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완의 월드비전] 일대일로· 페트로 위안 …중동에 펼쳐진 '차이니스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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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완 논설위원
입력 2023-02-01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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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밸런타인 데이(Valentines's Day·2월 14일)는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관계에서 기념비적인 날이다. 크림반도 얄타에서 미·영·소 연합국 정상회의를 마치고 귀국하던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그는 수에즈 운하에 정박한 미 해군 ‘USS 퀸시’호 갑판 위에서 압둘 아지즈 이븐 사우드 국왕을 만난다. 사흘간 진행된 선상 회담에서 양국 간 지정학적 동맹 관계에 대한 기본 프레임에 합의한다. 당시 대규모 석유 개발과 함께 전제적 군주정치의 기반을 다져가던 이븐 사우드 국왕은 루스벨트에게 왕실의 안위와 군사적 지원 약속을 받는다. 대신 사우디산 원유를 원하는 만큼 ‘합리적 가격’에 미국에 공급해주기로 약속한다. 안보와 경제의 전형적인 그랜드 바겐(grand bargain)이 성사된 것이다.

 

1945년 USS 퀸시호 선상에서 루스벨트 대통령과 회담하는 이븐 사우드 국왕, [위키피디아] 

사우디-중국 밀착에 요동치는 중동 정세

두 사람 간 만남은 지구촌의 '화약고'로 꼽히는 중동에서 80년 가까이 지속된 미·사우디 동맹 관계의 역사적 출발선이다. 최근 미국과 중동의 디커플링, 미국의 빈자리를 파고드는 중국의 행보는 역내 경제는 물론 국가 안보 측면에서 다자간 복합 경쟁을 심화시키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2018년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피살 사건 이후 미국과 불편한 외교 관계를 이어가면서 중국·러시아와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사우디의 앙숙으로 중동의 패권을 두고 다퉈온 이란은 미국과 체결한 핵합의(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가 무산되고 반정부 시위 탄압에 대한 서방의 비판에 고립이 심화되고 있다. 이에 '미국 견제'라는 목표 아래 공동 전선을 펼쳐왔던 중국이 사우디 등 걸프만 왕정국가들과 에너지 분야 혁신 등 경제 협력뿐 아니라 호르무즈 해엽 3개 섬에 대한 영토 분쟁과 군사·안보 협력 문제까지 논의를 하자 이란은 발끈했다. 이에 당황한 중국은 황급히 이란 달래기에 나서기도 했다. 중동 내 외교 질서의 근간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형국이다.   

2010년대 셰일(shale) 혁명 이후 세계 최대 산유국으로 변한 미국은 원유 수입이 감소하며 중동과 디커플링이 심화되고 있다. 이를 틈타 세계 최대 에너지 수입국 중국은 한걸음 한걸음 세계 원유시장을 통제하는 힘을 키우고 있다. 수입 원유 중 50%가 중동산인 만큼 중국은 이 지역에서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망 확보에 공을 들이면서 다각적 경제 협력과 무역 파트너십도 적극 모색하고 있다. 특히 석유 의존 경제 탈피와 경제 개혁을 위해 산업 다각화와 대규모 국책사업을 추진 중인 사우디, 아랍에미리트(UAE) 등 다수의 중동 국가에서 항만, 산업단지, 배후 도시 건설을 주도하며 현대판 육해상 실크로드인 일대일로(一帶一路)에 불을 댕기고 있다. 

사우디와 걸프만 국가들이 중국과 밀착하는 이유는 경제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이 인도·태평양 지역으로 관심을 돌리자 중동 국가들의 소외감은 커지고 있다고 CNN 등 주요 외신들은 분석하고 있다. 특히 군사력이 미약한 걸프만 국가들로서는 미국이 지역안보에서 손을 뗐을 때 새로운 안보 협력 파트너가 필요한 상황이다. 중국은 일종의 위험 회피 카드인 것이다. 그동안 중국은 미국이나 러시아와 달리 시리아 내전이나 이란의 핵 개발, 아랍과 이스라엘 간 평화 협상 등 중동 지역 주요 골칫거리에서 한발 뒤로 물러나 있었다. 소위 덩샤오핑의 도광양회(韜光養晦) 외교원칙이 중동에서는 지켜지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해 12월 시진핑 주석의 사우디 방문은 중동에 대한 적극 개입으로 방향 전환을 공식화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시 주석의 방문은 지난 7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에 따른 글로벌 에너지 위기 타개 차원에서 석유 증산을 요청하기 위해 사우디를 찾았다가 '빈손'으로 돌아간 것과 큰 대조를 보이고 있다. 또 1945년 루스벨트-이븐 사우드의 'USS 퀸시’호 회동과는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3박 4일 순방 기간에 시 주석은 제1회 중국·아랍 정상회의와 중국·걸프협력회의(GCC) 콘퍼런스에 참석해 연설하고 최소 17개국 정상과 연쇄 정상회담을 하며 아랍권과 관계를 다졌다. GCC는 사우디, UAE, 쿠웨이트, 카타르, 바레인, 오만 등 6개 산유국의 협력기구다. 사실상 수니파 이슬람 국가의 모임으로 시아파의 맹주인 이란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중국은 2020년 EU를 제치고 GCC의 최대 무역 거래국이 되었다. 현재 GCC 6개국과 자유무역협정 체결을 마무리하고 있다. 시 주석이 사우디의 실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를 만난 후 발표된 4000자에 달하는 공동성명은 에너지 분야 혁신, 우주 개발, 디지털 경제, 인프라 건설, 이란 핵 프로그램,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우호 협력을 다짐하고 있다. 

사우디와 중국의 밀착은 사우디·미국 관계뿐 아니라 글로벌 에너지 질서의 대변화를 의미한다. 파이살 빈 파르한 알 사우드 사우디 외교장관은 미국과 중국 두 나라 모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우린 결코 이를 제로섬 게임으로 여기지 않습니다(We don’t see it as a zero-sum game by any means)." 그의 말이 진실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중국과 사우디의 뉴파트너십 구축은 양국에 중동의 복잡한 역학구조에 얽매이지 않는 실익 추구와 새로운 기회 창출을 위한 도전임에 틀림없다. 



 

작년 12월 8일 사우디아라비아에 도착한 시진핑 주석이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에게 안내를 받고 있다, [SPA/AP] 

 
페트로 위안 시대 올까? 

미국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최대 경제대국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이유가 여러 가지 있지만 글로벌 에너지 시장을 자신들 룰에 따라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이 손꼽힌다. 미국은 엄청난 군사력으로 중동의 원유 공급을 좌지우지했다. 1971년 닉슨 대통령은 경제와 화폐의 연결고리였던 금본위제를 일방적으로 폐지한 후 달러는 시장의 신뢰를 잃었다. 하지만 1974년 사우디와 손을 잡고 원유 대금을 달러로 지급하는 데 합의하면서 지금의 기축통화국 위치를 공고히 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시 주석의 사우디 방문을 계기로 양국이 달러화 대신 위안화를 통한 원유 결제, 즉 '페트로 위안(petro yuan)' 체제  등 세계의 새로운 에너지 질서 구축을 위한 작업에 나섰다고 평가하고 있다. 졸탄 포자르(Zoltan Pozsar) 크레디트스위스은행 애널리스트는 고객들에게 보낸 투자 메모에서 중국이 최근 급변하는 지경학적 변환을 틈타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룰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서방이 달러화 외환보유액을 무기화하자 중국은 세계 각지에서 비(非)달러화 원유 결제를 늘리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미 산유국 협의체인 오펙플러스(Opec+)의 주요 회원국인 러시아, 이란, 베네수엘라 등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3국은 이미 중국에 대폭 할인된 가격으로 원유를 팔고 있다. 중국이 이들 3개국과 맞먹는 원유 매장량을 가진 GCC 국가들과 협력을 강화한다는 것은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지각변동을 예고한다고 할 수 있다. .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방 제재에 시달려온 러시아는 중국과의 무역에서 달러화로 거래하는 스위프트(SWIFT) 국제은행 간 금융서비스 대신 중국 CIPS(Cross-Border Interbank Payment System)로 갈아탔다. 이란, 베네수엘라, 인도네시아도 현재 중국과의 일부 거래를 위안화로 결제하고 있다. 미국 달러화 리스크의 위험 분산을 위해 CIPS를 선택하는 국가들이 늘어난다면 오랫동안 에너지와 상품시장을 기반으로 기축통화 자리에 오른 달러화의 지위에도 차츰 영향을 줄 수도 있다. SWIFT 자료에 따르면 위안화는 국제결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 이내지만 최근 엔화를 추월해 달러, 유로, 파운드화에 이어 세계 4대 결제통화로 등극했다. 중국은 최근 일대일로를 명분으로 중동뿐 아니라 아프리카, 중남미, 아시아 등 전 세계 저개발 국가에 통화스와프를 통한 구제금융성 자금을 제공하거나 투자를 늘리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들 국가의 위안화 사용도 크게 늘리면서 궁극적으로 '위안화의 기축통화' 진입을 노리고 있다. 즉, 일대일로와 기축통화 구상은 중국의 글로벌 패권국 도약을 위한 두 개의 큰 기둥이다.  

미국과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지만 아직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우디가 50년간 이어온 미국과의 '페트로 달러 협정'을 깨고 원유 대금을 달러화 대신 위안화 결제로 전면 변경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아직 대외적으로 사우디와 중국은 양국이 '페트로 달러'의 포기와 위안화 표시 원유 계약 문제를 논의했다는 소문을 확인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애널리스트들은 사우디가 중국으로 수출하는 원유 일부에 대해 위안화 결제를 허용할 것으로 보고 있다. '페트로 달러 협정이란' 중동의 1차 오일 쇼크 이후 미국과 사우디가 1974년 6월 원유 대금 결제를 달러를 통해서만 하겠다고 합의한 것을 이른다. 석유를 달러로만 사야 하면 세계 각국은 더 많은 달러가 필요할 테고, 달러 가치는 그만큼 높아질 수밖에 없다. 중동 산유국은 원유 판매 대금으로 받은 달러를 미국 금융기관에 예치하거나 미국 국채에 투자했다. 미국은 다시 이 돈으로 상품을 수입해 세계에 돌려주는 달러 순환 체계가 세계경제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1971년 미국이 금 태환을 중지한 이후 가치가 폭락한 달러가 다시 한번 기축통화로서 지위를 공고히 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달러는 막강한 군사력과 함께 미국의 패권을 지탱하는 든든한 두 개의 기둥이 됐다. 
 
만약 사우디가 중국과 위안화로 원유 거래를 시작하고 다른 국가들도 이에 동참하면 중국의 '페트로 위안화' 시대라는 꿈은 현실로 성큼 다가올 수도 있다. 하지만 중국은 아직 갈 길이 멀다. 아직 자본시장 자유화 수준이 선진국들에 비해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페트로 위안 시대를 향한 당근책으로 중국은 무역과 금융거래에서 위안화의 금태환을 추진 중이다. 중국의 금융 안전망(financial saftey-net)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려를 완화시키기 위해서다. 중국의 페트로 위안화 드라이브가 성공하려면 금 태환뿐 아니라 투자가들로 하여금 무역 거래는 물론 비무역 분야에서도 위안화를 안심하고 거래할 수 있도록 하는 강력한 인센티브가 필요하다. 바로 국내 자본시장 육성이다. 외환 헤지 등 대규모 외자 유출에 필요한 금융 시스템의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다.

세계 각국의 정책 입안자와 기업들 그리고 투자가들은 세계 에너지 시장의 혁신과 페트로 위안화를 향한 중국의 움직임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다. 페트로 달러 유입이 미국에서 금융 사업을 크게 성장시켰듯이 페트로 위안화가  중국의 금융 혁신에도 일조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또 에너지 혁신으로 중국에 값싼 에너지가 충분히 공급된다면 중국으로 이동하는 세계의 기업들도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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