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78)] 꿈에 육체적 욕망을 느낀 류영모의 충격

이상국 논설실장입력 : 2020-10-28 09:29
1년 뒤 죽는 날을 선포했던 다석, '사망시계'가 도는데…

[다석 류영모의 초상.]


'때가 이르렀으니" 준비한 예수처럼

전쟁이 끝난 지 2년. 1955년 4월 26일 류영모는 '죽을 날'을 발표했다. 그날로부터 365일 뒤인 1956년 4월 26일에 죽음을 맞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공표하는 일이 예사로운 일은 아니다. 왜 하필 류영모는 이날을 택했을까. 뜻밖에도 해방 직전에 타계한 김교신과 관련이 있다.

1939년 6월 25일 김교신은 성서연구회 사람들과 함께 구기리의 류영모를 찾았다. 이날은 류영모의 탄생 1만8천일을 맞은 날이었다. 김교신은 류영모에게 조선어사전을 기념선물로 건넸다. 사전에는 김교신이 친필로 날짜와 '서울성서연구회'라는 증정단체의 이름을 서명처럼 써놓았다.

8년 뒤인 1947년 류영모는, 문득 이 사전을 보다가 김교신의 글씨를 본다. 죽은 김교신이 무척 그리웠을 것이다. 그날의 온기를 느끼려는 듯 날짜를 세어본다. 벌써 3천날이 지났다. 그때가 1만8천일을 기념한 날이었으니, 내가 2만1천일을 살았구나.

이렇게 생각을 펼치던 끝에, 김교신의 사전을 받은 그해에서 6천날이 되는 해(그해가 1956년), 김교신의 부고를 받은 날(4월 26일)을 택해, 그 아름다운 삶과 죽음의 길을 따라가겠다는 원(願)을 세웠다. 이런 결심과 선언을 어떻게 봐야 할까. 나날이 사지(死地)였던 긴 전쟁을 살아낸 그는, 포화가 멈춘 날들이 되어 문득 왜 자신의 죽음을 택일(擇日)하는 결정을 했을까. 물론 단순히 제자 김교신에 대한 극진한 생각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특별한 날을 택하려 한 것은, 죽음을 좀 더 의미있는 '고리'로 받아들이려 한 뜻이 아닐까 싶다. 죽음을 기피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어떤 기념일로 만들어 세상의 귀한 인연을 새기려는 그의 의연함을 엿본다.

그가 죽음의 날을 선포한 것은, 요한복음 17장 '예수 결별의 기도'를 스스로도 실행에 옮긴 것이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뚜렷하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뚜렷하게 하옵소서." 류영모는 예수가 '때가 이르렀음'을 알고 죽음을 준비하듯이 스스로의 '때'를 느끼고 준비하고자 한 것이다.

류영모는 자살은 단호히 반대했다

죽음의 날을 택한 것은 '자살'과는 다르다. 닥친 죽음을 피하지는 않되 스스로를 죽이는 일은 해선 안된다고 했다. 예정업(豫定䁆 혹은 豫定業, 죽음의 예고)과 자발작(自發作, 자살행위)은 다르다고 말했다. "절앙절앙 예정업만은 절앙/주의주의 자발작만은 아예 말 것이니라" (류영모의 시 중에서) 그는, 자발작(자살)은 구차한 일이며 예정업(죽음 예고)은 '간절히 바랄 일(切仰)'이라고 보았다.

"결국 사람의 주인은 얼입니다. 이 세상 떠날 때는 마음이 시원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아직 준비가 못된 것입니다. 의지하지 않을 것에다 의지했다면 죽을 때 시원하지 못합니다. 죽는 게 나쁘고 사는 것이 좋다는 것은 사람이 미혹해서 그런 것입니다. 살기는 좋고 죽음은 생각도 하지 않겠다는 것은 두번 미혹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죽으려고 하는 것은 어림없는 미혹입니다."(류영모 어록)

사망예정일을 하루하루 세어가며 사는 삶이란 어떨지 짐작하기 어렵다. 무엇인가를 덜어내는 엄정하면서도 고요한 수행이었을 것이다.

죽음 예정일을 278일 앞둔 1955년 7월 23일. 류영모가 밖에 나갔다가 귀가해, 막 신을 벗고 마루에 올라설 때였다. 방 안에서 갑작스럽게 굉음이 울렸다. 방문을 열어보니, 류영모의 책상 한가운데 지붕이 뚫려있고 큰 돌이 떨어져 있었다. 돌은 책상을 치고 방바닥으로 떨어져 구들까지 뚫었다. 나중에 이 돌을 저울에 달아보니 4.7㎏이었다. 책상 위에 놓인 '서전(書傳)'은 돌을 맞아 너덜너덜해졌다. 류영모가 그날 방에 앉아 '서전'을 읽었다면 그 돌과 함께 죽음을 맞았을 수도 있다. 대개 삶과 죽음이란 이렇다. 살아있는 것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죽은 것만 죽은 것이 아니다. 이날 류영모는 죽음을 앞당겨 맛본 느낌이었을 것이다.

죽을 뻔했던 날, 죽음을 만난 날

1955년 10월 18일. 191일을 앞둔 날, 류영모는 삼각산원에 김산(金山)을 만나러 갔다. 그 길에서 주검 하나를 본다. 그는 이 일을 일기에 기록해놓았다. "좁은 길에 그대로 가마니 거적으로만 동그랗게 한번 말아 싼 반백(頒白, 희끗희끗)의 머리칼 밑으로 죽은 빛깔 그대로 질린 이마 한 점 인생이었구나. 역시 가마니 거적으로 만든 마주잡이 들것이 내던져 놓여있다. 조금 더 가노라니 궤짝가게 앞에 두어 젊은이가 감을 사먹는 것이 보인다. 아마 그들이 메고온 것 같다. '마주잡이 거적송장'이란 말만 들어왔더니 오늘 첨 보았다. 누구일까. 허물이 아주 적게 산 끝일까."

혹독한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인지라, 죽음이 여전히 일상처럼 느껴지는 분위기가 있었을 것이다. 류영모는, 주검에 대한 떠들썩한 호곡도 없고 치장도 없이, 거적대기에 실려 단촐하게 산으로 올라온 주검을 보며 인간 육신의 부질없고 가벼운 실상을 다시 한번 느꼈던 것 같다. 그 초라함에 대해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오직 그 '얼'이 살아낸 생이 허물이 적었을까를 곰곰히 살피는 그를 보라. 류영모는 나날이 조금씩 죽음에 다가가는 삶을 살고 있었다.

'반백의 머리칼 밑으로 죽은 빛깔 그대로 질린 이마 한 점 인생이었구나"라는 구절은, 더 뺄 것도 더할 것도 없는 한 구절의 절창(絶唱)이다. 사생(死生)의 실상을 이토록 담담히 그려낸 시가 또 있었던가.

하루하루 죽음의 날은 다가오고 있었다. 죽기로 한 해가 밝았다. 1956년이었다. 이제 넉달이 채 남지 않았다. 그는 하느님에게로 가는 형언할 수 없는 육신의 부끄러움으로 우러름의 글을 썼다.

"나가자빠지는 몸, 이 고깃덩이가 그 시름을 잊을 만큼 일어났습니다. 머리를 들고 일어나 하늘 그리운 생각을 피어 올리게 한, 하느님. 아버지 하느님을 이 고깃덩이 속에서 뵙게 됨이 부끄럽습니다. 마침내 이 부끄럼을 아버지께 환빛(환한 빛, 영광)으로 돌려드리오리까."

꿈 속에서 육욕(肉慾)을 만나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1956년 2월 18일, 66일을 앞둔 날 밤이었다. 그는 이날 꾸었던 꿈을 한시로 지어 고백했다.

육십육세옹(六十六歲翁)
신성하기일(晨省何期日)
상몽혼속현(尙夢昏續絃)
무기영생연(無期永生然)

예순여섯 늙은이
새벽기도는 어느날까지인가
아직도 어둑한 꿈속에 육욕을 만나니
영생을 얻는 일 기약없구나

류영모는 이 시를 풀면서 "아직 꿈에 부부생활을 하고싶은 꿈을 꾸니, 영원한 생명은 기약할 수 없는 것인가"라고 말하고 있다. 속현(續絃)은 거문고 줄을 다시 잇는다는 의미로, 아내를 잃은 사람이 재혼을 하는 일을 말한다.

부부간의 다정함을 금슬(琴瑟)이라 표현하는데, 금과 슬은 둘 다 거문고의 일종이다. 금은 다섯 줄 혹은 일곱 줄로 된 현악기이고 슬은 크고 줄이 많은 것으로 15현, 19현, 25현, 27현슬이 있다. 고대에 음악을 연주할 때는 금과 슬이 꼭 붙어다녔다. 두 악기가 화음을 잘 이뤄야 좋은 음악이었다. 금과 슬은 서로 부족한 부분을 메워주고 조화를 이룬다는 뜻에서, 부부간의 금슬이 나왔다.  금슬의 한쪽을 잃은 뒤 다른 현악기(?)를 보완하는 것이 '속현'이다. 즉 새 여자를 만나는 일이다. 

그러나 류영모는 스스로 해혼(解婚)을 했기에, 속현은 아내와의 상열(相悅)을 말하는 것이다. 죽을 날을 정해놓고 마음을 정갈히 하여 누웠는데, 꿈에 갑자기 옛날 아내와의 밤이 떠오른 것이다. 깨어 있을 때 드는 생각이라면, 생각이 들기도 전에 막았으련만 꿈에 들어온 이 환영(幻影)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깨어난 그의 마음이 어땠을까. 그간의 수행과 기구(祈求)가 헛된 것처럼 여겨져 참담하지 않았을까. 

1942년 아내와의 사이에 '마음의 만리장성'을 쌓고 금욕생활을 한 지 14년이 됐는데, 66세의 꿈에 탐진치(貪瞋痴) 3독(毒)의 뿌리가 아직도 남아있었다는 이 고백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육신을 지닌 인간의 수행이 얼마나 지난(至難)한 길인지를 말해주는 듯하다. 그는 말했다. "정신이 물질에 휘감겨서는 못 씁니다. 정신이 물질을 부려 써야 합니다. 이게 뒤집히면 실성(失性)이고 멸망입니다."

마하트마 간디도 같은 고백을 한 적이 있었다. 그는 37세 때 아내와의 부부생활을 중단했다. 67세가 된 어느 날 이런 말을 했다. "두세 달 전 봄베이에 있을 무렵이 내겐 가장 암흑의 시기였다. 유혹을 느낀 시기였다. 자는 동안에 갑자기 여자의 얼굴이 보고싶어졌다. 40년간이나 육욕을 극복하려 애써온 나는 이 무서운 경험에 몹시 괴로워했다. 이 감정을 결국 이겨냈지만, 너무나 어두운 기간이었다. 만일 그 감정에 굴복하였다면 완전히 파멸하고 말았을 것이다."
 

[다석 류영모]



'죽는 날' 다음날, 강의하러온 류영모

1956년 4월 27일, 류영모는 YMCA 금요강좌를 위해 출근했다. 그 전날인 4월 26일이 죽기로 한 날이었는데, 별일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이튿날 연경반 강의에 나온 것이다. 이 상황에 대해선 제자 김흥호의 증언이 가장 실감난다. 김흥호는 한동안 병을 앓았다가 오랜만에 류영모의 강의에 나갔다가 사람들로부터 곧 스승이 돌아가실 거라는 청천벽력의 얘기를 들었다. 류영모는 여러 차례 고별강연을 했다. 마지막 목요강좌라고 신문에 광고도 냈는데 그때 청중이 100여명이나 몰렸다. 김흥호는 다시 들을 수 없을 류영모의 강의들을 보존하기 위해 속기사에게 의뢰하여 강의내용을 기록하게 한다.

4월 26일 그날에 관해 김흥호는 이렇게 적었다. "돌아가신다는 그날은 선생님께서 자기 집에 오지말라고 하여 나는 초조하게 집에 있었다. 정성을 다해 가르쳐주신 선생님께서 오늘 세상을 떠나신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나는 그동안 선생님께 배운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선생님처럼 한시로 적어보았다. 다음날인 4월 27일 선생님의 장례를 치러야할 것 같아 자하문 고갯길을 터벅터벅 올라갔다. 자하문에 이르렀을 때 선생님께서 책보를 들고 이쪽으로 걸어오고 계셨다. 그날이 금요일이었다. YMCA모임에 나오고 계셨다. 나는 돌아가셨던 선생님께서 살아오신 듯하여 너무도 반가웠다. 인사를 하면서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줄 알고...'라고 말씀드리자 '누가 죽어요, 밥이 죽어요'라고 대답하셨다. 나는 선생님과 함께 YMCA로 걸어왔다. 청년회의 어두운 방에서 어제 내가 적은 한시를 선생님께 보였다. 선생님은 무언가 긍정해 주셨다. 무언가 4월 26일은 선생님이 죽은 날이 아니라 내가 죽은 것 같은 느낌을 가졌다."

류영모는 왜 죽는 날을 선언했고, 그날 죽음에 이르지 않았을까. 금요강연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찾기 어렵다. 4월 26일날 돌아간다는 말이 빗나간 뒤, 어떤 사람이 미리 안다고 하더니 왜 못 맞혔느냐고 물었을 때 류영모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함석헌의 증언). "돈을 쓸 때는 예산을 세워야 하지 않느냐. 예산을 세웠다고 꼭 그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남으면 남기고 모자라면 추가해서 쓰면 그만이지만, 그래도 일단 예산을 세워야 하지 않는가.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죽음의 날을 떠올리며, 마지막인 것처럼 살다

죽음 선언의 의미에 대해 가장 음미할 만한 해설은, 제자 최원극에게서 나왔다. "선생님은 이 세상에서 남은 생애의 날수를 여러 번 예언하셨다. 처음에는 선생님의 말씀이 너무도 태연자약했고, 남은 시일도 많아서 그리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망예정일이 점점 가까워지므로 제자로서 관심이 없을 수 없었다. 선생님이 이 세상을 떠날 날을 영감으로 예지했는지 아니면 우연히 가정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에게 중요한 일도 아니다. 다만 선생님께서는 몸은 죽지만 얼은 산다는 선생님의 믿음에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선생님의 예정이 맞아도 좋고 안 맞아도 좋다. 다만 선생님께서 죽음의 순간을 바라보며 태연자약하게 나아가시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바로 이것이다. 죽음의 순간을 뚜렷이 바라보며 삶의 마지막에 임하여 몸의 모든 것을 덜어내며 오로지 얼의 나로 집중해 겉은 태연자약하고 안은 치열하고 고요하게 하느님에게로 나아가는 수행. 시시각각으로 '사망시계(死亡時計)가 돌아가는 걸 느꼈을 365일. 그의 4월 26일은 그 죽음의 한 관문을 넘는, 스스로 낸 시험이었다.

류영모는 1년 뒤에 그날을 기념하며 이렇게 말했다.

"1956년 4월 26일은 내가 죽기를 기원한 날인데, 오늘이 그 1년이 되는 날입니다. 오늘은 내 자신의 장례를 내가 치르고 내 소상(小祥, 1년 첫 기일에 지내는 제사)을 내가 치르는 날입니다. 내 대상(2년 뒤 두번째 기일에 지내는 제사)을 내가 치르게 될지 모릅니다. 이 지구 위의 잔치에 다녀가는 것은 너와 나 다름없이 미련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자꾸 더 살자고 애쓰지를 말아야 합니다. 여기는 잠깐 잔치에 참여할 곳이지 본디 여기서 살아온 것도 아니요, 늘 여기서 살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생각으로 초월하자는 것입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컴패션_미리메리크리스카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네티즌 의견 0
0 / 300

실시간 급상승

9.9초 더보기

아주 글로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