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재의 경제가 답이다] 이재명 정부의 '실용주의 경제'…세가지 유혹과 한가지 용기

··박원재 논설고문
[박원재 논설고문]


 
10일 결정된 내년 최저임금(시간당 1만320원)은 이재명 정부가 표방하는 실용주의 경제가 정책에 구현된 첫 사례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인상률 2.9%는 역대 정부 첫해 기준으로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김대중 정부 이후 최저치다. 노조와 껄끄러운 관계였던 전임 윤석열 정부의 첫해(5.0%)보다도 낮다. 한국노총이 협상장에 남아 17년 만에 이뤄낸 합의라는 의미를 지켰지만 민주노총은 낮은 인상률에 반발해 퇴장했다.

노동계는 우군으로 여겼던 새 정부의 인색함에 서운한 감정을 토로한다. 이재명 대통령도 든든한 지지세력인 노조에 취임 선물을 줄 수 없는 게 안타까웠을 것이다. 지난해 100만명 이상 폐업한 자영업자, 일자리가 사라지면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하는 일용직·임시직·저숙련 근로자들의 형편을 외면하지 않은 결과다. 2년간 최저임금을 30% 가까이 올렸다가 성장률 둔화와 일자리 감소를 초래한 문재인 정부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행보다.

이재명 정부는 집권 5년간 최저임금 결정처럼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계속 맞닥뜨릴 것이다. 정책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 박수 치는 장면, 단기간에 편법으로 경기를 부양할 묘책이 눈앞에 어른거릴 것이다. 쉽고 빠른 길에 대한 유혹이 경제원리와 실용주의 원칙을 포기하고 인기에 도움이 되는 쪽을 택하라고 부추길 것이다. 시장은 새 정부가 유혹에 대처하는 모습에서 실용주의가 어디까지 진심이고 어디부터 립 서비스인지 가늠할 것이다.

새 정부가 가장 먼저 끊어내야 할 유혹은 재정에 대한 과도한 기대다.

2차 추가경정예산 집행으로 21일부터 1인당 15만~55만원의 민생회복 소비쿠폰이 지급되면 최악의 내수경기에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이게 된다. 국난(國難) 수준의 경기 침체 상황에서 추경은 불가피한 선택이지만 경제체질을 개선하고 성장률을 높이는 측면에서는 가성비가 낮은 정책이다. 31조8000억원이라는 막대한 돈을 쏟아부어도 올해 성장률 기여효과는 0.1%포인트에 불과하다. 통증이 심할 때 진통제는 유용한 처방이지만 너무 자주 맞으면 중독을 피할 수 없다.

그래도 추경의 효과에 고무된 정부는 내년, 후년 예산도 대규모 재정적자를 감수하는 확장재정으로 편성하려는 유혹을 받을 것이다. 이 대통령은 후보 시절 “나라가 빚을 지면 절대 안 된다는 무식한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다”며 “국채를 발행해서라도 내수 진작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전임 정부에서 예산 편성에 깐깐했던 ‘영혼 없는 관료’들이 이 지침을 흘려들을 리 없다.

지난해 관리재정수지 적자는 100조원을 넘었고, 2016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36%였던 국가채무 비율은 2차 추경으로 49.1%까지 높아졌다. 적자재정으로 모자라는 돈은 이번 추경처럼 국채를 찍어 충당해야 하고, 이자 부담은 계속 불어난다. 이런 추세라면 2060년에는 국가채무 비율이 145%에 이를 것이라는 경고까지 나온다.

다른 나라에 비해 아직 여유가 있다는 논리로 적자예산을 당연하게 여기고 높아지는 부채 비율을 방치했다간 국가신용등급 하락이라는 카운터 펀치를 맞지 말라는 법이 없다. 재정적자를 이유로 기축통화국인 미국의 신용등급을 가차 없이 떨어뜨린 글로벌 신용평가회사들이 한국 사정을 봐줄 리 없다.

코스피 5000의 장밋빛 유혹을 떨쳐내는 것은 더 힘들지 모른다.

역대 대통령들이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하며 코스피 지수를 올리겠다고 장담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2007년 이명박 당시 후보는 “코스피 3000 돌파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며 정권 교체를 통한 주가 상승을 호언했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코스피는 오히려 40% 하락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5년 안에 코스피 3000 시대를 열겠다”고 했지만 임기 중 코스피는 1800~2000선에서 제자리걸음을 했다. 2021년 7월 코로나19 환경에서 공급된 막대한 유동성에 힘입어 코스피가 역대 최고점(3305.21)을 찍었지만 기업 실적이 뒷받침되지 못한 탓에 곧바로 상승분을 반납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주가가 연중 최고치를 경신하고 투자자금 유입이 활발해지고 있다. 증시 활성화 정책에 대한 기대와 풍부해진 시중 유동성이 맞물린 결과다. 주가가 오르면 가계의 가처분소득이 늘어나고 소비심리가 개선된다. 내수 회복의 효자가 될 수 있고 자금이 부동산에서 생산적인 분야로 흐르는 효과를 낼 수 있다.

이 대통령은 취임 후 한국거래소를 방문한 자리에서 “국민들이 주식 투자를 통해 중간배당도 받고 생활비도 벌 수 있게 부동산에 버금가는 대체투자 수단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여당이 기업들의 우려에도 상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고 여기에 더해 자사주 소각 의무화, 집중투표제 의무화, 감사위원 분리 선출 확대 같은 더 센 조치에 속도를 내는 것은 주가 상승에 도움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코로나 국면에서 확인한 것처럼 유동성이 밀어올린 주가는 기업의 수익성과 성장성이 받쳐주지 못하면 지속 가능하지 않다. 기업들이 투기자본의 공세에 시달려 긴 안목의 투자와 경영을 못하게 되면 기업가치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눈앞의 주가에 도취돼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셈이라는 기업들의 호소를 흘려듣지 말아야 한다.

국내 상장기업의 영업이익률(4.3%)은 미국 S&P500 기업(12%) 대비 3분의 1 수준이고 40%는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못 내는 좀비 기업이다. 성장률 0%대인 경제에서 주가지수가 두 배 오르길 바라는 건 무리다.

효과가 확실한 증시 부양책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개별 기업이 경쟁력을 키울 수 있도록 산업구조를 개선하고 혁신기업 생태계의 성공 모델을 구축하는 것이다. 주가는 기업 실적과 경제 운용의 결과물일 뿐 정책의 목표일 수는 없다. 인기와 지지율의 유혹에 초연해지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다.

주 4.5일 근무제 도입 같은 근로시간 단축은 좋아하는 국민이 그렇지 않은 국민보다 많은 정책이다. 근로자 정년연장도 인기 대차대조표상 지지율에서 손해볼 일이 없다. 하지만 실용주의 관점에서 보면 장점과 단점, 효과와 부작용이 극명하게 엇갈려 한쪽 면만 보고 섣불리 밀어붙일 정책이 아니다.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중 33위로 최하위권이다. 노동생산성이 떨어지는 나라가 저출산·고령화 환경에서 근로시간을 줄이면서 경제성장률을 높일 방법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 대통령이 공약한 임기 내 잠재성장률 3% 달성도 노동생산성 개선 없이는 불가능한 과제다. 경제가 성숙 단계에 접어들면 잠재성장률은 둔화하기 마련이지만 주요국 중에서 2000년대 들어 5년마다 거의 1%포인트씩 떨어지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근로자 삶의 질 향상은 단순히 노동시간을 줄이는 데 그치지 않고 생산성 향상을 위한 기술 혁신, 노동시장 유연화, 임금체계 개편이 뒤따라야 의도한 효과를 낼 수 있다. 최저임금 결정에 작용한 실용주의 원칙을 지키면 역대 정부가 실패한 노동개혁의 실마리를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과거와의 단절도 불사하는 용기다. 성장률을 높이고 일자리를 늘리고 국부(國富)를 키울 수 있다면 야당 시절 옳다고 판단했던 정책이라도 포기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 대통령은 기업의 애로를 세심히 살피며 기업 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고 여러 차례 약속했다. 그러나 상법 개정과 노란봉투법 강행 등 민주당이 야당 시절 추진했던 법안에선 재계의 거듭된 재고 요청에도 아무런 입장 변화가 없다. 기업 환경 개선을 강조하면서 이런 법안을 밀어붙이는 것은 직진하는 자동차가 깜박이를 켜지 않고 좌회전하는 모양새와 흡사하다.

야당과 정부의 정책 접근법은 달라야 한다. 야당 때 거부권 행사로 막혔다고 그대로 강행하는 게 맞는지 집권세력의 시각으로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따져봐야 한다. 노동계와 재계 사이에서 절충점을 찾을 여지는 없는지 항목별로 살펴보고 필요하다면 노조를 설득하는 용기를 발휘해야 한다.

미국발(發) 관세전쟁으로 글로벌 경제지형이 요동치는 시기에 이재명 정부의 실용주의 경제가 첫걸음을 내디뎠다. 정부의 경제점수는 집권기간의 성장률과 일자리로 매겨진다.

한국처럼 수출 의존도가 높은 나라는 기업 실적이 성장률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다. 좋은 기업이 많이 나와야 성장률이 높아지고 양질의 일자리가 늘어나 소비가 살아나는 선순환이 가능해진다. 일자리는 대통령 집무실에 내건 차트에서 나오지 않는다.

기업 이익이 증가해 세수가 늘면 국가부채를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고 증세와 감세의 딜레마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구조개혁의 골든타임을 지켜낸다면 코스피 5000과 잠재성장률 3% 달성도 가능할 것이다.

이재명 정부의 경제가 보유한 최대 무기는 실용주의다. 말과 행동의 불일치를 걱정하는 시장의 의심을 가라앉히는 것도 실용주의고 계층 간, 세대 간, 이익집단 간 갈등에서 중심을 잡도록 이끄는 힘도 실용주의에서 나온다.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고 꼭 해야 하는 일을 미루지 않고 해내는 용기, 겉과 속이 일치하는(表裏一體) 실용주의는 평균점 이상의 경제성적표를 보장하는 비결이 될 것이다.


박원재 필자 주요 이력
▷핀란드 알토대 경영학석사 ▷동아일보 도쿄특파원, 논설위원, 경제부장 ▷동아닷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 ▷경성대 교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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