석은 중국 관영매체에 이렇게 밝혔다.
“국제질서는 갈수록 어지러워지고 있어 유엔의 권위를 잘 보호하고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엔헌장에 먼저 서명한 국가로서 그리고 유엔 안보리 상임 이사국으로서 중국은 결코 세계가 ‘강권(强權)이 곧 공리(公理)’인 밀림의 법칙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국제사회와 함께 반파시스트 전쟁의 성과를 잘 지키고, 다변(多邊) 주의를 견지해서 평화를 통해 인류가 밝은 미래를 쟁취할 수 있도록 하겠다.”
시진핑을 수행했던 왕이(王毅) 중국공산당 정치국원 겸 외교부장도 중국이 전승절 80주년 기념행사를 벌이는 데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80년 전 중국은 소련을 포함한 전 세계의 진보 역량들과 함께 거대한 민족적 희생을 감수하면서 반파시스트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결정적 공헌을 했다. 중국은 반파시스트 동맹의 중요한 구성원의 하나로 유엔을 성립시켰으며, 유엔헌장의 공동 제정을 통해 각국이 평화와 발전의 역사를 여는 데 기여했다. 2차 대전의 아픈 교훈은 강권과 패권은 평화의 길이 아니라는 것이며, 제로섬 게임과 승자독식의 길을 버리고 전 세계가 공동으로 유엔헌장을 중심으로 한 전후 국제 체계와 국제질서를 잘 지켜가야 할 것이다.”
다이빙 주한 중국대사와 게오르기 지노비예프 주한 러시아대사가 지난 28일 한국 언론에 공동기고문을 보내 주장한 것도 시진핑 국가주석과 왕이 외교부장의 말과 같은 맥락임을 알 수 있다.
“올해는 중국 인민 항일 전쟁, 소련의 위대한 조국 수호 전쟁 승리 80주년이자 한국 광복 80주년이다. … 안타깝게도 제2차 세계대전 위대한 승리 80주년이 지난 오늘에 일부 사람들이 지정학적 정치 목적으로 시대를 거스르고, 일부러 2차 대전의 역사를 왜곡하고 전쟁의 결과를 수정하려는 시도까지 서슴지 않았다. 일부 국가는 약육강식, 승자독식의 정글 법칙과 패권 논리를 펼쳐 정치적 제로섬 게임을 선동하고… 러시아와 중국은 일부 국가에서 신형 나치주의가 회복되어 전범이 합사되어 있는 시설을 참배하고 역사가 왜곡되는 것을 강력히 반대한다. … 100년 만에 대변국(大變局)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국제 질서가 심층적으로 조정되면서 인류는 또다시 갈림길에 서 있다. …”
이재명 대통령은 중국 측의 전승절 기념식 초청에 직접 가는 대신 우원식 국회의장이 참관토록 했다. 이 대통령의 선택에 대한 시진핑과 왕이 외교부장의 심사는 어떤 것일까. 우원식 의장은 오는 3일의 전승절 참석을 전후해서 베이징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오게 될까.
박병석 전 국회의장을 단장으로 하는 대통령 특사단은 지난 26일 중국 권력 서열 3위인 자오러지(趙樂際)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장과 만났다. 한·중 수교 33주년 기념일인 지난 24일 베이징에 도착한 특사단은 왕이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겸 외교부장, 왕원타오(王文濤) 상무부장, 한정(韓正) 국가부주석 등을 잇달아 만났고, 자오 위원장은 특사단이 만난 최고위급 인사였다. 자오 위원장은 "중국과 한국은 흔히 '옮길 수 없는 이웃, 떼어놓을 수 없는 협력 파트너'라고 말한다"고 전하고 "시진핑 국가주석은 '중·한 관계가 좋으면 양측이 이익을 얻고, 반대로 좋지 않으면 양측이 손해를 본다'고 강조했다"면서 "이것이 바로 지난 33년간 중·한 관계 발전 과정이 양측에 남긴 중요한 교훈과 경험"이라고 말했다. 자오 위원장이 전한 시진핑의 말 가운데 “중국과 한국은 이사 갈 수 없는 이웃”이라는 말은 시 주석이 한국에 대해 자주 인용하는 말이지만 뒷부분 “관계가 좋으면 양측이 이익, 좋지 않으면 양측이 손해”라는 말은 처음 인용되는 말이다.
박병석 전 의장을 단장으로 하는 이번 특사단이 시진핑을 못 만난 것은 지난 다섯 번의 한국 대통령 특사가 중국 국가주석을 모두 만난 기록에 비하면 앞으로 한·중 관계가 걱정되는 대목이다. 더구나 시진핑이 베이징에 부재했던 것이 아니라 자오러지 위원장이 특사단을 만난 날 오전에 시진핑은 러시아 두마 위원장과 만났고, 캄보디아 시하모니 국왕 부부를 펑리위안(彭麗媛) 여사와 함께 부부 동반으로 만난 것으로 중국 관영 TV에 톱뉴스로 보도된 점 또한 앞으로 한·중 관계에 걱정이 되는 대목이다. 우원식 국회의장이 중국군 퍼레이드가 진행될 때 톈안먼 누대 위 중앙에 설 시진핑에게서 얼마나 떨어진 위치에 서게 될지도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필진 주요 약력
▷서울대 중문과 졸 ▷고려대 국제정치학 박사 ▷조선일보 초대 베이징 특파원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 ▷최종현학술원 자문위원 ▷아주경제신문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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