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72)] 육체를 믿는 것은 기독교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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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논설실장
입력 2020-10-07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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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류영모 기독교사상과 8가지 반(反)육신론

[다석 류영모]


육체는 죽고, 성령은 영원히 산다

류영모는 기독교인이다. 1905년 15세 때 한국 YMCA 초대총무였던 김정식이 이끌어 서울 연동교회에서 입신(入信)한 이후, 한순간 한 치의 배교(背敎)도 드러낸 바 없었다. 오히려 갈수록 굳건하고 단호한 믿음을 세워 일생을 나아갔다. 1912년(22세 때)  오산학교 교사 생활을 마감하면서, 교회와 교리 기독교의 깊은 모순에 눈을 떴고 교회와 결별했으며 성서 읽기와 신앙 실천을 통해 진리파지(眞理把持)에 주력했다. 류영모는 투철한 기독교 신관의 사상가-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기독교 사상을 짚는 일은, 매우 당연한 일인 듯 하면서도 한편으로 '교계(敎界)'의 심각한 고민들을 건드릴 수 있는 예민한 작업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문제들을 짚지 않고는 류영모의 사상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그의 사상을 관통하는 핵심은, '육사영생관(肉死靈生觀, '몸죽얼삶')'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지닌 육신은 필멸하며, 어떤 인간 육신도 이와 다를 수 없다. 절대세계의 하느님은 오직 성령으로 상대세계에 접속하며 그 성령이 인간의 생각에 닿아있는 것이 '얼나'라는 영적자아(靈的自我)다. 예수는 얼나를 통해 하느님의 존재를 인간에게 드러낸 위대한 '성령의 아들'이다. 부활과 영생은 오직 성령으로 거듭나고 성령으로 완전한 안정감을 이루는 기적을 가리킬 뿐이다.

류영모는 오직 자율신앙을 통해 개개인이 저마다 하느님을 만나야 한다고 말했다. 결코 누구와 함께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예수처럼 '자기 안의 얼나'를 돋워 하느님과 귀일하는 파사(破私)를 역설했다. 인간이 태어난 지상목적은 생의 탐진치(貪瞋癡)와 집착을 벗고 '죽음'이란 탈육(脫肉)을 통해 신의 뜻에 닿는 것이다. 성서와 관련한, 그의 8가지 반(反)육신론의 사유를 살펴보자. 

첫째, 류영모는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탄생했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예수의 육신은 요셉과 마리아의 혈육(血肉)을 받아 태어났으며, 다만 예수는 하느님으로부터 육신과는 별개로 성령을 받았다고 보았다. 류영모는 예수와 그리스도를 나눠 생각했다.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오는 성신(聖神)이기에 예수가 그리스도인 건 틀림없지만 그리스도가 오직 예수에게만 붙여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복음서에 동정녀 탄생설이 등장한 것은 예수의 육신(제나)과 성령(얼나)을 구분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다.

둘째, 어린 예수를 신성시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고 말한다.

마태-누가 두 복음서에 씌어진 것처럼 예수가 성령에 의해 수태되었다면 이미 태아 때부터 성령의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30대에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까지 이런 성령을 드러낸 일이 없다.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12세 때의 장면, 예루살렘에서 소년 예수가 성전에서 선생들과 문답을 하고 있을 때 예수의 부모가 "우리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고 하자, 예수는 "내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했나이까"라고 대답한다. 이 말을 성령의 증거로 삼기도 하지만, 광야에서 시험받기 이전에 소년이 한 이 말 한마디에 의미를 담는 일은 너무 빈약하다. 이 말 외에 30여년간 어떤 영적인 자취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출가하여 세례 요한의 캠프에 합류하고 세례를 받으며 공생활에 나아가면서 성령을 받았다고 본다. 

셋째 예수의 육신은 하느님 아들이 아니다.

류영모는 예수를 따르는 일이 예수의 육신을 따르는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몸으로는 예수의 몸도 내 몸과 같이 죽을 껍데기지 별수 없다"고 말하는 그는, 예수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내 속에 있는 하느님의 씨(성령)가 참생명이라는 사실이라고 했다. 예수도 육체는 이랬다. 끼니를 먹지 않으면 시장하였다(마가 11:12), 물을 안 마시면 목말랐다(요한 4:7), 오래 걸으면 몸이 고단하였다(요한 4:6), 시신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요한 11:35), 피를 흘리며 괴로워하다 숨졌다(마태 27:50). 간디는 이런 말을 했다. "예수가 하느님의 유일한 육신의 아들이요, 그를 믿는 자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예수가 하느님 같거나 하느님이라면 모든 사람들도 하느님 같거나 하느님일 것이다. 나는 예수를 순교자로, 희생의 화신으로, 거룩한 스승으로 보았지 이 세상에서 가장 완전한 이로 인정할 수 없다"(간디 '자서전' 중에서).

넷째 예수의 하느님나라는 종말론의 천년왕국과 상관없다.

세례 요한이 헤롯의 무리에게 잡혀갔을 때 예수는 "때가 찼고 하느님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마가 1:15)고 말했다. 예수가 말한 하느님나라는 어디 있는가. "하느님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 17:21),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느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한 3:3),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요한 18:36). 예수가 언급한 대목에서 하느님나라는 '성령'을 말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희구해온 지상천년왕국은 이와는 다르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으로 지금껏 은총을 받지 못했으나 이 역사의 종말이 와서 하느님의 신정(神政)이 펼쳐지면 이민족은 심판을 받게 되며 이스라엘 민족은 하느님과 더불어 천년왕국을 이루며 영광을 누린다는 스토리다. 예수가 '하느님나라가 가까웠다'고 말을 할 때, 당시 유대인의 종말론을 익히 알고 있던 당시 사람들이, 예수의 말을 이 스토리와 연관지어 해석했다고 볼 수 있다. 류영모는 하느님나라는 성령의 나라로 이스라엘 민족의 한풀이식 종말관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했다. 예수가 말한 종말은 인간 개개인 육신의 종말(죽음)을 의미하며, 그때 접하게 되는 성령의 귀일(歸一)만이 하느님나라를 보는 길이다.

다섯째, 예수는 죽기 위해서 왔다고 말했다.

예수는 말했다. "내가 참으로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을 것이요,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아버지여 이때를 벗어나게 하소서. 그러나 내가 이 때문에 왔나이다"(누가 12:23~27). 예수는 '이 때문에' 왔다고 했다. 즉 죽기 위해서 왔다는 말이다. 류영모는 이 구절을 언급하며, "우리는 죽으려고 왔다. 졸업하러 왔다. 이건 나를 위해 하는 말이다. 어느 날 어느 때에 내가 죽을 때에 '이 때문에 내가 왔나이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낙제다. 예수가 이 때문에라고 하든지 누가 하든지 똑같다"(다석어록 중에서). 즉 예수는, 죽음으로써 '성령을 완성하는 완전한 전범(典範)'을 보이고자 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예수를 보내신 이의 진리를 증거하고 하느님에게로 합일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고난의 죽음을 택한 것이다. 성경은 '육체'가 하느님에게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이 가는 것임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류영모는 말했다. "죽음이란 참으로 없다." 성경은 말했다. "예수가 말하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이는 몸은 죽어도 성령은 산다. 몸이 살아도 성령을 믿는 이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한 16:22).

여섯째 예수의 육신은 부활하지 않았다.

예수가 죽은 몸이 부활한다고 확신했다면 최후의 성찬이나 결별의 기도를 할 까닭이 없다. 톨스토이는 이런 예화를 들었다. 사두개인들이 예수에게 '일곱 형제와 죽은 여인은 부활하면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고 물었다. 예수는 이런 취지로 대답했다. "죽음에서 부활하는 이는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에 이미 개인이 아니다. 개인적이고 일시적이며 육체적인 삶 외에 하느님과 교통하는 영원한 생명인 성령이 있다." 부활과 영생은 오직 성령에 해당하는 것일 뿐이다. 몸의 부활로 하느님의 능력을 보여준다는 생각 자체가 육신에 치우친 인간의 관점일 뿐이다. 톨스토이는 예수가 육신부활을 예언한 것처럼 풀이되고 있는 13개 성경구절(요한 2:19~22, 마태 12:40, 누가 11:30, 마태 16:4~21, 마가 8:31, 누가 9:22, 마태 17:23, 마가 9:31, 마태 20:19, 마가 10:34, 누가 18:33, 마태 26:32, 마가 14:28) 어느 것도 예수가 자신이 몸으로 다시 살 것이라고 한 말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또 마가복음 16장에 있는 예수의 육체부활 기록은 2세기초 아리스티온이 추가한 내용이다. 1945년 새로 찾아낸 도마복음서에는 동정녀 탄생도 없고 사후 부활에 대한 것도 없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말하노니 누구라도 위로부터(성령으로부터) 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보지 못한다"(요한 3:3).

일곱째 예수는 인류 원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못박힌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의 속죄 교리는 '원죄 속죄론'을 믿도록 하고 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따먹는 원죄를 저질렀고, 그 원죄 때문에 인간은 멸망의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하느님이 인간을 불쌍히 여겨 몸을 입고 사람으로 태어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으로써 인간 원죄를 대속(代贖)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극적이며 감동적이지만 신의 수육(受肉, 육체를 가짐)을 믿어야 한다. 예수는말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이는 내게 값어치가 없으니라. 자기 개체의 목숨을 찾는 이는 나를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개체의 목숨을 잃는 자는 나를 얻으리라." 예수는 자기가 십자가에 매달려 흘린 피에서 속죄를 받으라고 한 적이 없다. 그는 속량(贖良, 인질에서 풀어주는 것)을 말했다. 속죄는 죄를 갚아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속량은 인간이 지닌 몸나의 수성(獸性)을 벗고 얼나를 깨닫게 하는 일이다. 예수 속죄론은 예수를 믿음으로써 예수가 흘린 피의 공로를 대신 입어 스스로가 지은 죄에 대한 벌로 받을 재화(災禍)나 횡액을 피해보고자 하는 기복면화(祈福免禍)의 종교 타락을 불러오는 빌미를 만들지 않았던가. 예수가 십자가를 진 것은, 인간에게 십자가를 지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위대한 모범을 보여준 것이다. 예수를 통해 인간이 깨달아야 할 것은, 타인과 이웃을 위해 자기를 아낌없이 희생하는 일 그 자체이며, 육신의 희생이 허망한 최후가 아니라 성령을 온전히 돋우는 기적의 시작이라는 사실이다. 이 모든 것의 위대함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육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과 죽음을 이겨낸 성령에 있다는 점을 환기시키는 데에 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영화의 한 장면.]



여덟째 인류를 심판하러 예수가 다시 오지 않는다.

사도신경의 기도는, 종말론과 심판론을 명시하고 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느님 오른쪽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니다"(사도신경). 종말론이나 심판론은, 인간 육신이 종말에 처해지는 것과 인간 육신이 심판을 받는 것을 말하고 있다. 몸이 스스로의 수명이나 기대와 상관없이 죽음을 맞을 수 있다는 공포감과, 그에 더하여 몸의 고통을 극화한 형벌의 공포감을 강조함으로써 반사적 효과로 신앙의 절실함을 이끌어내는 '네거티브'의 수단으로 쓰인 혐의가 있다. 종말론과 심판론은 성령이 중심이 되고 성령이 본질이 되어야 할 종교를, 육체적인 문제들로 끌어내려 생명과 죽음을 오히려 왜곡하고 과장하는 오류를 범했다고도 볼 수 있다. 류영모는 인간의 종말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사람의 몸뚱이는 아끼고 아끼다가 거름이 될 뿐이다. 짐승(육신을 말한다)을 기를 때는 우리가 쓸 만큼 사랑하고 길러야지 더 이상 사랑할 필요가 없다. " 류영모는 심판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하루하루가 심판인 것을 알아야 한다. 시간이 심판이다."


[다석 한시 '기독자(基督者)' 읽기] 기도와 찬송가와 예배 의식이 종교가 아니다

祈禱陪敦元氣息(기도배돈원기식)
讚美伴奏健脈搏(찬미반주건맥박)
嘗義極致日正食(상의극치일정식)
禘誠克明夜歸託(체성극명야귀탁)

힘차게 숨 잘 쉬는 것이 기도를 독실하게 지키는 것이며
맥박이 잘 뛰는 것이 찬송가 잘 부르는 것이며
날마다 밥을 잘 먹는 것이 가을 예배(嘗) 올리는 것이며
밤에 모든 걸 맡기는 것이 낮을 이기는 5년 예배(禘)다

(*3행에 나오는 상(嘗)과 4행의 체(禘)는 '중용(中庸)' 19장에 나오는 말이다.  '체상지의(禘嘗之義, 하늘에 지내는 제사 체와 상의 뜻)에 밝으면 나라 다스리는 일은 손바닥을 보는 것과 같다'는 구절이다. 禘(체)는 5년마다 종묘에 지내는 여름제사이고 嘗(상)은 가을제사이다. 논어 '팔일(八佾)'편에도 '체'가 등장한다.)


이 시엔 날렵한 풍자가 숨어있다. 서구 기독교가 교리와 교회의식에 의존하고 그 종교적 일상에 매몰되어 그것이 종교행위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태도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낸 것이다. 기도는 마음이 하는 것이며, 찬송도 마음이 하는 것이며, 예배도 마음이 드리는 것이다. 마음에서 우러나 생각의 불꽃에 닿아야 그것이 하느님에게 보내는 것이요 하느님이 받는 것이요 하느님에 닿는 것이다. 신앙은 삶 전부에서 깊이 우러나와야 하는 것이며, 우러나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면에서 꾸준히 하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류영모는, 2천년 기독교 역사가 '하느님과 통한 보증수표'가 아니라, 한 개인의 생각 속에 깃든 오롯한 성령만이 하느님에 닿는 티켓이라고 여겼다. 이런 생각이, 기독교에 대한 평생의 열광이었으며 또한 평생 스스로 지키고자 했던 엄격하고 때로는 고독했던 '참 교리(敎理)'의 길이 아니었을까. 그대는 이런 신앙을 가졌는가.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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