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종 칼럼] 우리만 모르는 '민주주의 모범국가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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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종 숙명여대 국제관계대학원 교수
입력 2023-04-05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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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종 교수]


 
지난주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내년에 열릴 3차 민주주의 정상회의 주최국이 한국이라고 발표했을 때 필자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 수백년 민주주의 역사를 가진 영국도 아니고 프랑스도 아니고 한국이라고? 서로를 극렬하게 공격하는 진영 싸움에 날 새는 줄 모르고 정치판이 증오와 갈등으로 가득 찬 한국이라고? 그렇다. 우리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어느덧 바깥에서는 한국이 민주주의의 모범 국가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잘해야 30년 밖에 되지 않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밖에서는 본받아야 할 대상으로 여겨진다.

물론 미국 정부의 계산도 작용했다. 중국을 견제하고 우방인 한국과의 결속을 좀 더 강화해 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한국을 택한 이유도 있다. 또 최근 한국 정부가 일본과의 역사 문제에서 양보를 하여 한·미·일 공조가 좀 더 쉬워진 것에 대한 보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민주주의가 괄목하게 성장한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휴전선 바로 넘어 북한이 중세 암흑기에나 가능한 일인 독재 체제를 이어나가는 상황에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더욱 돋보일 수밖에 없다.

밖을 살펴보면 이런 점은 더욱 눈에 띈다. 민주주의의 아성이라는 미국에서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패배한 선거에 불복한 지지자들이 의회당을 난입해 사상자까지 발생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지난주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과 성관계를 맺은 포르노 스타의 입막음을 위해 금품을 제공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로 인해 트럼프 지지자들의 폭동이 우려되어 뉴욕시는 비상체제에 들어갔다. 브라질에서도 지난 1월 선거 결과에 불복한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입법, 사법, 행정부 건물을 난입해 폭력을 휘둘렀다.

사실 민주주의의 후퇴는 전 세계에서 확산되고 있다. 개방과 개혁으로 서구화되던 중국은 시진핑 주석 집권 후 전체주의로 회귀하고 있고 러시아 역시 푸틴 대통령의 권위주의가 날로 심화되고 있다. 애써 민주주의로 향하던 헝가리나 폴란드 같은 나라 역시 권위주의 요소가 강화되고 있다. 최근에는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총리가 사법부를 장악하려는 법안을 추구하다가 엄청난 국민 저항에 부딪혔다. 이런 상황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권위주의에 대항하는 민주주의의 결속과 확산을 위해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추진해 지난주 두 번째 회의를 마쳤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높이 평가되는 이유 중 하나는 선거 결과 승복이다. 지난번 대통령 선거는 단지 0.73퍼센트의 아슬아슬한 표 차이로 당락이 갈렸지만 패자는 깨끗이 승복했다. 미국이나 브라질에서는 그 이상의 표 차이가 났지만 패자는 승복하지 않았고 부정 선거 의혹만 꼬리를 물었다. 한국에서도 지난 2020년 국회의원 선거에 대한 부정 선거 의혹이 있지만 국민 다수의 동조를 받지는 못하고 있다. 선진, 후진국을 막론하고 많은 국가에서 선거 결과에 대한 시비가 일어나는 상황에서 한국의 경우는 모범이 된다.

또 하나 한국이 돋보이는 점은 어느 대통령도 법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이다. 전직 대통령 다섯 명이 부패나 내란 선동 등 혐의로 조사를 받거나 사형 혹은 수십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대통령이 탄핵을 당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기소로 폭동이 우려되는 미국에 비하면 훨씬 선진화된 모습이다.

이와 관련 뉴욕 타임스 베테랑 기자인 니콜라스 크리스토프는 지난주 칼럼에서 “전직 대통령 체포의 전문가”라며 한국 민주주의를 극찬했다. 한때는 한국 민주주의가 비성숙했다고 여겼으나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인정했다. 과거 뉴욕 타임스 홍콩 지국장을 하며 한국 관련 기사를 많이 썼던 그는 또 한국이 “법치(rule of law)”뿐 아니라 “치유(healing)”의 모범 국가라고 평가했다. 즉 사형이나 중형을 선고 받았던 전직 대통령들이 모두 1년에서 4년 정도의 복역 후 사면을 받아 석방되었던 점을 상기시켰다.

이렇듯 밖에서 후하게 평가받는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한국인 자신은 크게 확신하지 못하는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정파와 이념에 따라 극렬하게 갈라진 한국 정치의 모습은 추해 보일 뿐 아니라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선거 결과는 승복하지만 새 정부에 대한 정당성은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윤석열 정부에 대한 지금 야당의 태도가 그러하고 문재인 대통령 시절 지금의 여당의 태도가 그러했다. 상대방의 정책이면 무조건 반대하고 내가 속한 진영의 입장이면 무조건 찬성한다. 야당은 대통령의 시시콜콜한 행위뿐 아니라 그 가족까지도 비하하고 새 정권이 들어서면 전 정권 정책 및 인사에 대한 보복이 이어진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아직 갈 길이 먼 것이 사실이다. 제도 면에서나 시행 면에서 개선을 위한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한국의 민주주의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성과를 이루었다는 점이다. 세계의 시각에서 볼 때는 유례가 없는 일이고 충분히 모범이 될 만한 사례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특히 그러하다. 한국전쟁 후 자신들이 한국에 민주주의 제도를 수출할 때 한국은 아직 봉건 암흑 시대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불과 몇 십년 만에 이제 한국의 민주주의는 미국의 그것과 대등하거나 아니면 추월하는 정도에 이르렀다. 이것이 바이든 대통령이 차기 민주주의 정상회의 주최국으로 한국을 선정한 이유일 것이다. 그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은 온전히 한국인의 몫이다.


이병종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언론정보학 박사 ▷AP통신 특파원 ▷뉴스위크 한국지국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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