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환 칼럼] '악어의 입'으로 향하는 한국형 재정준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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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환 고려대 경제학과 객원교수
입력 2020-10-11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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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환 교수]



가격상한제는 경제학원론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한 꼭지. 정부의 간섭이 없는 경쟁시장에서는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는 점에서 균형가격과 균형거래량이 결정된다. 이때 정부가 나서서 일정 수준 이상의 가격을 못 받게 하는 가격상한제를 도입한다고 해 보자. 예를 들면, 정부가 주택시장에서 결정된 균형임대료보다 낮은 임대료를 받도록 규제하는 것이다. 이 경우 균형임대료 수준보다 정부가 강제로 정한 임대료가 낮으므로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면서 물량부족이 발생할 것이다. 가격상한제의 효과가 바로 나타나면서 ‘실효성 있는(binding)’ 규제가 되는 것이다.

반면 정부가 현재의 임대료 수준은 괜찮은 편이지만 앞으로 오를 것에 대비해 균형임대료보다 높은 수준으로 임대료를 규제한다고 해 보자. 이 경우 현행 임대료는 정부가 정한 임대료 상한보다 낮은 수준이므로 상한제의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임대료 상한이 있기는 하지만 작동하지 않는 ‘실효성 없는(non-binding)’ 가격상한제가 되고 마는 것이다. 문제는 이때 임대인들은 현행 임대료가 정부가 정한 상한보다 낮으므로 다양한 방법으로 임대료를 올리려는 유혹에 노출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사례가 최근 정부가 발표한 한국형 재정준칙에서 발생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 5일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을 60% 이하로 유지하고 재정수지 적자 규모를 GDP 대비 3% 이하로 관리하는 재정준칙 도입 방침을 밝혔다. 그러면서 적용 시점은 2025년으로 정했다. 또한 전쟁이나 글로벌 경제 위기, 대규모 재해 후 경제 위기 같은 상황에서는 준칙 적용을 면제하는 등 예외 규정을 폭넓게 두기로 했다.

재정준칙은 정부의 재정지출, 즉 나랏돈 씀씀이를 통제하는 규범이다. 통상적으로 한 나라의 경제 규모를 보여주는 국내총생산(GDP)을 기준으로 국가채무 비율과 재정적자 비율의 상한선을 법으로 정하는 것이다. 이는 비율상한제로서 가격상한제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상한이 되는 비율을 현 수준보다 지나치게 높게 설정하거나 예외규정이 많으면 실효성이 없는 규범이 되고 말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정해놓은 상한까지는 얼마든지 재정적자를 일으키는 동시에 국가채무 비율을 높여가도 되는 데 따른 ‘도덕적 해이(moral hazard)’에 빠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선거와 표를 겨냥한 방만한 재정지출을 할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올해 우리나라의 재정적자는 4차례에 걸친 추경으로 GDP 대비 6% 수준까지 크게 확대되었다. 코로나19라는 초유의 위기에 대응한 조치로, 미국 등 다른 나라처럼 우리 정부도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작년에만 해도 38.1%였던 국가채무 비율이 올해 43%를 넘어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국가채무 비율이 2022년에 51%, 2024년에 58%를 넘어선다면서 2025년부터 국가채무 비율을 60% 이하로 유지하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때까지는 마음대로(?) 재정적자를 일으키면서 국가채무를 늘려 가겠다는 것인가. 현재 허리둘레에 비해 큰 바지를 사놓고 그 바지에 맞을 때까지 허리둘레를 늘리겠다는 것과 다를 게 무엇인가.

‘악어의 입(crocodile mouth)’은 정부 재정과 관련해 자주 인용되는 용어이다. 2011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한∙일 재무장관회의에서 일본 재무성 측에서 1970년대 이후 일본 정부의 세입과 세출을 그린 그래프를 보여줬다. 마치 악어가 입을 벌리고 있는 모양이어서 ‘악어의 입 그래프’라고 부른다면서 “일본의 전철을 밟지 말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일본은 고도성장을 구가하던 1970년대에 복지를 크게 확대한 이후 1980년대 말까지는 세입과 세출이 거의 균형을 이뤄왔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잃어버린 10년’이 20년으로 이어지면서 문제가 커지기 시작했다. 세출은 급격히 늘어나 위로 향한 반면 세입은 경기침체로 쪼그라들면서 아래를 향했다. 말 그대로 쩍 벌어진 악어의 입 모양이 되고 만 것이다. 이 과정에서 1977년 32%였던 일본의 국가채무 비율이 1983년에는 60%를, 1996년에는 100%를 넘어섰다. 이어서 200%를 넘기는 데는 불과 13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일본의 국가채무 비율을 251.9%로 추정하고 있다. 세계 최고일 뿐 아니라 다음으로 높은 그리스의 200.8%에 비해서도 50% 포인트 이상 높은 수준이다.

우리나라의 국가채무 비율은 IMF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만 해도 11.4%였던 것이 올해는 40%대 중반(IMF 추정치는 46.3%)에 달할 것이라는 예상이다. 20여년 만에 4배나 높아지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최근 국회예산정책처는 국가채무 비율이 2030년 75.5%에 이어 2040년이면 103.9%로 100%를 넘어설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일본과 이미 재정위기를 겪은 그리스 등 PIGS(포르투갈∙이탈리아∙그리스∙스페인)와 비교하면 아직은 절대적 비율에서 낮다. 하지만 국가채무 비율이 높아지는 속도는 이들 나라에 못지않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저출산과 고령화 속도 면에서 우리나라가 일본보다 더 빠르다는 걸 감안하면 재정준칙을 훨씬 더 강화해야 할 상황이다. 자칫 악어의 입이라는 늪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바지가 허리에 비해 지나치게 헐렁하면 바지가 흘러내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허리띠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허리띠를 느슨하게 매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처럼 재정준칙도 느슨하면 아무런 실효성이 없다. 헌법으로 하든 법으로 하든 국민들이 이해하고 납득할 정도로 허리띠를 졸라매고 예외규정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 그래야 보다 튼튼한 경제와 재정을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을 것이다.

/ 최성환 고려대 경제학과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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