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백의 新아방강역고-20] 18세기에도 만주는 우리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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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
입력 2021-01-1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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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 국가 공인지도 '동국대지도'

  •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지도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

  • 일제가 대동여지도를 띄운 까닭은···

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

조선시대 국가 공인지도(영조 1750년)<동국대지도>(보물1538호)

조선-청과 서북 국경경계지도(영조 1757년)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보물 1537호)

둘 다 만주를 우리 땅으로 명시한 지도다. 


8세기 대표적 지리학자 정상기(鄭尙驥, 1678~1752년)가 1750년대에 제작한 『동국대지도(東國大地圖)』는 만주와 조선을 아우르는 영토를 조선전도로 표기하고 있다.

『동국대지도』는 영조(英祖, 재위기간 1724∼1776년) 이후 역대 조선 왕실에 의해 공인된 조선후기 대표 지도다. 영조는 70년 평생 이런 지도를 본 일이 없다고 감탄을 하며 『동국대지도』를 홍문관(弘文館)에 보내 모사하도록 지시했다.

홍양한이 말하기를,
"정항령의 집에 동국대지도(東國大地圖)가 있는데, 신이 빌려다 본즉 산천과 도로가 섬세하게 다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또 백리척(百里尺)으로 재어 보니 틀림없이 착착 맞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승지에게 명해 가져오게 하여 손수 펴 보고 칭찬하기를,
"내 70의 나이에 백리척은 처음 보았다."
하고, 홍문관에 1본(本)을 모사(摸寫)해 들이라고 명하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영조실록」 90권, 1757년 8월 6일(을축)).


동국대지도는 만주와 한반도의 남북 4000리 전국의 산맥과 수계가 자세히 표현돼 있다. 330여 개에 달하는 군·현 위치를 자세히 기록하고, 각 지역의 읍성·병영·수영·진·역 등 각종 행정, 군사 정보를 수록했다.

북에서 아래로 헤이룽장성의 소흥안령(小興安嶺)산맥, 광재령(廣才嶺)산맥, 랴오닝성의 한도대맥 천산(千山)산맥, 지린성의 노령(老嶺)산맥과 장백(長白)산맥, 한반도의 마천령산맥 묘향산맥 태백산맥 마식령산맥·소백산맥·노령산맥 등 만주와 한반도 12대 산맥을 정확히 표기해놓았다.

1755~1757년, 채색 필사본, 세로 272.7×가로 147.5㎝, 보물 제1538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동국대지도 오른쪽 상단부분 (만주와 연해주)이 훼손돼 있다.  [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지도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

동국대지도와 같은 시기 홍문관에서 간행한 <해동지도(海東地圖)>(1)*의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西北彼我兩界萬里一覽之圖)>에도 만주 일대를 아우르는 소한이 아니라 대한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 1750년대 추정 조선왕실 국가편찬 『해동지도』
(도폭) 191.0 cm × 160.0 cm 굵은 홍선: 국경선, 가는 홍선: 도로, 청색선: 수계, [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이 지도 북쪽으로 흑룡강(黑龍江)이 분계강을 이루고, 동쪽은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지방과 사할린섬 사이에 있는 타타르 해협의 묘해도(杳海島, 블라디보스토크 앞바다 루스키섬 )·칠여은도(七汝隱島, 나홋카시 자토 포기노섬)·해도국(海島國, 사할린), 서쪽은 만리장성 동쪽 끝의 관문인 산해관(山海關)으로 서북지방과 만주전역, 연해주가 포함된 광대한 조선과 청나라 경계에 접한 만리나 되는 국경선이 굵은 홍색선으로 이 명확히 표시돼 있다.

굵은 홍색선 국경선에는 붉은 원점 세개가 있는데, 각각 동쪽으로부터 영고탑(寧古塔:헤이룽장성 닝안), 북부의 고려 윤관이 쌓은 9성의 선춘령비(헤이룽장성 광차이링廣才嶺), 압록강 이북 서쪽 봉천대(랴오닝성 선양)이다.

또한 두만강과 분계강을 따로 그려, 백두산 정계비에서 언급한 토문강(土門江)을 조선과 청나라 분계강으로 명시하고 있다.

지도 중앙부에는 백두산과 천지가 웅장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그로부터 농담이 강한 청록색의 산줄기가 사방으로 뻗어 남쪽으로는 백두대간을 이루고 북쪽으로는 만주와 연해주 전 지역으로 산줄기가 뻗어 있다.

지도 왼쪽 위에는 만주지방에 대한 고구려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영토 범위가 기록돼 있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는 만주지방이 우리 민족의 옛터임을 밝히는 조선시대 영토 인식의 기본틀이 기록돼 있다

위 두 지도와 같은 시기에 제작된 중국 황실 지도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1717년), <대청만년일통천하전도(大淸萬年一統天下全圖)>1767년도 만주가 18세기에도 우리 땅임을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다.
 

[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일제가 대동여지도를 띄운 까닭은···

흔히들 1861년 평민 출신인 김정호가 동국대전도를 토대로 해서 사적(私的)으로 제작한 <대동여지도>를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지도라고 알고 있는데, 이는 일제의 식민사관이 만들어낸 ‘상식의 오류’이다.

<대동여지도>가 조선을 대표하는 지도처럼 인식된 계기는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1934년에 교과서 『조선어독본朝鮮語讀本』에 김정호와 <대동여지도>를 수록한 후부터다.

우리에게 알려진 김정호에 대한 이야기들, 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위해 전국을 세 차례답사하고 백두산을 일곱 번 등정했으며, <대동여지도>완성 후에는 국가의 기밀을 누설했다고 해서 분노한 흥선 대원군이 옥에 가둬 죽였다는 등등의 이야기는 <조선어독본>에 실린 내용으로 실제 사실이 아니다.

지금도 <대동여지도>보다 앞서 만들어진 정교한 고지도가 동국대전도를 비롯한 400여 종이 남아 있다. 당시에는 더 좋은 고지도가 많이 있었다. 그럼에도 일제가 발행한 <조선어독본>은 김정호가 지도를 제작하게 된 계기는 조선의 지도 제작 수준이 형편없었던 데 있었다고 하는데, 과연 무엇 때문이었을까?

거기에는 조선왕국을 폄하하고 한민족의 전통과 우수성을 깎아내림으로써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려는 음모가 내장됐다. 또한 공교롭게도 <대동여지도>는 <동국대지도>와 달리 만주지방을 국토에서 제외된 것으로 표기되어 있어 일제의 구미에 부합한 것도 일제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부각시킨 요인의 하나라고 분석된다.

◆◇◆◇◆◇◆◇각주

(1)* 18세기 조선의 각 도별 군현지도에 조선전도와 서북피아양계전도(西北彼我兩界全圖)를 덧붙인 회화식 지도책으로, 1750년대 초에 만든 것으로 짐작된다. 8책으로 구성된 채색필사본이며, 크기는 47×30.5㎝이다. 경기도, 해서전도 및 관서전도, 관동전도 및 북관전도, 서북피아양계전도, 영남전도, 호서전도, 호남전도, 대동총도가 차례로 1책으로 묶여 있다. 북관전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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