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버려지는 국회 세미나 자료집, 그 씁쓸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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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은 수습기자
입력 2022-10-3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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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여간 정치부 국회팀으로 배치돼, 각종 세미나를 취재하며 필사적으로 하던 일이 있다. 바로 '자료집' 확보다. 이제 막 수습기자 2개월를 넘긴 내게, 매일 새로운 세미나에 참석해 '워딩'(wording)을 따고, 기사 한 꼭지를 써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워딩 일부를 놓치거나 마감이 촉박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한 줄기 빛이 돼준 것이 자료집이다. 자료집엔 세미나 참석자 목록과 발제·토론문 등이 실린다. 덕분에 현장 취재 중 놓친 부분을 보완할 수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자료집 구하기에 급급한 날이었다. 동기들 것까지 챙기려고 스태프에게 여러 권을 가져가도 되는지 물었다. 그랬더니 "아 뭐 네...어차피 끝나면 쓸 일도 없고 버릴 텐데요. 다 가져가셔도 됩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차피 끝나면 쓸 일도 없고 버릴 텐데요?' 이 구절에 꽂혀 하루를 보냈다. 생각해보니 맞다. 나 역시도 기사 마감이 끝나면 자료집을 가방에 쑤셔 박고 퇴근길에 오르기 바빴다. 다시 펼쳐보는 일은 없었다. 그 후 자료집이 향한 곳은 쓰레기장이다. 미처 배포되지 못한 것들도 마찬가지다. 빳빳한 새것 상태 그대로 쓰레기 매립지를 떠돌고 있을 것이다.

그저 A4 종이 뭉치였다면 잘 썩기라도 할 텐데, 배포된 자료집 대부분은 표지에 특수 코팅이 된 무선 제본 형태를 띤다. '라미네이팅'을 통해 자료물에 얇은 코팅막을 씌우고 이를 책처럼 제본하는 것이다. '막'의 원재료는 대부분 오랫동안 썩지 않는 특수 플라스틱 등이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가 썩지 못한 쓰레기들이 지구를 오염시키고, 그렇게 생성된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고통받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때론 주최 측에 보채가며 구했던, 마감으로부터 날 살리던 자료집이 곧 나를 고통에 빠뜨린다니.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라는 영화 <아가씨>의 명대사가 떠올랐다.

국회 의원회관에선 올해만 1045건의 세미나가 열렸다. 이마저도 10월까지의 수치다. 모두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보자며 마련된 토론의 장이다. 그중엔 환경과 관련한 것들도 많다. 모든 세미나마다 자료집이 발간된다. 넉넉한 수량이 준비됐다가 끝나면 폐기된다. 한 번 사용되고 버려지는, 심지어는 한 번도 펴지지 않고 버려지는 수량이 얼마나 많을까. 발전된 미래를 위해 기획된 세미나가 오히려 자원 낭비와 환경 오염을 가속하는 셈이다.

환경 오염을 줄여 지구의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리려고 애쓰는 요즘이다. 국회는 주요 국가 기관으로서 국민을 위해 양질의 생활 환경을 조성할 의무가 있다. 환경 보전에도 앞장서야 한다. 내겐 너무나도 감사한 자료집이지만 굳이 '멋진 책자'로 배포될 필요는 없다. 세미나에 노트북과 휴대전화를 지참하는 이들에겐 워드 형태로, 그 외 참석자들에겐 간소화된 종이 간행물을 제공하는 건 어떨까. 자료집을 반드시 내야 한다면 세미나 개최 전 수요를 조사해 필요한 만큼만 만드는 방법도 있다. 한 번쯤은 숙고가 필요한 사안이다.

 

[김세은 수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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