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혼의 재발견–나주정신](3) 거북선 설계한 나대용, 이순신과 연승 이끈 '숨은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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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현 조선대 미래사회융합대학 교수 박승호 전남취재본부장
입력 2023-10-04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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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생 싸움배 연구하며 실험 창선 해추선도 만들어

  • 광해군 그의 공로 인정 정3품 승진...본격 연구 필요성

 
나대용 장군 영정사진나주시
나대용 장군 영정. [사진=나주시]

 
전남 나주시 문평면 오룡리에 있는 소충사(昭忠祠)는 나대용(1556~1612)을 모신 사당이다. 1978년 세워졌고 전라남도기념물 26호다. 소충사 앞 기념공원에는 나대용 동상과 거북선 모형, 기적비(紀蹟碑)가 있다. 1975년 4월에 세워진 이 비석에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의 글이 새겨져 있다.
“우리는 누구나 임진난(壬辰亂)을 모르는 이가 없고 임진난이라면 충무공과 거북선을 연상하면서도 정작 거북선 제작에 큰 공을 세운 나대용 장군을 아는 이는 적으므로 여기서 장군의 사적을 밝혀둔다.”
나대용의 위상을 말해주는 글이다. 그는 임진왜란 초기 역사서에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지만 이순신의 그늘에 가려졌고 그에 관한 전문적인 조사 연구 자료가 미미하다. 1912년에야 자료가 모아졌고 국가 차원에서는 1970년대 들어서면서 관심을 가졌다. 호국유적 정화사업을 벌였고 그를 기리는 소충사를 세웠다.
 
평생 싸움배 연구
 
나대용은 1556년(명종 11년) 나주 거평면 오륜동에서 태어나 27살인 1583년 무과에 합격해 무관이 됐다. 북방 방어에 6년 동안 활동했다. 임진왜란 중에 이순신을 도와 거북선을 만들고 왜구들과 많은 전투를 벌이며 바다를 지켰다. 이순신의 포장 추천을 받아 강진 현감이 된다. 이어 금구 수령, 능성, 고성 수령을 지냈다. 그는 체계적인 군사지식을 갖추고 있어서 어떤 싸움배(戰船)가 전투에 적합한지 확신을 갖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전라도 순찰사 한효순의 군관으로 일할 때는 특수군선인 창선(槍船) 25척을 건조했다. 칼과 창을 빽빽하게 꽂은 싸움배다. 1611년 남해현령으로 근무하면서 해추선 3척을 건조했다. 이 배는 어떤 형태의 군선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바다 위의 쾌속선으로 창선과 비슷한 형태가 아닐까 추정된다. 광해군이 그의 공로를 인정해 정3품 당상관인 통정대부로 진급시켰다. 나대용은 조선 수군이 보유한 군선의 단점을 파악하고 개선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이순신과 맹활약한 무장이면서 전선 건조, 특히 거북선 같은 특수전선 건조에 매우 높은 전문성을 가졌다. 그의 혁신적인 활동은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이 연전 연승을 거두는 데 크게 이바지했고 조선 수군의 우수성을 널리 각인시켰다. 나주에서는 해마다 4월 21일 과학의 날에 ‘나대용 장군 추모제’가 열린다.
 
 
나대용 장군 동상과 거북선 모형사진박승호 기자
나대용 장군 동상과 거북선 모형. [사진=박승호 기자]


이순신과 함께 연전 연승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당시 1차 방어책임자인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은 왜군을 막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배와 무기를 바다에 버리고 육지로 도망쳤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조정의 명을 받고 5월 4일 경상도로 구원 출전한다. 그가 가진 전선은 주력 판옥선이 24척, 협선 15척이 전부였다. 맞상대 왜군의 전선은 무려 90척이었다. 나대용은 유군장(游軍將)이라는 중간 지휘관을 맡아 선봉에 서서 큰 공을 세웠다. 전투 지휘능력이 탁월해 이순신은 늘 그를 곁에 뒀다. 이후 조선 수군은 옥포, 합포, 적진포에서 왜선 44척을 쳐부수며 연전 연승했다. 이어진 사천, 당항포, 율포해전에서도 승리했다. 반면 조선수군의 전선은 단 1척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사천해전 때 이순신, 나대용 모두 왜군의 철환을 맞아 부상을 입었다. 이순신은 나대용의 활약상을 평가했다. “대솔군관인 봉사 변존서, 나대용, 전 봉사 송희립은 분연히 몸을 돌보지 않고 끝까지 역전했다.”(이충무공전서)
임진왜란 초기 공적을 인정받아 나대용은 강진현감으로 진급했다.
 
나대용 장군을 모신 소충사 사진박승호 기자
나대용 장군을 모신 소충사 [사진=박승호 기자]


나대용 활동 역사적 의미
 

그의 활동은 역사적으로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거북선을 직접 감독하면서 만든 전선(戰船 싸움배) 전문가라는 점이다. 전라좌수군이 출전한 사천해전 때부터 등장한 거북선은 조선 수군이 왜군을 물리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당항포 해전에서 72척의 적선을 파괴했다고 조정에 보고했을 때 조정에서 칭찬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당시 육지에서는 승전보가 전혀 없고 오직 수군만 대첩을 거뒀으니 그럴 만하다. 명나라 지원군 수뇌부도 인정했다. 1593년 6월 명나라의 경략 송응창은 명 조정의 병부에 올리는 글에서 “전라도 등의 수병과 거북선을 조발해 바다를 포위하게 하니 왜노는 쥐 죽은 듯 지키기만 하고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고 적었다.
둘째 나대용은 직접 전투에 참가해 전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는 발포가장을 맡아 전라좌수군의 제1차 전투에 참가해 전공을 크게 세웠다. 옥포해전에서 유군장으로 참전해 일본군선 가운데 대선(大船) 2척을 쳐부쉈다. 임란 초기 이순신의 군관으로 활약했고 소강상태에서는 이순신의 주요 임무를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셋째 나대용은 혁신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로 임진왜란을 전후해 특수군선을 건조, 수군 발전에 이바지했다는 점이다. 현감으로 일하면서도 창선과 해추선을 만들었다.
 
거북선은 목선(木船)이었다
 

거북선에 관한 기록은 조선 태종 때인 1415년 처음 나왔다. 태종실록에 좌대언 탁신(卓愼)의 짧은 글이 실려 있다. “거북선(龜船)은 많은 적과 충돌해도 적이 능히 해하지 못하니 승리를 거두는 좋은 계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명하여 견고하고 교묘하게 만들어 전승의 도구를 갖추게 하십시오.”
거북선은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건조된 군선이었고 갑판이나 갑판 상부에 일종의 방호장치를 갖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아무런 기록이 없다가 임진왜란 첫해에 다시 거북선이 등장한다. 이순신이 쓴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이다.
“신(臣)은 일찍이 섬나라 오랑캐들의 변이 있을까 염려해 거북선을 별도로 제작했습니다. 앞에는 용의 머리를 설치해 대포를 쏘고 등에는 뾰족한 쇠를 꽂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능히 볼 수 있어도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습니다. 비록 적선 수백 척이라도 돌입해 포를 쏠 수 있습니다.”
이순신의 조카 이분(李芬)의 ‘이충무공행록’은 더 자세히 설명한다. “공이 전라좌수영에 계실 때 왜적이 반드시 쳐들어올 것을 알고 싸움배(戰船)를 창작했는데 크기는 판옥선만 하며 위를 판자로 덮었고 판자 위에 십자(十字)모양의 좁은 길을 내어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있게 했으며 나머지 부분에는 모두 칼과 송곳을 꽂아 사방으로 발 디딜 곳이 없도록 했다. 앞에는 용의 머리를 만들어 붙여 입은 총구멍이 됐다. 뒤는 거북의 꼬리 같아 꼬리 밑에는 총구멍이 있었고 좌우로 6개씩 총구멍이 있었다. 그 모양이 거북 모습과 같아 거북선(귀선 龜船)이라 했다.”
거북선은 3층 구조였고 노를 저어 움직였다. 배 상단 갑판 위에 다시 두꺼운 목판을 씌웠다. 다른 조선시대 군선과 구별되는 특징이다. 내부 승선자를 보호할 수 있는 포탄 방호벽은 아니지만 적의 화살 정도는 막을 수 있었다. 거북선은 철갑선이 아니다. 1957년 미 해군 대령 해거만이 ‘프로시딩스’ 잡지에 거북선을 세계 최초의 철갑선으로 소개했다. 또 1895년 유길준이 ‘서유견문’에서 “거북선이 천하에서 가장 먼저 만든 철갑선”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거북선은 목선이다. 이유는 두 가지. 거북선은 돌격선이라서 속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목판보다 15배 이상 무거운 철판을 쓰면 노를 저어 움직이는 거북선의 전투력이 떨어진다. 또 철갑선은 철판이 바닷물에 쉽게 녹슬어 수명이 짧지만 목선은 길다. 승선인원은 125~130명 정도.
 
 
나대용 장군 생가 사진박승호 기자
나대용 장군 생가 [사진=박승호 기자]


나대용의 역할
 

거북선 건조에 관해서는 많은 기록이 있지만 나대용이 혼자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기록은 없다. 대부분 ‘나대용이 이순신을 도와 거북선을 건조했다’고 돼 있다. 이순신의 휘하에 들어갔으니 지휘관이 최우선 아닌가. 이순신은 수많은 해전을 치러 배에 관한 지식이 풍부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직접 거북선을 설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대용이 설계하고 감독, 제작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체암(遞菴)선생행장’과 ‘행장’을 보자.
“나대용은 신묘년(1591년)에 충무공이 본도(전라도) 좌수영에 있을 때 주부(主簿)로서 집에 있다가 장차 왜적이 침략해 올 것으로 알고 종제(從弟) 치용(致用)과 함께 충무공을 찾아가 방어를 준비하는 계책을 깊이 말하자 충무공은 크게 기뻐하며 막부에 머물게 했다. 영내의 모든 일을 협의해 구획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거북선 3척을 찬조(贊造)해 전후의 크고 작은 싸움에서 매양 승리를 거뒀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나대용은 거북선 설계도를 펴놓고 설명했을 것이다. 이순신은 전장에서 나대용이 아팠을 때 직접 챙기며 걱정했고 승진을 도왔다.
나대용 역할과 관련해 아쉬운 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순신이 이뤄낸 전공은 지금까지 높게 평가되고 있지만 그를 도와 맡은 역할을 다한 장졸들의 활약상이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점이다. 또 하나는 나대용이 공신으로 책훈되지 못한 점이다. 그는 전란 직후 6년 동안 부모상을 연이어 치르는 바람에 전후(戰後) 논공행상에서 빠졌다.
 
나대용 장군 부부의 묘 사진박승호 기자
나대용 장군 부부의 묘. [사진=박승호 기자]


고향 방죽골서 거북선 제작 몰두
 
나대용의 경력 가운데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1583년 무과인 병과에 합격해 훈련원 봉사로 근무하다 6년 후 고향 나주로 돌아온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 이순신을 찾아가기까지 2년 동안 그는 무엇을 했을까. 조선대 국사연구원장인 김영원 교수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나대용은 당시 거북선 제작에 착수한다. 집 뒤뜰에 있는 초당(草堂)의 벽에 거북선 설계도를 그려놓고 거북선 제작에 몰두했다. 각고 끝에 마을 앞 방죽에서 완성된 거북선을 진수할 수 있었다. 지금은 논밭으로 변했다. 마을 이름도 방죽골이다. 방죽골을 중심으로 나주에서는 지금도 ‘물방개 노래’가 구전되고 있다. 노래 가사는 이렇다.

‘빙글빙글 돌아라. 잘도 돈다 물방개야.
비바람 거친 파도 걱정이랑 하지 말라.
크게 싸울 장수 나와 낙락장송 다듬어서
너 닮은 거북배 바다 오적 쓸어낸다.
어허둥둥 좋을시고 빙글빙글 돌아라. 잘도 돈다 물방개야.’

특이한 대목이 있다. 앞에서 언급한 태종 때 좌대언 탁신(卓愼)의 고향이 지금의 광주광역시라는 점이다. 나주에서 자동차로 15분 거리다. 또 그는 한때 나주에 유배된 적이 있다. 거북선의 가치를 가장 크게 평가했던 탁신이 나주와 연고가 있었다는 사실이 절묘하다. 하지만 기록이 없다. 탁신이 만약 거북선과 관련된 기록을 남겼다면 나주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나주와 탁신, 나대용과 거북선 관계는 아직 베일에 가려진 부분이 많다.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다.

* 참고문헌 : 선조실록, 이충무공전서, 나대용장군 종합학술보고서(2022)나대용장군 평전(2022)
[백승현 조선대 미래사회융합대 교수, 박승호 전남취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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