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준의 지피지기] 시진핑 1인 체제 촉발한 미국의 中 악마화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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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준 논설고문
입력 2021-12-22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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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11월 29일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아프리카 협력포럼(FOCAC) 장관급 회담 개회식에서 영상 연설을 하고 있다.  (베이징 신화=연합뉴스) 


 
‘중국 정치 다시 보기(Rethinking Chinese Politics)’. 미국 스탠퍼드대학 후버연구소(Hoover Institute)가 운영하는 온라인 계간 ‘차이나 리더십 모니터(China Leadership Monitor)’ 올겨울 호는 12월 1일 이런 제목으로 된 책을 한 권 소개했다. 필자는 보스턴대 소속의 국제정치학자 조지프 퓨스미스(Joseph Fewsmith). 미국의 대표적인 중국 전문 학자 중 한 사람으로, 1980년 시카고대학에서 비교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정기적으로 중국 여행을 하며 중국의 엘리트 정치에 관한 수많은 책과 논문을 썼다. 1949년생으로 올해 72세인 그의 40여 년에 걸친 중국 연구 일생은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 시대와 일치했다. 그가 이제서야 ‘중국 정치 다시 보기’란 책을 저술하고 차이나 리더십 모니터와 인터뷰를 했다.
-시진핑(習近平)의 신속한 권력 강화는 많은 차이나 워처들을 놀라게 했다. 그들은 왜 놀랐는가.
“시진핑의 신속한 권력 강화는 중국 공산당의 정통성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시진핑이 총서기에 선출되기 직전에 발생한 다음 총서기 후보였던 보시라이(薄熙來) 충칭(重慶) 당서기 실각 사건, 전 소련 공화국과 중동, 아시아에서 발생한 여러 민족들의 체제 전복 ‘컬러 혁명’ 등 중국 공산당이 소련 공산당의 뒤를 따라 역사의 잿더미에 추가되지 않을까 하던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시진핑은 부패 제거 캠페인을 통해 반대자들의 목소리를 침묵시킨 후 권력의 중앙 집중화를 이룩했다.”
-시진핑의 야심 찬 작업들은 공산당에 의한 독재를 제도화한 레닌(Lenin)주의를 되살려낸 결과를 가져왔다. 다시 말해 시진핑이 달성한 것은 대체로 형식주의(pro forma)를 강화한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시진핑은 중국 공산당의 부패와 파벌주의를 무너뜨리고 당을 지배하는 규율을 바꾸어 놓았다. 그는 중국 공산당이 보다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그는 자신의 파벌을 조직함으로써 파벌주의를 무너뜨리려 했다는 점이었다. 시진핑의 측근들은 대부분 기회를 잡을 수 있었고, 시진핑 자신이 추진하는 변화를 제도화할 수 없었다면 그의 측근들은 위기를 맞았을 것이었다.”
-시진핑이 권력을 신속하게 강화할 수 있었던 또 다른 배경이 있다면.
“시진핑이 권력을 신속하게 강화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중국을 악마화하려던 작업이 있었다. 또 다른 아이러니다. 미국의 내셔널리즘이 중국의 내셔널리즘을 보다 자연스럽게 만들어주었다. 레닌주의 정당을 되살려내겠다는 시진핑의 노력을 미국이 중국과 경제적으로 분리하겠다는 ‘디커플링(Decoupling)’ 전략이 도와준 셈이다.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겠다는 미국의 움직임이 중국을 ‘자립갱생’의 길로 달려가게 한 측면이 있다.”
퓨스미스가 쓴 ‘중국 정치 다시 보기’란 책의 제5장 ‘시진핑의 권력 강화(Centralization of Power)' 앞머리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중국사람들은 ‘덩샤오핑은 마오쩌둥(毛澤東)보다 힘세지 않고, 장쩌민(江澤民)은 덩샤오핑보다 세지 않으며, 후진타오(胡錦濤)는 장쩌민보다 세지 않다’는 말을 즐겨 했다. 개혁·개방 40년 동안 중국 공산당의 권력이 내리막길을 걸어왔다는 뜻이다(권력자의 시대별 순서가 마오쩌둥,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의 순서였으므로 후임자의 권력이 전임자보다 약해져 왔다는 뜻).”
시진핑은 2012년 11월 8일부터 15일까지 베이징에서 개최된 제18차 전국대표대회(당 대회)에서 당 총서기로 선출됐다. 이보다 1년 전인 2011년 11월 15일 충칭의 한 호텔에서 충칭시 당서기 보시라이의 부인이 내연남인 영국인 사업가를 독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직후 충칭시 공안국장이 쓰촨(四川)성 성도 청두(成都)에 있는 미국 영사관으로 가서 망명을 요청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다음 당 총서기 후보로 지목되던 보시라이는 실각했다. 2012년 3월 18일에는 당 중앙서기처 서기였던 링지화(令計畫)의 아들이 베이징 시내에서 몰던 페라리가 충돌해서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같은 해 9월 1일 링지화는 중앙서기처 서기에서 통일전선부장이라는 비교적 한직으로 이동했다. 바로 그날 국가부주석이던 시진핑이 공석에서 사라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시진핑은 당시 베이징을 방문 중이던 힐러리 클린턴과 만나 회담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회담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후 시진핑은 9월 15일까지 공석에 나타나지 않았고, ‘암살당했다’느니 ‘수영하다가 등을 다쳤다’느니 하는 추측만 난무했다.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 총서기로 선출된 시진핑은 선출된 지 보름 만인 11월 29일 베이징의 국가박물관을 참관하면서 ‘중국의 꿈(中國夢)’이란 개념을 제시했다.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이 되는 2021년에는 소강(小康) 사회를 이루고,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100주년이 되는 2049년에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이루는 꿈을 실현할 것”이라는 연설을 했다. 당 총서기 취임 후에는 보시라이 사건의 배후로 저우융캉(周永康) 전 정치국 상무위원을 지목해서 재판에 회부해 무기징역을 받게 했다. 보시라이는 무기징역에 종신 정치권리 박탈 선고를 받게 했고, 링지화는 뇌물수수와 직권남용으로 무기징역에 처하게 했다.
시진핑이 그렇게 중국 공산당의 권력을 장악한 이후 2013년 10월 관영 중앙TV는 ‘소련 망당망국(亡黨亡國) 2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를 방영한다. 이 다큐멘터리의 방영은 시진핑이 소련 공산당의 해체를 보고 중국 공산당의 해체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겠다는 불안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 것이라고 퓨스미스는 진단했다. 시진핑의 측근 리잔수(栗戰書) 정치국원 겸 서기처 서기는 11월 26일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에 ”사회주의와 개혁·개방, 경제 발전, 인민생활 개선의 네 가지를 견지하지 않으면 중국 공산당은 죽음의 길로 갈 것”이라는 글을 기고한 점도 시진핑의 불안을 잘 대변했다.
그런 시진핑의 불안은 2013년 12월 26일 마오쩌둥 탄생 120주년 기념일에 마오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획기적인 연설을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이전에 마오쩌둥의 사회주의 실천 탐색기가 없었다면 개혁·개방도 순조롭게 진전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시진핑은 강조했다.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마오쩌둥 동지가) 제공한 정반(正反) 양면의 역사 경험 없이는 형성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표현도 있었다. 중국 공산당이 1981년에 채택한 제2차 역사결의에서 마오쩌둥의 공과 과를 7대 3이라고 한 덩샤오핑의 평가를 넘어서 마오를 더 적극적으로 긍정평가하는 새로운 해석을 내린 것이다.
마오쩌둥에 대한 시진핑의 긍정평가는 2017년 10월 18일 중국 공산당 제19차 당 대회 보고를 통해 '불망초심(不忘初心·초심, 즉 마오쩌둥이 건설한 중국 공산당의 기본 사명을 잊지 말자는 뜻)'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진핑의 이 연설을 통해 “사실상 덩샤오핑의 시대는 종결됐으며, 마오쩌둥을 긍정평가하고 시진핑을 핵심으로 하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다”는 것이 퓨스미스의 분석이었다. 시진핑은 이 당 대회에서 전임자 후진타오 총서기가 후임자로 지목해준 후춘화(胡春華)를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지명하지 않음으로써 덩샤오핑이 만들어 놓은 집단지도체제의 종결도 선언했다.
지난 11월 8일부터 11일까지 개최된 중국 공산당 제19기 중앙위원회 6차 전체회의에서는 ‘중국 공산당이 100년간 분투한 결과 얻어진 중대한 성과와 역사경험에 대한 결의’라는 결의문이 채택됐다. 이 결의문에는 “1935년 당 중앙정치국은 마오쩌둥 동지를 주요한 대표로 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정확한 노선을 당 중앙의 영도적 지위로 확립하고 마오쩌둥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의 제1세대 지도체체를 확립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그리고 결의문의 매듭은 이렇게 지어졌다. “당 중앙은 당·정·군과 각 민족 인민들이 더욱 긴밀히 시진핑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 중앙 주위로 단결하자고 호소한다.” 56년 전 중국 공산당이 마오쩌둥을 핵심으로 하는 마르크스주의 정당이라고 선언할 당시와 똑같은 표현을 시진핑에게 구사함으로써 시진핑에게 마오쩌둥과 같은 위상을 부여한 것이다. 퓨스미스는 중국 공산당이 제3의 역사결의를 채택한 열흘 뒤인 지난 11월 19일 싱가포르 동아시아연구원(EAI)이 개최한 줌(Zoom) 웨비나에 나와 “이 결의를 통해 권력의 개인화(Personalization of Power)가 이뤄졌다”고 평가했다.

<논설고문>





시진핑의 집권은 언제까지 가능할까
 
2012년 11월 중국 공산당 총서기로 선출된 시진핑은 내년 가을로 예정된 제20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 대회)에서 3연임에 성공할 경우 2027년 21차 당대회 때까지 당 총서기로 집권할 수 있게 된다. 1953년생인 시진핑은 74세가 되고, 2027년 제21차 당 대회에서 4연임에 성공할 경우 2032년 79세가 된다. 건강이 허락해서 2032년 제22차 당 대회에서 5연임에 성공한다면 84세까지 집권이 가능할 전망이다. 시진핑이 더 이상 당 총서기로 선출되지 못하게 될 법적 장치였던 국가주석의 3연임 금지 규정은 2018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 당시 개헌으로 삭제됐다. 국가주석에는 총서기로 선출된 다음해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선임된다. ‘칠상팔하(七上八下)’로 알려졌던, 68세 이상 새로운 당 총서기 취임 금지에 관한 당내 합의는 지난 11월 11일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채택된 제3차 역사결의로 무력화됐다. 당 총서기는 7~9인으로 이루어진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1인으로 회의를 주재할 뿐 결정은 집단적으로 내린다는 관행도 이번 역사결의로 사실상 무력화됐다. 제3차 역사결의는 당의 분투 목표를 “2035년까지는 사회주의 현대화를 실현하고, 2050년까지는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을 실현한다”고 제시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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