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경주마는 손끝만 스쳐도 깨질 크리스털...기다림이 전부다"

  • 국내 최다 승수 마주, 이종훈 씨가 말하는 '진짜 마주의 삶'

사진렛츠런파크 부산경남
[사진=렛츠런파크 부산경남 ]

대한민국 경마 역사상 누구도 밟지 못한 300승 고지. 지난 3월, 부산경남경마공원에서 국내 마주 최초로 통산 300승을 달성한 이종훈(63) 씨를 만났다. 화려한 기록 뒤엔 20년 넘게 이어온 인내와 기다림의 시간이 있었다.

-300승을 달성한 소감부터 듣고 싶다.

“사실 실감은 잘 안 난다. 그냥 한 걸음씩 걷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거다. 경마라는 게 내가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말도, 사람도 모두 제자리를 찾아야 일이 풀린다. 좋은 말, 좋은 조교사, 좋은 기수를 만났으니 운이 좋았던 거다.”

-마주로서 성공 비결이 뭔가.

“간단하다. 기다리는 거다. 조교사가 고민할 시간을 주고, 기수가 뛸 기회를 기다리고, 말이 성장할 날을 기다리는 거다. 마주가 조급하게 굴면 결국 다 틀어진다. 잘 되면 말 덕, 기수 덕, 조교사 덕이고, 안 되면 그냥 내 복이 없는 거다. 책임은 무조건 내 몫이다.”

-경주마를 크리스털에 비유한 이유가 있나.

“경주마는 진짜 조심스럽다. 손끝만 스쳐도 깨질 만큼 예민한 존재다. 그래서 더 애틋하고 소중하다. 한 마리 한 마리 다 아깝고, 쉽게 볼 수 있는 생명이 아니다. 사람들이 말 한 마리를 키워내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지 잘 모른다. 말은 생명이고, 동반자다.”

-경마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한테 경마 얘기를 많이 들었다. 해방 전 대구 벌마동 경마장 얘기를 참 자주 하셨다. 기수 복장한 사람들이 대구역에서 벌마당까지 말을 끌고 들어오는데, 그 장면이 그렇게 장관이었다고. 그 얘기를 듣고 자라다 보니 자연스럽게 경마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아버지께 마권 한 장이라도 사드리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특별한 꿈 같은 건 없었다.”

-마주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말이 큰 대회에서 우승해서 아버지와 함께 시상대에 올랐던 때다. 그 순간이 가장 자랑스럽다. 마주 하길 잘했다 싶은 순간이기도 했다. 효도 한 번 제대로 한 거지.”

-반대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코로나 때가 제일 힘들었다. 경마장 문 닫고, 적자는 계속 나고. 진지하게 마주를 접을까 고민도 많이 했다. 하지만 그만두지 않고 결국 기다리기로 했다. 상황 안 좋다고 조교사한테 화를 내봤자 뭐가 나아지나. 차라리 믿고 기다리는 게 낫다. 조교사들이 마음 편하게 자기 소신대로 일할 수 있어야 말도 잘 큰다.”

-매 순간 긴박할 수밖에 없는 경주마의 삶을 어떻게 보는지.

“말 한 마리가 평생 경주에 나서는 시간, 다 합쳐도 30분 남짓이다. 그 30분을 위해 5~6년을 쏟아붓는다. 사람들은 트랙에서 짧게 뛰는 모습만 보지만, 그 순간을 위해 얼마나 많은 땀과 노력이 들어갔는지 모른다. 환호하는 시간은 찰나고, 그걸 위해 참는 시간이 훨씬 길다.”

-마주로서 가장 두려운 순간은 언제인가.

“아침 10시 전에 경마장에서 전화 오면 가슴이 철렁한다. 간밤에 말한테 무슨 일 났다는 신호다. 부상 소식 들을 때가 제일 힘들다. 경주에서 우승하고 나서도 내가 제일 먼저 하는 말이 ‘말은 괜찮나?’다. 이게 마주의 마음이다.”

-경마의 진짜 매력은 뭐라고 생각하나.

“말이라는 동물은 참 묘하다. 눈빛은 그렇게 순한데, 근육은 헤라클레스처럼 강하다. 그런 말이 사람과 교감하면서 마지막까지 처절하게 달리는 걸 보면, 그 순간 눈을 뗄 수가 없다. 그 압도적인 에너지, 트랙 위에서 터지는 열기, 그게 경마의 진짜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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