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완의 월드비전] 中 따돌리며 공급망 새판짜는 美.. '셈범' 복잡해진 글로벌 반도체 업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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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완 논설위원
입력 2023-07-02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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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국가전략회의 주재하는 윤석열 대통령
    (서울=연합뉴스) 임헌정 기자 = 윤석열 대통령이 8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제17차 비상경제민생회의 겸 반도체 국가전략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3.6.8
    kane@yna.co.kr/2023-06-08 12:2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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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국가전략회의 주재하는 윤석열 대통령 (서울=연합뉴스) 임헌정 기자 =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8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제17차 비상경제민생회의 겸 반도체 국가전략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21세기는 반도체의 시대다. 자동차에서부터 인공지능, 최첨단 전투기에 이르기까지 미래 산업과 안보에 필수인 반도체는 제조 과정이 유난히 복잡하고 제품도 다양하다. 그리하여 설계, 공정, 양산, 패키징 등 모든 분야에서 기업 간 끊임없는 협업은 필수다. 반도체 산업의 효율적인 국제 분업과 협업의 생태계는 세계화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꼽히기도 한다. 미국과 중국의 기술 패권 경쟁이 시작되고 코로나 팬데믹으로 세계 경제가 공급망 대란을 겪은 이후 국제질서는 '세계화의 쇠퇴'로 요약되는 대변환기에 접어들고 있다. 특히 반도체는 이제 개별 기업의 차원을 넘어 '경제 안보'와 국가전략기술의 중심에 놓여 있다.   

미국은 중국의 독자적인 첨단 반도체 생산을 막기 위해 동맹국들을 압박하며 글로벌 공급망 새판 짜기를 주도하고 있다. 지난해 통과된 520억 달러(약 68조5000억원) 규모의 반도체지원법은 세계 반도체 산업의 판도를 동북아에서 자국으로 중심축을 이동시키겠다는 의도다. 미국에 반도체 시설을 지으면 업체당 최대 30억 달러의 보조금 신청이 가능한데 보조금을 받는 기업들은 중국에 대한 반도체 시설 투자에 제한을 받을 뿐 아니라 초과 이익을 미국과 공유해야 한다. 특히 반도체 수율, 판매 가격, R&D 계획 등 핵심 기밀의 회계자료까지 요구해 기업 경영의 자율성을 해치고 자칫 핵심 기술의 유출까지 우려되고 있다. 자유시장 개념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여러 가지 독소 조항은 보조금 신청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미국은 지난해부터 인공지능과 슈퍼컴퓨터 등으로 이어지는 첨단 반도체 기술과 장비의 중국 반입을 사실상 금지하고 핵심 장비의 제조업체가 있는 일본과 네덜란드에 동참을 요구하고 있다. 

EU와 일본도 반도체 패권 경쟁에 가세하고 있다. 지난 4월 430억 유로(약 62조원)를 투입하는 '유럽반도체법(ECA)'을 승인한 EU는 첨단 반도체 점유율을 2030년까지 현재의 두 배 수준인 20%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위탁생산) 업체인 대만의 TSMC는 일본 정부의 막대한 지원금을 받으며 내년 말 가동을 목표로 구마모토현에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주요 선진국들은 반도체 산업을 더 이상 자유시장의 경쟁에 맡기지 않고 있다. 미국과 동맹국들이 군사적 안보동맹처럼 칩 동맹을 결성하고 중국을 고립시키는 전략에 나서면서 세계 반도체 지형이 격변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정부는 2015년 반도체 산업을 10대 전략 산업의 1순위로 선택한 이후 자국의 반도체 자급률을 당시 10% 수준에서 2025년까지 70%로 끌어올리려고 전폭적인 지원에 나서고 있다. 일부 반도체 전문가들은 중국이 3~5년 내에 설계와 조립, 테스팅과 패키징 분야까지 필요한 기술을 모두 확보해 고난도 첨단 칩을 자체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최근 반도체 대중 수출 부진이 한국의 대중 무역적자의 근본 원인으로까지 분석되고 있는 것은 그동안 4차 산업혁명 시대 아킬레스건으로 평가되던 중국의 반도체 기술이 한국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최대 우방국인 미국 내 투자 확대를 지속하는 한편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놓치면 안 되기 때문에 고민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장기적으로 미국과 중국의 두 축을 중심으로 첨단 기술산업이 이원화되어 서로 잘 호환하기 힘든 생태계가 공존할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반도체도 예외일 수 없다. 문제는 재편 과정에서 미·중 간 초강경 대치로 인해 세계 경제가 극심한 혼란에 빠질 우려가 있다. 예를 들면 미국이 초강력 수출 통제나 무역 제재로 중국의 숨통을 죄면 중국은 희토류 수출 금지나 미국 국채 매입 중단과 같은 그동안 아껴둔 치명적인 보복 카드로 대응할 가능성이 있다. 또 반도체 파워인 대만에 대한 중국의 군사적 위협도 큰 변수다. 

'실리콘 실드(silicon shield)'


미국이 중국과의 반도체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현재로선 제조공정 기술과 시설에서 최고 수준인 한국 및 대만과의 협력이 필수다. 특히 전 세계 반도체 칩의 60%를 위탁생산하고 있는 대만의 TSMC는 미국의 주요 기업들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중국과 대만의 양안 관계 긴장이 고조되면서 미국으로 볼 때 대만 반도체에 대한 지나친 의존도는 미국의 국가 안보와 산업 안보를 위협하는 요소다. 실질적으로 2021년 발생한 차량용 반도체 공급 부족 사태로 세계 자동차 생산설비가 멈추고 시장이 일대 혼란에 빠지자 미국 정부와 기업들 사이에 탈아시아 공급망 재편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대만 반도체 산업은 '실리콘 실드(silicon shield)'로 불린다. 중국이 대만에 군사작전을 감행하면 대만에서 조달하는 반도체와 전자부픔의 공급이 중단되어 중국 내 공장이 멈추기 때문에 대만의 반도체 산업이 일종의 방패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대만의 반도체 공장과 기술이 중국으로 넘어가는 것은 미국에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지난해 12월 TSMC는 총 400억 달러(약 52조원)를 투자해 2026년까지 애리조나에 두 개의 첨단 3나노미터 파운드리 공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만에 하나 대만이 중국의 공격을 받아 TSMC 공장이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최첨단 칩의 공급에 큰 문제가 없도록 하겠다는 의도다. 미국과 중국이 대만 문제로 서로 비난의 수위를 높이는 가운데 지난달 초 세스 몰턴 미국 하원의원(민주당·매사추세츠)은 '2023 밀컨 콘퍼런스'에서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면 TSMC를 폭파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언급은 복잡한 반도체 공급망에 대한 미국 정치인들의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다. 40여 년 전 반도체 생산을 아웃소싱한 미국은 대만과 제조 기술력에서 비교가 안 된다. 대만의 파운드리 공장은 세계 최첨단 칩의 90%를 생산하고 있다. 현재 미국 인텔의 선단 공정은 7나노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TSMC는 5나노 미만의 최첨단 칩을 양산하고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애플 등 미국의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중국과 대만의 공급망에 뿌리를 깊숙이 내리고 있다는 게 현실이다. 


미·중·대만 트라이앵글 체인 

현재 미국 기업들의 반도체 설계 역량은 으뜸이지만 반도체의 최종 조립생산은 아시아, 특히 중국과 대만 기업들에 집중되어 있다. 애플이 지난 15년간 이룩한 아이폰 신화도 아시아의 안정된 공급망에 기반한 것이었다. 최근 파이내셜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아이폰에 들어가는 부품 1500여 개 중 절반가량이 중국(26%)과 대만(23%)에 소재한 회사들에 의해 공급된다. 특히 5G 모뎀과 와이파이(Wi-Fi) 칩, 인쇄회로기판(printed circuit board), 카메라 렌즈 등 가장 핵심적인 부품은 거의 대만에 의존하고 있다. 아이폰 한 대에서 차지하는 자재비 중 36%가량이 대만 기업들로 흘러간다. 중국은 자국 내에서 아이폰 95%를 조립생산하고 있다. 아이폰 제품 하나만 살펴보아도 현재 미국과 중국 그리고 대만의 트라이앵글 체인이 얼마나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애플의 하청업체로 일하는 대만과 미국 기업들이 중국 본토에 수백 개의 생산시설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만의 폭스콘은 중국 정저우 공장에서 전 세계 아이폰의 80%를 생산하고 있다. 애플은 또 총매출 중 20%가량을 중국 시장에서 창출한다. 미·중·대만의 공급망 트라이 앵글이 미.중 간 갈등이 고조되어도 공고한 이유다. 미국은 정부가 민간기업들을 통제하기 힘들다. 중국은 이점을 이용해 미국 선거에서 주요 돈줄인 미국 대기업들에는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내며 그들이 앞장서 대중국 규제 해제를 위한 로비스트 역할을 하도록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TSMC의 애리조나 반도체 공장 착공식에서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미국에 제조(manufacturing)가 돌아왔다"고 환호했다. 중국 본토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민가 30년 가까운 미국 반도체 엔지니어 생활을 접고 1987년 대만 수도 타이베이 외곽에 TSMC를 설립해 파운드리 시장의 신화를 창조했던 모리스 창(92)도 이날 착공식에 참석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반도체 산업이 "세계의 큰 지정학적 상황 변화를 목격했다"며 "세계화(globalization)와 자유무역이 이젠 '거의 죽었고(almost dead)' 다시 돌아올 가능성이 없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TSMC의 최대 고객인 애플의 팀 쿡 CEO도 자신들이 디자인한 핵심 칩에 'Made in America' 스탬프가 붙게 되어 미국 제조업 역사에서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중요한 순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불과 몇 개월 뒤인 올해 3월 팀 쿡 회장은 중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애플과 중국은 같이 성장한 '공생(symbiotic) 관계'라고 했다. 그가 애플스토어에 나타나자 고객들은 그를 박수로 환영했다. 애플은 최근 인도에 엔지니어와 디자이너를 파견하고 투자를 늘리는 등 시장 다변화를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인도가 중국 시장의 대안이 될지는 미지수다. 최근 월스트리트저널은 폭스콘 관계자 말을 인용해 인도에서 조립되는 아이폰을 중국보다 싼 비용으로 만들기 힘들다고 보도했다. 신규 공장을 지어야 하고, 수많은 부품을 해외에서 가져와야 하고 또 추가적으로 들어갈 물류비용까지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팀 쿡뿐 아니라 중국이 올봄 코로나 봉쇄 조치를 풀고 리오프닝(경제활동 재개)에 나선 이후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등 미국 기업 CEO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머스크 CEO는 방중 기간에 “미국과 중국의 이익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샴 쌍둥이처럼 얽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미·중 갈등 구도 속에서도 미국 기업들은 14억 인구의 중국 시장과 최대 생산기지를  포기할 수 없다. 지난해 역대 최대치를 기록한 미국과 중국의 무역 규모를 보면 중국을 배제하고 대중 의존도를 줄이며 글로벌 공급망을 재편하겠다는 바이든 행정부의 전략은 현실성이 부족함을 입증해주고 있다. 특히 자국의 실리만을 우선시하고 동맹국들에는 고압적인 자세의 새판 짜기는 많은 문제점을 노출할 것으로 보인다.   

미·중 수위 조절 

지난달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에 이어 재닛 옐런 재무부 장관도 중국을 곧 방문한다. 그동안 강경 일변도 정책을 펼치던 미국이 최근 중국과 오랜만에 고위급 간 소통을 통해 상호 갈등이 충돌로 비화하는 것을 막자고 의견을 모으면서 양국 간 화해 무드가 싹트는 모습은 세계 경제에 그나마 긍정적인 요소다. 이러한 기류 변화는 무엇보다도 미국이 대선 국면에 들어서고 있고 중국이 리오프닝 이후에도 경제 회복이 늦어지면서 양국이 수위를 조절하는 것이 서로의 이해 관계와 부합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중국 경제가 침체에 빠지면 비교적 양호한 흐름을 보이는 미국 경제도 대선을 앞두고 어려운 상황으로 빠져들 수 있다. 중국의 입장에서도 경기 둔화를 극복하려면 미국과의 관계 개선은 필수다. 미국과 중국이 국내 사정을 이유로 서로 충돌을 피하며 한 발씩 물러서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첨단 반도체 분야에서 양국 간 첨예한 전략적 경쟁은 더욱 뜨거워질 전망이다.  

현재 반도체 패권 경쟁에 나선 국가들은 GVC(글로벌 가치사슬)를 통한 생산 효율성 제고보다는 자국 생산 위주의 경제 안보에 역점을 두고 있다. 반도체 산업이 지닌 고유의 특성인 협엽과 분업 체제가 자국 이기주의에 의해 무너질 중대 기로에 처해 있다. 또 자본주의의 엔진인 시장 메커니즘의 쇠퇴는 자칫 미래 세계 경제에 치명적 부메랑이 될 위험이 크다. 특히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반도체 강국으로 도약한 우리나라는 미·중 간 고래싸움의 유탄을 슬기롭게 피하면서 다른 나라가 따라올 수 없는 기술 격차를 지켜내는 것만이 살 길이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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