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의 베트남 ZOOM IN] (26) 베트남·한국·중국 충신들의 “위왕대사(爲王代死)”

안경환 전 조선대교수, 전 한국베트남학회회장 입력 : 2021-02-10 22:18
레라이(Lê Lai)·신숭겸(申崇謙)·기신(紀信)

{안경환 전 조선대교수] 


한국, 중국, 베트남의 역사에 왕을 대신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들이 있다. 나라가 바로 서려면 위왕대사(爲王代死)한 충신들의 충의정신을 기리고, 그 정신을 후세에 전하는 것이 필요하다. 충의정신이 살아있어야만 국민통합과 공정한 대한민국은 물론, 자국 우선주의와 패권주의로 치닫고 있는 냉엄한 국제정세 속에서 진정한 독립국가가 되고 남북통일을 앞당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한민족의 역사에는 신라 말 고려 초에 고려 태조 왕건의 목숨을 구한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 장군이 있고, 베트남 역사에는 레(黎) 왕조(1428~1788) 태조의 목숨을 구한 레라이(Lê Lai) 장군이 있다. 중국역사에는 유방(劉邦)이 세운 전한(前漢:B.C 202-A.D 8) 초기에 한고조(漢高祖) 유방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위왕대사한 기신(紀信) 장군이 있다. 이들 3국의 충신들에 대해 베트남, 한국, 중국 순으로 살펴본다,

베트남은 B.C 179~A.D 938년까지 1117년간의 식민 지배를 받고 중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13세기에 이르러 몽골이 남방정책을 펼치면서 1257년, 1284년, 1287년 모두 3차례에 걸쳐 베트남을 침략하였다. 그러나 쩐흥다오(陣興道)장군이 이끄는 쩐(陳)왕조(1225~1400)에 3차례 모두 패하였다. 베트남의 쩐 왕조는 몽골과의 전쟁에서 3차례 모두 승리하였으나 전쟁의 피해는 엄청나게 컸다. 농민들이 전쟁에 장기간 동원되면서 모내기와 추수를 제때 못하고, 물 관리가 안 되어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다. 기근에다가 중부지역에 있던 짬빠국의 침략이 이어지면서 경제가 피폐되었고 왕위계승 문제로 인한 왕실의 갈등에 가뭄, 홍수, 병충해가 겹쳐 백성들의 생활이 극도로 궁핍해졌고 정치는 혼란에 빠졌다.

레(黎) 태조를 대신하여 목숨을 버린 레라이(Lê Lai) 장군

이러한 혼란을 틈타 호뀌리가 쩐 왕조를 폐하고 호(胡)씨 왕조(1400~1407)를 세웠다. 이를 기회로 명(明)나라가 침략하여 호씨 왕조는 겨우 7년 만에 무너지고, 다시금 중국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이에 각 지방에서는 명나라 침략에 항거하는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그 중에서 1418년 타인호아 지방에서 자신을 평정왕(平定王)으로 칭하고 군사를 일으킨 레러이(Lê Lợi-黎利:1385~1433)는 명나라 군사를 물리치고, 베트남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된 레(黎) 왕조(1428~1788년)를 창건했다. 레러이는 타인호아성(省), 람선 지방의 토호로 명나라 군사와 10년간의 투쟁 끝에 승리하고 독립을 쟁취한 구국 영웅이다. 1419년 어느 날 명나라 군사와 전투를 하기 위하여 나간 레러이는 하이즈엉성(省), 찌린(Chí Linh)에서 명나라 군사에 포위되어 생명이 위급하게 되었다. 절체절명의 위급한 상황에서 응우옌턴(Nguyễn Thân)장군이 나서서, “제가 어의(御衣)를 입고 코끼리를 타고 나가 명나라 군사와 대적할 터이니, 그 틈을 이용하여 대왕께서는 피신하여 후일을 도모 하소서”하며 레러이 장군의 피신을 간청하였다.

응우옌턴 장군의 기개와 충의에 감동한 레러이는, “응우옌턴(Nguyễn Thân) 장군이 나를 대신하여 죽기를 각오하고 있으니, 향후 나와 나의 후손들이 행여 장군의 공(功)을 망각한다면, 궁궐을 황폐화하고, 옥새(玉璽)를 쇳덩이로 만들어버리고, 예리한 칼날이 짐을 향하여 반역하게 하소서!”라고 하늘에 고하며 그의 충절을 잊지 않도록 맹서하였다. 그리고 레러이는 자신의 성(姓)씨인 레(Lê)씨를 응우옌턴 장군에게 하사하고, 이름도 라이(Lai)라고 명명하여 자신의 이름과 발음이 비슷한 레라이(Lê Lai)로 부르게 하였다. 이리하여 레라이(Lê Lai) 장군이 황룡포(黃龍袍)를 입고 나가 싸우니, 명나라 군사는 레라이(Lê Lai)를 평정왕 레러이(Lê Lợi)로 알고 일거에 달려들어 사로잡았다. 사로잡힌 레라이는 명나라 군사에 의해 극형에 처해졌다.

그 뒤 천신만고 끝에 명나라 군사를 물리치고, 레(黎)왕조를 세운 레러이(Lê Lợi)는 레라이(Lê Lai) 장군의 충의정신을 기려 군사를 총괄하는 직책인 태위(太尉)로 추증하고, “내가 죽거든 나보다 하루 먼저 레라이 장군의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고 할 정도였다. 이리하여 레러이 대왕의 기일은 음력 8월 22일이고, 레라이 장군의 기일은 음력 8월 21일이 되었다. 그래서 베트남 민간에서는 “21일은 레라이(Lê Lai)요, 22일은 레러이(Lê Lợi)다.”라는 말이 구전되고 있는 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을 대신하여 전사한 신숭겸 장군

한민족에도 베트남의 레라이 장군보다 약 5백 년이나 앞서 위왕대사한 인물이 있다. 바로 평산(平山) 신(申)씨 시조인 장절공(壯節公) 신숭겸 장군이다. 장절공은 한민족 역사에서 두 번째 통일 위업을 달성한 고려 500년 역사의 최고 공신이다. 신숭겸 장군은 궁예가 건국한 태봉국의 기병 대장군으로 전남 곡성군 목사동면 구룡리에서 탄생했다. 장군은 918년 왕건과 함께 고려를 개국했으나 927년 11월 왕건이 대구 공산 전투에서 후백제 견훤(甄萱)의 군대에 포위당해 위험에 처하자, 신숭겸 장군은 태조 왕건의 갑옷으로 바꿔 입고 장렬히 싸우다 왕건을 대신해 전사하였다. 신숭겸 장군이 어의를 입고 위장술을 펼치는 동안 왕건은 견훤 군대의 포위망을 벗어나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했다. 장절공의 기지로 목숨을 건진 왕건은 후삼국 통일의 초석을 다져 936년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했으며, 고려 500년의 왕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신라는 B.C 57년부터 경주를 중심으로 A.D 935년까지 56명의 임금이 992년간이나 이어온 동양에서 최장기 왕국으로, 51대 진성여왕이 887년부터 10년간 집권하는 동안 신라왕조의 통치 권력이 약화되면서 전국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견훤이 892년 후백제 부흥을 부르짖으며 광주(무진주)를 점령하였고, 궁예는 견훤보다 1년 먼저 고구려의 부흥과 신라 타도를 목표로 죽산(죽주)을 장악하였다. 두 사람이 모두 스스로 임금이라 칭하니, 신라·후백제·후고구려의 후삼국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후고구려를 건립한 궁예의 세력이 날로 강대해지자 904년에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고쳤다가 911년에 다시 태봉(泰封)으로 바꾸고, 스스로 미륵불이라 하며 도읍지를 옮기면서 학정을 일삼자, 궁예의 휘하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축출하고 왕건을 새 임금으로 추대하였고, 왕건은 개경(개성)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였다.
당시 고려는 신라와 동맹을 맺고 있었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견훤은 두 나라의 동맹을 깨기 위해 신라를 공격하였다. 견훤이 927년 9월에 경주의 관문인 영천(고울부)을 공격하자 신라는 고려에 긴급 원병을 요청하였다. 경주를 점령한 견훤은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즉위시켰다. 이에 왕건은 군사 5천을 이끌고 경주로 내려가는 도중에 팔공산 동수에서 견훤의 군사와 대접전이 벌어진 것이다. 이 전투에서 왕건은 견훤의 군사에 포위되어 생명이 위급하게 되었고, 신숭겸, 김락 등 8명의 장수를 잃었고 5천 명의 군사들도 대부분 전멸하였다. 이때, 신숭겸 장군의 기지로 왕건과 갑옷을 바꿔 입고 싸우는 동안, 왕건은 적의 포위망으로부터 가까스로 탈출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신숭겸 장군은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웠으나, 견훤의 군사에 잡혀 결국 목이 잘리고 말았다. 그래서 춘천 비방동 화악산에 묻힌 신숭겸 장군의 묘에는 왕건이 장군의 머리를 금으로 만들어 예장하였고, 잘려진 머리는 신숭겸 장군이 타던 애마(愛馬)가 물고 고향 곡성에 있는 동리산(桐裏山)으로 달려와 슬피 우니, 이를 기이히 여긴 태안사 스님들이 올라가보고는 같이 동문수학하던 장절공임을 알고 비밀리에 장례를 치르고 매장하였다.

팔공산은 원래 공산(公山)이었으나, 8명의 장수가 이곳에서 전사했고, 8개 산봉우리가 8명의 장수를 상징한다 하여 팔공산으로 하였다고 전해진다. 대구의 왕산(王山)은 현재 신숭겸의 사당인 표충사 뒷산으로, 적에게 포위당했을 때 왕건이 올라가 몸을 피신했던 산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평산(平山) 신(申)씨 시조 장절공 신숭겸 장군의 유적지인 전남 곡성군 오곡면 덕산리에 있는 덕양서원(德陽書院)은 호남지역에서는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위치한 월봉서원(1578년 창건. 고봉 기대승 추모) 다음으로 오래된 역사를 지닌 전남지역의 3대 사액(賜額)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덕양서원은 1695년 조선 숙종21년에 ‘德陽(덕양)’이라는 이름을 사액 받아 사액서원으로 지정되었고, 1981년 전라남도 지방문화재 56호로 지정되었다.

한(漢)고조로 가장해 왕을 탈출시키고 화형을 당한 기신 장군

중국에는 베트남과 한민족의 충신에 앞서 일찍이 위왕대사한 기신(紀信) 장군이 있다. 기신은 전한(前漢) 초기 때 사람으로, 초한(楚漢)전쟁 때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을 섬겼다. BC 204년~BC 203년 한고조 유방이 형양(滎陽)에서 항우(項羽)의 군사에게 포위되었을 때 자청하여 한고조로 가장하고 수레를 타고 나가 허위로 항우에게 항복하여 적의 이목을 집중시켜 유방을 탈출시키고 자신은 화형을 당하였다.
당시 상황은 초(楚)나라의 항우가 전군을 총동원 하여 쳐들어오니 한나라의 병력으로는 초나라 군사와 대적하기에는 절대적으로 열세인데다가, 한신(韓信) 장군도 북방 정벌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아 한고조 유방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에 장량(張良)이 장군들을 모아놓고, 지금 몰려오고 있는 초나라 군에게 언제 패망할지 모르는 상황이라 비상수단으로 적에게 위장투항(僞裝投降) 전술을 써 보는 수밖에 없고, 그 전술을 쓰려면 용모가 대왕과 흡사한 용장이 있어야 함을 설파하였다. 이에, 기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얼굴과 용모가 대왕과 흡사하기 때문에 그런 임무라면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맡겨줄 것을 요청하니, 장량이 기신과 함께 대궐로 가서 한고조에게 기신으로 하여금 위장투항을 하게할 것임을 고하였다. 그러나 한고조는 대업을 아직 완성하지 못해 장수들에게 아무런 은총도 베풀어 주지 못하고 있는 형편에 장수에게 나를 대신하여 죽어 달라고 할 수 없다며 반대하였다. 그러자 기신이 "지금의 사태는 매우 위급하며, 만약 위장투항 계략을 쓰지 않아 형양성이 적에게 함락된다면, 신이 살아 있다한들 대왕께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으리까? 신이 대왕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가벼운 일이오며, 형양성을 지키고 나면 신의 이름은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군신들이 속수무책으로 사태를 방관만 하고 있을 것이옵니까?" 하였다. 그럼에도 왕이 주저하자 기신은 장검을 뽑아 들고, "대왕께서 신의 충심을 믿어 주지 않으신다면 신은 차라리 이 자리에서 목숨을 끊어 버리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한고조는 기신의 장검을 황급히 빼앗으며, "장군의 충성은 하늘을 뚫고도 남음이 있을 것 같구려. 장군의 양친(兩親)께서는 아직 생존해 계시오?"라고 묻자, 기신은 "아버님은 돌아가시고, 어머니만 계실 뿐이옵니다."라고 답하였다. 다시 한고조가, “그러면 장군의 어머니를 오늘부터 나의 어머님으로 모시기로 하겠소. 장군은 처자도 계시는가?"하고 물었다. 이에 기신은, “예, 있사옵니다. 아내와 아들 하나가 있사옵니다."라고 답하니, 한고조는, "그러면 오늘부터 장군의 부인은 나의 누이로 삼고, 아들은 나의 친아들로 삼아 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양육에 책임을 질 테니 장군은 안심하고 뜻대로 해 주기를 바라오."라고 말했다. 이리하여 장량은 항우에게 한고조의 이름으로 항표(降表)를 작성하여 보냈다.

항우는 유방이 항복하러 온다는 소식에 몸소 영문 밖까지 마중을 나왔음에도 유방이 수레에서 내려오지 않자, 항우는 수레를 향하여, "한(漢)왕은 항복을 하러 온 주제에 어찌하여 아무런 말이 없는가?"라고 호통을 쳤다. 수레 위에서는, "나는 왕이 아니고 한나라의 대장 기신이로다!" 하고 대답하였다. 항우는 자신이 속은 것을 깨닫고 검을 뽑아들며, "이놈아, 유방은 어디 가고 네 놈이 왔느냐!" 하고 호통을 쳤다. 그러자 기신은, "대왕께서는 그대가 없는 사이에 팽성을 치려고 한신, 영포, 팽월 장군 등과 함께 대군을 거느리고 팽성으로 떠나가셨다. 팽성을 공격하게 되면 그대의 가족들은 결코 무사할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수하들이 “저 놈을 당장 끌어내려 목을 베라는 명을 내려 주소서."라고 하였으나, 항우는 기신의 충성심이 아까워 자신의 부하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수레에서 내려와 항복을 한다면 그대를 크게 중용하리라고 했다. 그러나 기신은, "대장부가 임금을 섬기는 데 어찌 두 마음이 있겠는가? 목이 열 번 달아나도 네놈에게 항복할 내가 아니다. 나는 살아서도 한(漢)왕의 심복이었던 것처럼 죽어 귀신이 되어서라도 한(漢)왕을 위해 너 같은 포악한 무리를 섬멸하는 데 힘을 아끼지 않을 것이니 쓸데없는 소리는 작작하라."고 했다. 이에, 항우는 기신을 수레와 함께 화형에 처해 버리고 말았다.

이처럼 한국, 베트남, 중국의 역사를 보면 모두 왕을 위해 목숨을 버린 충신들이 있다. 그들이 있음으로 해서 왕조가 이어져 왔고 민족정신이 계승되어 왔다. 이들의 고매한 충의정신을 이어가도록 고양시키는 것은 국운을 번성하게 하는 산 역사 교육이 될 것이다. 베트남은 대도시마다 도로에 “레라이”이름을 딴 도로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가 있다. 그의 충의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후세에 전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한국에는 곡성군의 신숭겸 장군 태생지에서 압록까지, 춘천의 묘역 앞 도로와 대구의 표충사 앞 도로 3곳이 “신숭겸 장군로”로 지정되어 있다. 베트남 민족과 한국 민족이 선인들의 충의정신을 기리는 방법이 엇비슷하면서도 깊이가 다름을 엿볼 수 있다. 신숭겸 장군의 충의정신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무공훈장에 “장절(壯節)무공훈장“을 추가하고, 덕양서원을 3군 사관학교 생도들의 답사일정에 넣어 매년 탐방하도록 하여 무인들의 충의정신을 고양시키고, “신숭겸장군로”를 치유의 둘레 길로 널리 홍보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베트남과의 우호관계 진작 차원에서 인류사에 충의정신을 우뚝 세운 레라이 장군 가문과 평산(平山) 신(申)씨 가문의 교류를 활성화하는 것도 고려해 볼만하다.



 

 


안경환 전 조선대교수, 전 한국베트남학회회장   thongnha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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