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11) 베트남-미국 수교 25주년에 호찌민이 호명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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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 서강대 교수
입력 2020-08-17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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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 홍강 강변에서 이한우 교수]


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11) 
베트남-미국 수교 25주년에 호찌민이 호명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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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경제는 베트남 개혁·개방을 연구하는 최고 전문가인 서강대 이한우 교수의 칼럼을 연재한다. '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는 베트남의 개혁 과정을 톺아보고 분석하며 날로 확대되고 있는 한·베트남 관계에 대한 현황을 살피고 전망을 내놓을 것이다. 이한우 교수는 서강대에서 베트남 개혁정책을 주제로 정치학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서강대 동아연구소 및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로 있다. 베트남 국민경제대학 객원연구원으로도 있었다. 그는 베트남 정치경제 개혁과정을 주로 연구하고 있으며 개혁으로 인한 사회문화 변화에도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베트남 경제개혁의 정치경제>, <한국-베트남 관계 20년> 등의 책과 베트남 개혁에 관한 연구 논문을 여러 편 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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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신문 베트남넷(Vietnamnet)은 2020년 7월 13일자 한 기사 제목을 “호찌민 주석, 베-미 관계를 주동적이고 열성적으로 설립한 분”이라고 뽑았다. 베트남 언론은 7월 11일 미국과의 수교 25주년을 맞아 양국 우호관계의 공을 이렇게 호찌민에게 돌렸다. 호찌민이 베트남과 미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주동적으로 설립했다는 것인가?
 

[[베트남넷 기사 제목, “호찌민 주석, 베-미 관계를 주동적이고 열성적으로 설립한 분”. 출처: 페이스북에서 캡처]



호찌민과 미국의 만남

호찌민은 1911년 6월 5일 프랑스 여객선 아미랄 라투슈-트레뷰(Amiral Latouche-Tréville) 호를 타고 사이공 부두를 떠났다. 그가 1890년 5월생이니 스물한 살 때다. 베트남 역사가들은 호찌민의 출발을 “구국의 길”을 떠난 것으로 공식화했다. 호찌민은 태어나서 응우옌신꿍(Nguyen Sinh Cung), 11살 때부터 응우옌떳타인(Nguyen Tat Thanh)으로 불렸다. 베트남을 떠나는 배에서 주방 보조로 일하던 그는 ‘바’(Ba)로 불렸다. 호찌민은 그후 2년간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각지를 돌았다. 그 가운데 미국 땅을 밟은 것은 1912년 무렵이다. 그는 뉴욕과 보스턴 등을 방문했다. 뉴욕 맨해튼의 마천루를 보고 전차를 타고 차이나타운에도 갔었다고 한다. 모름지기 지금도 배낭여행객들이 뉴욕 여행의 기점으로 삼는 펜 스테이션(펜실베이니아 기차역)에도 갔을 것이다. 보스턴에서는 파커하우스 호텔에서 주방 보조로 일했다고 한다. 남은 기록은 없다. 이 시기 호찌민의 미국 내 행적은 상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호찌민은 미국에 왜 갔을까? 나중에 호찌민은 유럽 제국주의에 반대하여 베트남인들이 프랑스 식민체제를 정복하는 데 미국이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하지만 당시 미국은 유색인종 차별문제의 심각성을 일깨우는 외에 그에게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던 듯하다.

이후 그는 영국, 프랑스로 가 본격적 활동을 벌인다. 호찌민은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다가 1924년 소련에서 동방노력자대학의 훈련과정을 거쳐 그해 11월 광저우로 파견된다. 1925년 6월 베트남청년혁명동지회를 결성하고 혁명가들을 배출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쑨원(孫文)이 1925년 3월 사망하고 이후 국공합작이 깨지며 1927년 4월 장개석이 공산세력을 탄압하기 시작하자, 호찌민은 이를 피해 5월 광저우를 떠났다. 이후 모스크바, 파리, 브뤼셀, 태국 등지를 전전했다. 호찌민은 1929년 12월 중국 비즈니스맨 신분으로 홍콩으로 돌아갔다. 그는 1930년 2월 3일 홍콩에서 베트남공산당 결성을 주도했는데, 베트남공산당은 그해 10월 인도차이나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꿔 단다. 호찌민은 홍콩에서 활동 중 1931년 6월 체포됐고 수감생활을 하다가 풀려난 후 1934년 봄 다시 소련으로 갔다. 그는 1938년 소련을 떠나 알마아타, 우루무치, 옌안(延安)을 거쳐 광시(廣西) 지역에 도착해 활동하다가, 1941년 2월 8일 국경을 넘어 귀국한다.

호찌민과 미국의 본격적 만남은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이후에 이뤄졌다. 호찌민은 1942년 8월 중국의 지원을 얻기 위해 광시 성 징시(靖西)에 갔다가 국민당군에 잡혔고, 1943년 9월 류저우(柳州)에서 석방돼 가택연금 됐다가 1944년 3월에야 공식적으로 풀려났다. 호찌민이 1944년 8월 귀국한 후 미국과 교류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 1944년 12월 미국 정찰기가 중월 국경에서 엔진 고장으로 추락했는데, 호찌민측이 조종사를 구해준 일이 생겼다. 호찌민은 그 조종사를 데리고 중국 국경을 넘어 쿤밍에 있던 미군 항공대로 복귀시켰다. 당시 미국은 중국 남부에 전략사무국(OSS) 요원들을 파견해 놓고 있었다. OSS는 미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이다. OSS 요원이었던 찰스 펜(Charles Fenn)은 호찌민을 ‘루시어스(Lucius)’라는 암호명으로 요원 명단에 올렸다고 했다. OSS는 호찌민측에 약품과 무기를 제공했고 짧은 기간이었지만 군사훈련을 지도했다. 화남지역 정보국 소속 인도차이나 지부의 책임자 아르키메데스 패티(Archimedes L.A. Patti)는 호찌민을 중립적 인물로 평가했고 그와의 협력을 추구했다. 패티는 호찌민이 독립선언문 초안을 작성할 때 자문했던 유일한 외국인이고 호찌민이 독립을 선포하는 자리에 참석했던 몇 안 되는 외국인 중 한 사람이었다.

호찌민은 어떤 인물이길래 ‘자유주의, 자본주의’ 강국인 미국과 협력하려고 했는가? 호찌민이 사회주의자인가 단지 민족주의자인가에 대하여는 논쟁적이다. 정통 사회주의 이데올로그는 그를 수정주의자로 봤다. 스탈린이 호찌민을 사회주의 국제주의자가 아니라고 의심했다고 알려졌다. 1930년 베트남공산당이 홍콩에서 창당된 후 초기에는 정통 사회주의에 가까운 쩐푸(Tran Phu)가 당의 주도권을 쥐었다. 호찌민은 유연한 사고의 정치인이었다. 그는 1941년 5월 사회주의자와 비사회주의적 민족주의자를 포함한 민족운동단체 베트민(Viet Minh, 越盟)을 조직했다.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으로 베트남이 해방의 기회를 맞고, 호찌민을 지도자로 하여 베트민(월맹) 세력이 9월 2일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한다. 그러나 소련은 이를 합법적 정부로 승인하지 않았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새 국가를 선포한 후 1950년 1월 18일 세계에서 처음으로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승인하자, 소련은 부랴부랴 서둘러 1월 30일 베트남을 승인했다.

호찌민은 1945년 9월 2일 독립을 선포하는 바딘 광장에 미국 자동차를 타고 들어섰다. 호찌민은 미국의 독립선언을 인용하며 베트남의 독립선언을 이렇게 시작했다. “모든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평등하게 태어났다.” 그는 “모든”,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를 넣어 진정으로 모든 이가 평등하게 태어났음을 강조했다. 호찌민의 독립선언은 이어진다. “그들은 창조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그 권리다. 이 불멸의 선언은 1776년 미합중국의 독립선언문에 나오는 것이다.” 지금도 모든 베트남 공문서 상단에는 “독립, 자유, 행복”을 명기하고 있다. 이 가치들이 얼마나 실현되고 있는지는 따로 따져봐야겠지만 말이다. 기념식이 끝나고 공중에는 미국 P-38기 편대가 날아갔다. 이렇게 미국은 현대 베트남이 출범할 때 호찌민 가까이에 있었다. 만약 미국이 당시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승인했다면, 그는 “아시아의 티토”가 됐을 것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호찌민이 혁명가를 배출하기 위해 설립한 베트남청년혁명동지회. 사진@이한우 2013]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과 적대, 그리고 화해

미국이 베트남전쟁에 개입하게 된 것은 베트남의 독립전쟁인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에서 프랑스를 지원하면서부터다. 영국인 작가 그레이엄 그린이 <조용한 미국인(The Quiet American)>에서 미국의 베트남 개입 정황을 그렸다. 이 소설은 같은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중국이 1949년 10월 공산화된 후 프랑스 식민 지배가 저물어가던 1952년 베트남을 배경으로 한다. 늙은 영국인 특파원 토머스 파울러의 베트남 연인 프엉(Phuong)을 차지하기 위한 젊은 미국인 정보요원 앨든 파일과의 삼각관계를 그렸다. 그린은 그들 관계를 갈등으로 그렸지만, 당시 프랑스와 미국은 베트남을 둘러싸고 경쟁보다는 협력을 유지했다. 그린이 호찌민시의 옛 이름 사이공의 컨티넨탈 호텔에서 집필 작업을 했다니 들러볼 만하다.

강대국들이 전후 구상을 하며 미국은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폐기하고 베트남을 일정 기간 신탁통치 후 독립시킬 것을 구상했었다.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장개석의 중국이 주도적 역할을 하도록 하려고 했지만, 장개석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국은 유럽에서 프랑스의 역할을 중시하며 프랑스의 베트남에 대한 재식민지화 시도를 받아들이게 된다. 프랑스의 베트남 재식민지화 시도는 베트남과 프랑스 간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으로 이어진다. 프랑스를 지원하는 미국의 군수물자는 1950년 6월 30일 사이공 공항에 처음으로 도착했다. 중국은 공산화 직후 1950년 2월 광시 성 난닝(南寧)에 연락사무소를 두고 군수물자를 베트남으로 수송했다.

베트남은 1954년 5월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에 대승을 거뒀지만, 7월 제네바협정으로 남북으로 분단되고 말았다. 프랑스가 베트남을 떠나며 미국이 남베트남의 후원자 역할을 맡았다. 이로써 미국은 북베트남의 ‘적’이 됐고, 1964년 무렵부터 1973년 1월 파리평화협정을 맺기까지 열전을 치렀다. 남부를 무력으로 통일하는 일은 1960년 레주언(Le Duan)이 공산당 제1 비서로 선임되고 레득토(Le Duc Tho), 응우옌찌타인(Nguyen Chi Thanh) 등 강경파들이 득세하면서 실행됐다. 호찌민은 그 무렵부터 실권을 잃고 있었다. 이렇게 전쟁의 참화를 겪고 나서야 베트남은 1975년 4월 통일됐다. 우여곡절 끝에 베트남과 미국이 1995년 7월 양국 관계를 정상화한 후 25년이 흘렀다. 이제 과거의 ‘적’은 현재의 ‘친구’가 됐다. 호찌민이 미국과 협력하던 그때를 되돌아보게 된다. 미국과 협력하려던 호찌민의 의지가 이제야 실현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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