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느려서 행복하다…삼지내 돌담과 고택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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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1-11-15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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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에서 차로 20~30분 거리에 있는 담양은 호남고속도로와 광주~대구, 고창~담양 고속도로가 지나가면서 사통팔달의 고장이 되었지만 아직 옛 모습을 고즈넉이 보존하고 있다. 1970년대부터 그린벨트로 묶여 개발이 제한돼 자연과 전통문화 훼손이 다른 지역보다 덜했다. 그 덕에 담양은 ‘느림보 달팽이’의 생태도시로 자리를 잡으며 바쁜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휴식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노령산맥의 봉우리들로 전라북도와 경계를 이루는 담양군은 추월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이 내를 이루어 들을 적시며 영산강 상류로 흘러 들어간다. 이 물줄기를 젖줄로 담양군의 남쪽에는 기름진 논들이 너르게 펼쳐진다. 봉산들, 수북들, 고서들, 대전들 같은 들녘을 배경으로 대지주들이 많이 나왔다. 《뿌리 깊은 나무》가 펴낸 《한국의 발견》 전라남도 편에는 담양군에 만석꾼 우송(又松) 국채웅(鞠採雄·1871~1949)을 비롯해 오천석꾼이 200명이 넘었다고 적고 있다.
 
만석꾼의 판소리 후원

담양 국씨는 단본(單本)으로 담양읍 학동리에 국씨 시조부터 9대의 비석을 모신 시조단이 있다. 담양에서 ‘국 참봉’으로 불렸던 우송은 담양 읍내에 대궐 같은 집에 살았다. 본채는 오래전에 화재로 불타고 사랑채마저 허물어질 위기에 처하자 담양군이 2004년 죽녹원으로 이전 복원해 우송당(又松堂)이라는 당호를 붙여 소리전수관으로 쓰고 있다.
국씨는 선대로부터 소규모 토지를 물려받았지만 전국을 무대로 한 상업 활동으로 당대에 거부를 이루었다. 1931년 국씨의 회갑 때는 7일 동안 잔치를 벌였다. 서울에서 명월관 요리사 60명이 내려와 음식을 장만할 정도였다. 우송은 판소리를 사랑해 서편제의 명창 박동실(朴東實·1897~1968)이 그의 사랑채에서 제자들을 길러내도록 후원했다. 박 명창은 해방공간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가 6·25 전쟁 중에 월북해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
 

1920년대 지은 만석꾼 국채웅의 사랑채가 무너질 위기에서 2004년 죽녹원으로 옮겨 복원됐다. 건물 가운데에 있는 실내 무대에서 박동실 명창이 서편제를 공연했다. [사진 제공=담양군]


그러나 담양에 오천석꾼이 200명이 넘었다는 《한국의 발견》 통계는 다소 부풀려진 것 같다. 1930년대 총독부 자료를 보면 조선인으로 천석꾼이 757명, 만석꾼이 43명. 담양에만 오천석꾼이 200명 있었다는 이야기는 분명히 과장됐지만 담양의 재력을 배경으로 근대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과 의병 활동이 이루어지고 판소리나 서화, 음식 같은 문화가 발달할 수가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담양군 창평면은 본래 창평군이었으나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창평군의 일부 면은 광주나 곡성으로 떼어주고 12개 면을 담양군에 흡수해 오늘의 창평면을 만들었다. 일제가 창평면을 조각내 담양군에 흡수한 것은 임진왜란과 조선 말기에 창평에서 의병 활동이 기승을 부린 데 대한 보복이었다는 해설이 민간에서는 지배적이다. 담양군에 편입된 지 10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까지도 창평면은 담양읍과는 다른 특색을 지니고 있다.
창평면 삼지내 마을은 등 뒤에 높은 산을 두고 남쪽으로는 넓은 들을 바라다보는 북고남저(北高南低)의 고장이다. 삼지내〔三支川〕라는 마을 이름은 개울 세 개가 마을을 지난 데서 붙여졌다. 돌담길을 따라 실개울이 흐르고 뿌리를 물에 담근 야생화 구절초가 담벼락에 기대어 흔들거린다.

냇가의 자갈과 논흙으로 쌓아올린 삼지내의 돌담길. [사진=황호택]

 

돌담길 옆으로는 맑은 실개울이 흐르고 구절초가 피어 있다. 다. [사진=황호택]


마을의 돌담은 총연장 3.6km. 맨 아래에는 큰 돌로 중심을 잡아 물에 파이거나 씻겨 내려가지 않게 기반을 다지고, 올라갈수록 점차 작은 돌을 써 맨 위에 기왓장을 올렸다. 돌담에 쌓은 돌은 인근의 산이나 개울에서 가져온 잡석들이지만 삼지내 담벼락에서 만나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표현한다.
돌과 돌 사이를 메운 것은 시멘트가 아니라 논흙이다. 보통 흙은 비바람에 잘 씻겨 내려가고 강한 햇볕에 마르면 바스러진다. 그러나 오랫동안 논에서 물에 담금질된 흙은 찰흙 성분이 많아 접착제 기능을 한다. 초가지붕이 매년 이엉을 갈아주어야 하듯이 논흙 돌담길도 오랜 세월 비바람을 맞으면 보수해야 한다.
한국의 농촌 풍경은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을 겪으며 마을 안길이 넓어지고 초가지붕이 슬레이트로 바뀌었지만 삼지내는 기와집이 많아 옛날의 모습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새마을 운동은 돌담길 옆으로 흐르던 실개울을 메워버렸다. 삼지내 마을이 슬로시티(slowcity)로 지정되면서 담양군이 제일 먼저 착수한 공사가 주민 의견을 들어 물길을 복원한 것이다. 물은 대덕면 운암저수지에서 끌어왔다. 마을 안길을 덮었던 시멘트를 걷어내고 흙길로 복원했다. 이 길을 걷다 보면 신발을 벗어 던지고 맨발로 다니다가 돌담 아래 도랑물에 발을 담그고 싶어진다. 물기 젖은 발에 구절초의 향기가 배리라.

한옥으로 지은 창평 면사무소는 창평현청이라는 편액을 달고 있다. [사진=황호택]


2014년에 준공된 창평면사무소는 호남에서 유일하게 한옥으로 지은 면사무소다. 그런데 건물 어디에서도 면사무소라는 관청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이 멋진 한옥은 ‘昌平縣廳’(창평현청)이라는 편액을 달고 있다. 행정구역상 담양군에 속해 있지만 창평이 한 세기 전까지 별도의 군현이었음을 알려주는 자존심의 표현이다.
창평현청 앞에는 수령이 380년가량인 느티나무 두 그루와 선정비(善政碑) 3개가 서 있다. 1793년에 읍치(邑治·현청 소재지)를 고서면 고읍리에서 이곳으로 옮기면서 선정비 3개만 챙겨왔다. 글자 그대로 선정비만 거두어 오고 ‘악정비’는 버려두고 온 걸까. 조선 말기에 전국 곳곳에서 민란이 속출한 것을 보면 가렴주구한 수령들이 세운 비석도 많았다.
흥선대원군이 개혁을 추진함과 동시에 외세에 대응하기 위해 국방력 강화를 목적으로 1872년(고종 9) 3월부터 6월까지 전국 군현의 지도를 제작해 올리게 했는데 모두 459장의 분량이었다. 이때 제작한 창평현 지도에는 느티나무 여덟그루가 그려져 있다. 선정비 옆의 두 그루와 창평 시장 쪽으로 난 도로에도 수령 200년이 넘는 느티나무 여섯 그루가 스산한 세월을 견디고 지금도 서 있다.

창평현청 앞에 서 있는 전라도 관찰사 이서구의 선정비.[사진 황호택]

창평현청 앞의 이서구 관찰사 영세불망비
이서구(李書九·1754∼1825) 전라도 순찰사(巡察使·관찰사)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는 좌우에 거느린 두 현령의 선정비보다 키가 크다. 비석 뒤의 글은 마모돼 보이지 않고 바로 옆 안내판 간단한 내용이 적혀 있다. ‘1791~1795 재임, 1793년 창평현청 이전, 비 건립 1824년’ 이서구는 그 좋다는 전라도 관찰사를 40대에 처음 했고 60대에 한 차례 더했다. 전주에 있는 관찰사의 선정비가 창평현청 앞에 서게 된 데도 사연이 있겠지만 기록이나 설화로 남아 있는 것은 없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목민심서에는 평양감사를 하던 이서구의 치적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다. ‘평양에 큰 불이 나서 공사(公私)의 집들이 거의 다 타버렸다. 이서구 감사의 조치와 계획이 방도가 있고 집을 짓는 데 법도가 있어서 관청 건물 수십 구(區)와 민가 만여 호가 일시에 새롭게 되고 백성들도 망하여 흩어지는 자가 없었으므로, 지금까지도 그의 은혜를 사모하고 있다.’
호남지방에는 이서구에 관한 각종 설화와 미담이 전해지고 있다. 관찰사가 근무하던 감영은 전주에 있었다. 이서구가 전라 감사로 부임해 와서 보니 아전들이 노름에 빠져 있었다. 관찰사가 역졸(役卒)들의 평복으로 위장을 하고 노름판에 끼어 돈을 전부 땄다. 돈을 잃은 아전들이 이서구의 돈을 빼앗으려고 덤벼들었다. 이에 이서구가 “전라 감사 이서구 장땡이다!”라고 소리치니 노름판에 있던 아전 하나가 새로 부임한 전라 감사를 알아보았다. 이서구가 노름판에서 딴 돈을 전부 돌려주면서 ‘노름은 패가망신이니 노름을 끊으라’며 아전들을 훈계했다는 설화다.《디지털진안문화대전》
덕흥대원군의 후손인 이서구는 실학자인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에게 학문과 문장을 배우고 실학파들과 어울렸다. 평양감사 형조판서까지 한 것을 보면 역량도 출중했고 조정의 연줄도 튼튼했던 것 같다.

반가(班家)의 삶이 잘 구획된 한옥들

삼지내 마을에서 들어가 볼만한 한옥을 몇 집 고르라면 고재환 가옥(지방민속문화재 제37호), 고정주 고택(지방 민속문화재 제42호), 고재선 가옥(지방민속문화재 제5호) 등이 있다.
고재선 가옥의 안채는 따뜻하고 일조량이 많은 남부지방에 전형적인 일자형(一字形)이다. 오른쪽 뒤뜰로 돌아들면 삼지내의 물을 끌어온 태당(笞塘)이라는 연못이 있었다. 연못 가운데 섬에는 오죽(烏竹)이 자라고 있었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는 야트막한 내담을 두고 중문으로 통했다. 중문의 걸쇠는 안채 쪽에 만들어 놓아 남자들의 출입은 규방의 허가를 받아야 가능했다. 광채는 일자형 5칸으로 북쪽 1칸은 마루를 깔았고 나머지는 흙바닥이다.
고재환 가옥은 5칸의 곳간채 중 왼쪽 끝 칸을 대문으로 만들었다. 고재선과 고재환은 사촌간이다. 동쪽으로 난 대문을 들어서면 벽돌로 시선 차단용 담장을 쌓아 대문에서 안채가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넓은 안마당을 두고 사방을 안채 사랑채 삼칸채 문간채(곳간)가 에워싼 ‘ㅁ’자 형식이다. 안채는 낮은 기단 위에 넓은 토방과 사다리꼴 초석을 둔 다음 네모기둥을 세웠다. 방의 창살은 2 분합의 겹문이고 대청은 4분합을 들어열개문으로 했다. 안방과 대청도 들어열개문으로 해 대청주변의 방을 안팎으로 확장 가능한 공간으로 만들었다. 삼칸채는 정문에서 바라다 보이고 별채의 성격을 띠어 잔치나 특별한 행사 때 손님 접대하는 곳으로 쓰였다.
1925년에 건립된 고재환 가옥은 남부지방의 전형적인 대농 집으로 양반가옥이 갖추어야 할 다양한 채의 조합을 이루었다. 뼈대가 굵고 짜임이 건실해 전통 목조건축을 이해하는 데 가치 있는 자료다.

고정주 고택 앞에는 슬로시티의 상징물 달팽이가 대나무로 조립돼 있다. [사진=황호택]


춘강(春崗) 고정주(高鼎柱·1863∼1933) 고택은 ‘ㄷ’ 자형 건물. 안채는 정면 7칸, 측면 3칸, 팔작지붕에 3칸 솟을대문이다. 춘강이 호남 지역 근대교육의 효시인 영학숙과 창흥의숙을 세워 국가의 동량(棟梁)이 된 인재들을 배출했다는 점에서 근대사적 의미가 있다. 고정주 가옥 옆 공원에는 슬로시티의 상징물인 달팽이가 대나무로 조립돼 있다.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심강(心崗) 고재욱(高在旭·1903~1976) 가옥은 춘강이 손자인 고재욱이 1929년 첫아들을 얻자 증손자를 본 것을 기념해 지어준 집이다. 고정주의 고택과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인접해 있다. 한양대 국제문화대학 문화인류학과 석좌교수 베르너 사세가 세를 들어 거주한 인연이 있다. 사세는 한옥이야말로 자연의 소재로 지은 천연주택이라고 찬양하는 말을 했다. 심강 고재욱 고택에서는 한여름 밤의 음악회가 매주 토요일 열리기도 했다.
삼지내 마을에서 문화재 가치가 있는 집들의 대문에는 아쉽게도 어른 주먹만 한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 열쇠의 주인은 대개 광주나 서울에 산다. 담이 허물어진 곳도 있고 지붕에서 잡초가 자라기도 한다.
한 후손은 필자와 전화통화에서 “과거에 개방을 했으나 관광객들이 훼손을 하고 도둑들이 물건을 훔쳐가는 일도 생겼다”고 말했다. 담양군에서는 노인일자리 사업으로 잡초 제거도 하고 관광객도 안내할 수 있는데 후손들이 문을 닫아걸어 안타깝다고 했다.

1920년대 지은 고광신 가옥은 민박집 '한옥에서' 안에 있다. [사진=황호택]


필자는 문화체육관광부가 90년 이상 된 한옥 숙박시설에 주는 ‘명품고택’ 인증을 받은 ‘한옥에서’라는 민박 집에서 3박을 했다. 고택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인 재봉(霽峰) 고경명(高敬命·1533~1592) 장군의 필적인 世篤忠貞(세독충정) 편액이 걸려 있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감에서 나라에 충성하고 항상 올바른 마음을 굳게 지녀야 한다는 뜻이다. 세독충정 원본은 고경명 장군의 사당인 포충사에 보존돼 있다.
주인 김영봉 씨는 한옥에 반해 2001년경 삼지내에서 1920년대 지은 고광신 씨의 고택을 사들여 한옥민박업을 시작했다. 계속 뜰안채 별채 사랑채를 지어 객실을 늘렸다. 평일인데도 빈방이 거의 없었다. 20년 전만해도 고택 한 채가 풀밭으로 둘러싸여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김 씨의 노력으로 문간채까지 6채가 들어섰다. 가장 정성을 들인 건물은 한옥 카페 ‘좋은날’. 마당에는 금목서를 비롯해 소나무 녹차나무 감나무 등으로 정원을 가꾸어 놓았다.
돌담길 끝에는 ‘슬로시티약초밥상’이라는 한약방 같은 식당이 있다. 이 식당의 주인은 ‘최금옥 약초밥상’이라는 유튜브를 운영한다. 약초밥상에서는 싹을 틔운 발아현미밥에 각종 나물을 넣은 비빔밥을 제공한다. 반찬 수가 36가지나 된다. 민들레, 돼지감자, 삼채와 함께 느릅나무 가죽나무 생강나무 잎도 이 식당에서는 반찬이 된다. 다래고추장도 있다. 이른바 패스트푸드의 반대인 슬로푸드다. 1999년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그레베 인 키안티’ 주민들이 세계적인 패스트푸드 브랜드인 맥도널드가 들어오는 것을 막는 데 성공하고 나서 삶의 방식을 느리게 바꾸는 슬로시티 운동을 시작했다.

삼지내에서 슬로푸드 식당을 경영하는 최금옥씨.[사진=황호택 ]


최금옥씨(65)는 젊어서부터 통풍을 앓았고 백일해 천식 같은 아토피를 달고 살았다고 한다. 그녀는 천연식품을 먹으며 아토피를 극복했다. 지금은 전통식품과 약초밥상에 관한 강의를 하러 다닌다.

느린 마을의 슬로 푸드

이 식당의 화장실 표시는 ‘해우소’. 승려가 된 아들의 사진 두 장이 벽에 걸려 있다. 아들만 둘을 두었는데 큰아들이 출가를 했다. 엄마를 닮은 큰아들은 연예인이 되고 싶어 했는데 어머니가 떠밀어 승려로 만들었다. 양산 통도사에서 머리를 깎았다. 최 씨는 아들 이야기를 할 때 “그 양반이…”라는 식으로 높임말을 썼다. 법명은 세진. 승려가 되려는 사람이 적어 고민하는 조계종이 비구인 세진 스님과 비구니인 우담 스님을 ‘행복출가’의 홍보 모델로 내세웠다. 둘째아들은 슬로시티 삼지내에서 천연염색 옷과 도자기를 만들어 판매한다.
2007년 12월 1일 삼지내 마을은 아시아 최초로 슬로시티로 지정됐다. 담양군은 봉산면 방축마을, 가사문학면 생오지 마을, 금성면 가라실 마을도 슬로시티로 확장하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우리는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흥미를 갖는 도시, 훌륭한 공공장소와 극장 카페 여관 사적 그리고 풍광이 훼손되지 않는 도시, 전통장인의 기술이 살아 있고 현지의 제철 농산물을 활용할 수 있는 도시, 건강한 음식, 건강한 생활, 즐거운 삶이 공동체의 중심이 되는 도시를 추구한다’(창평현청에 걸려 있는 ‘슬로시티 선언’) 
 <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겸직교수>
후원=담양군(군수 최형식)·뉴파워프라즈마(회장 최대규)

참고문헌
1.남시욱 《고재욱 평전》 동아일보사, 2021
2.한창기 발행·편집인 《한국의 발견/한반도와 한국 사람, 전라남도》 뿌리깊은 나무, 1986
3.《디지털진안문화대전》 진안군
4.《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서구)》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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