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칼럼] 정쟁에 휘말린 부끄러운 대법원장

임병식 객원논설위원· 서울시립대학 초빙교수입력 : 2021-02-08 08:08

[임병식 위원]


전주 덕진공원에는 ‘법조삼성’ 동상이 있다. 우리나라 사법 기틀을 다진 세 분을 기렸다. 사법부 독립과 위상을 확립한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 대쪽 검사로 불리며 검찰 위상을 높인 ‘화강 최대교’, 죄수들에 대한 헌신적 사랑을 펼쳐 법복 입은 성직자로 불린 ‘사도 법관 김홍섭’. 김대중 정부 시절, 1999년 11월 세웠다. 세 분 모두 전북 출신이다. 법조인들이라면 이들이 걸어온 행적에서 존경과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요즘처럼 법조계가 어지러울 때가 있을까 싶다. 추미애와 윤석열 갈등 와중에서 사법부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극단적 불신은 화환 정치에서 엿보인다. 지지자들은 대검찰청과 법무부 청사 앞으로 화환을 실어 날랐다. 자신들 입맛대로 적은 글로 지지층을 자극했다. 대검찰청에서 시작된 화환이 급기야 대법원 마당에까지 등장했다. 김명수 대법원장 사퇴를 촉구하는 근조화환이다. “입만 열면 거짓말, 오죽하면 녹음”이라는 문구가 눈길을 붙잡는다.

김 대법원장을 조롱하는 글귀다. 어쩌다 사법부 최고 기관인 대법원까지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됐는지 안타깝다. 대법원장 사퇴 논란은 탄핵으로 확산되고 있다. 사태를 촉발한 당사자는 대법원장 자신이다. 그는 임성근 부장판사 사직서를 반려하면서 탄핵을 이유로 댔고, 이를 부인했다가 하루 만에 거짓으로 드러났다. 이 때문에 거짓말 논란에 휩싸였다. 녹취록에 의하면 김 대법원장은 여당이 주도하는 탄핵을 의식해 사직서를 수리하지 않았다.

즉각 사법연수원 17기 판사 140여명은 “김명수 대법원장 탄핵이 선행돼야 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대법원장이 정치권 눈치를 보는 데 급급해 법관이 부당한 정치적 탄핵 소용돌이에 휘말리도록 내팽개쳤다. 심지어 대화 내용을 부인하는 거짓말까지 했다”며 강하게 성토했다. 법정은 위증죄를 엄하게 다룬다. 그런데 사법부 수장인 대법원장이 국민을 상대로 거짓말했으니 할 말이 없게 됐다.

김 대법원장은 “9개월 전 일이라 기억이 정확하지 않았다”고 말해 또 다른 논란을 촉발했다. 거짓이 거짓을 부르는 형국이다. 일부에서는 녹취를 문제 삼고 있다. 상대 허락을 구하지 않은 녹취는 불법이자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렇다하더라도 거짓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녹취는 불법이지만 거짓말은 거짓말대로 남는다. 성명서는 “이런 행동은 법원의 권위를 실추시켰고, 법관으로 하여금 치욕과 자괴감을 느끼게 했다”고 비판했다.

2019년 1월,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법원장이 구속됐다. 그로부터 2년 만에 대법원은 다시 기로에 섰다. 김 대법원장은 어쩌면 현 정부 인사들의 거짓말 릴레이 바통을 이어받은 것일지 모른다. 법원은 최근 조국, 정경심, 최강욱의 거짓을 심판했고, 유시민은 거짓말을 사과했다. 또 더불어민주당 남인순 의원은 박원순 시장 피소 사실 유출과 관련 거짓 해명 논란에 휩싸였다. 연이어 위장된 위선이 드러난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난 4년 동안 이들이 내뱉은 거짓말을 뒤치다꺼리하느라 혼란을 겪었다.

서로 지지하는 진영에 서서 증오와 갈등을 키워왔다. 여기에 대법원장까지 합류한 셈이다. 사법부가 권력에 굴종할 때 인권은 설 자리가 없다. 인혁당 재판부가 권력에 굴복해 무고한 시민 8명을 형장으로 보낸 게 1975년이다. 그 뒤로 47년이 흘렀다. 이승만 독재정권,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을 지나 민주정부가 들어선 지 오래다. 그런데 아직도 권력으로부터 독립을 스스로 유예한 채 머뭇거린다고 생각하면 씁쓸하다.

2015년 한국은 OECD 회원 국가 중 사법부 신뢰도에서 꼴찌 언저리를 맴돌았다. 지난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김명수 대법원장 거짓말은 사법부 신뢰도 하락을 가속화시킬 게 분명하다. ‘법조삼성’은 험난한 시절에도 법관과 검사로서 양심을 지켰고 당당했다. 권력을 살피기보다 국민을 섬겼다. 재판 결과에 불만을 표시하는 이승만 대통령을 향해 김병로 대법원장은 “이의 있으면 항소하라”며 맞받아쳤다.

결기 있는 판사, 대쪽 같은 검사, 약자를 보듬는 법관을 기대하는 게 욕심일까. 권력과 진영논리에 편승해 오락가락하는 법관과 검사들로 인해 사법부가 어지럽다. ‘정치 판사·정치 검사’는 부끄러운 이름이다. 국회까지 접수한 법조 권력은 힘이 세다. 법조인 출신들은 국회를 과잉 대표하고 있다. 여기에 로펌, 전관예우까지 법조 카르텔이 한국사회를 장악하고 있다. 우리사회가 정신적으로 지체된 다른 이유다.

전북 순창에는 김병로 대법관 호를 딴 ‘대법원 가인연수원’이 있다. 이곳에서 초임 판사들은 법관으로서 소양 교육을 받는다. 김병로는 “법관이 국민으로부터 의심을 받게 된다면 최대 명예손상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논란에 휩싸인 김명수 대법관은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마키아벨리는 “정치는 도덕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했다. 정치를 폄하하는 이 말이 법관들에게도 해당된다면 수치다. 돌아오는 설에는 법조삼성과 가인 연수원을 찾아봐야겠다.
임병식 객원논설위원· 서울시립대학 초빙교수  montl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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