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國論어젠다] “공대를 지나 자연대의 나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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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석 과학 작가, ‘나는 과학책으로 세상을 다시 배웠다’ 저자.
입력 2020-08-17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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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석 과학작가]



고대 그리스는 자연과학의 나라였고, 로마는 공학의 나라였다. 고대 그리스인에 수학자는 무수히 많다. 아르키메데스, 피타고라스, 에우클레이데스(유클리드), 아폴리니우스, 탈레스 등등···.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다. 현대 물리학자는 또 최초의 과학자를 그리스에서 찾는다. 이탈리아 양자중력 연구자인 카를로 로벨리는 “아낙시만드로스가 자연으로 가는 문을 최초로 열었다”라고 하며(책 ‘첫번째 과학자, 아낙시만드로스’), 노벨물리학상(1988년)을 받은 리언 레더먼(미국 실험입자물리학자)은 데모크리토스를 최초의 물리학자라고 말한다(저서 ‘신의 입자’). 아낙시만드로스는 ‘지구는 우주에 떠 있는 천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떠올렸으며, 데모크리토스는 원자 개념을 제안한 바 있다.

고대 그리스의 학교가 자연과학도로 붐볐다고 말해본다면, 고대 로마에서는 공과대학이 인기를 모았다. 로마 공학도는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남긴 걸로 유명하다. 콜로세움은 로마인이 얼마나 뛰어난 엔지니어였는지를 말한다. 제국 곳곳으로 통하는 아피아 가도를 만들기도 했으며, 거대한 수도교는 현대 건축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로마는 자연과학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 스스로 그걸 인정하기도 했다. 가령 로마 정치인 키케로는 “그리스인은 기하학자를 높이 평가했다. 수학이 크게 발전했다. 하지만 우리 로마인은 측정하고 셈하는 데 유용하게 쓰는 정도로만 수학을 활용해 오고 있다”(모리스 클라인의 ‘수학사상사 1권’)고 말했다. 그리스, 그리고 그 전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개발한 수학을 갖고 응용하기만 했다는 얘기다.

후대인의 로마 수학에 대한 평가는 혹독하다. 영국 수학자-철학자인 앨프리드 화이트헤드는 “수학 도형에 관해 사색하느라 목숨을 잃은 로마인은 없었다”고 비꼬았다. 이건 그리스인 아르키메데스의 최후 순간에 빗댄 표현이다. 아르키메데스는 로마군이 쳐들어왔을 때 수학 문제를 궁리하고 있었다. 미국 수학자 모리스 클라인은 “로마인의 영향은 수학과 과학 분야에서 긍정적이기보다 부정적이었다”(책 ‘수학자가 아닌 사람들을 위한 수학’)고 평가한다. 미국 물리학자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는 “로마인이 증명한 수학 정리는 단 하나도 없다. 로마인은 추상적인 수학에 무지했다”(저서 ‘유클리드의 창’)고 말했다.

로마는 위대한 제국이었고, 제국의 연대기 속 정치와 군사, 종교 부분은 화려했다. 하지만 수학사 책은 로마 시대가 존재하지 않은 듯 건너뛰고 만다. 고대 그리스에서 바로 인도, 아랍의 수학사로 넘어간다. 실사구시만을 추구한 로마는 추상적인 사고를 발전시키지 못했다. 단 한명의 위대한 수학자도 배출하지 못했다니, 치욕적이기까지 하다.

추상적인 사고를 발전시키지 못했다는 얘기를 듣는 또 다른 제국은 중국이다. 한국, 중국과 대동소이하지 않을까 싶다. 한국은 공대의 나라다. 1960년대 후반 경제개발 시대 이후 공과대학이 급성장했다. 경북대 전자공학과는 그중에서도 특별하다. 나는 경북에서 살지 않아 그쪽 사정을 몰랐고, 이과 출신도 아니기에 대학에 가서도 ‘경대 전자과’의 명성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전설은 형태는 없어도 멀리까지 퍼지는 법.

경북대 IT대학 전자공학부 사이트에 찾아가 보니, 한 학년 정원이 800명이었던 적도 있다. 1979년이었다. 그리고 1967년 학과 출범부터 보면 그 개발 시대의 빠른 호흡이 느껴진다. 정원 30명으로 출발했다. 3년 뒤 정원이 10명이 늘어나 40명이 되었다. 또 3년이 지난 1973년에는 신입생이 120명으로 늘어났다. 1974년 ‘경대 전자과’는 또 한 번 크게 변한다. 정원이 순식간에 2.3배 늘어난 280명이 되었다. 그리고 1979년 학과 정원은 정점에 올라 800명을 찍었다.

전자공학과는 기계공학과와 함께 공대의 양대 축이었다. 삼성전자, LG전자와 같은 전자기업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면서 전자공학도가 필요했고, 대학의 전자공학과는 이에 필요한 인력을 공급하는 브레인풀이었다. 전자공학 인력이 있었기에 한국의 반도체산업이 출현할 수 있었다. 기계공학의 경제 기여도 이루 말할 수 없다.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두산중공업이 성장한 데는 그들이 있었다.

그런데 ‘경대 전자과‘의 명성은 옛날 같지 않다. 정원은 여전히 많으나 전성기에 비해서는 줄었다. 2019년 입학 기준 331명이다. 왜 줄었을까? 공대 출신 인력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옛날 같지는 않은 게 분명하다. 질적으로, 양적으로 변화가 있다.

자연대학에 비해 공대 인원이 압도적으로 많은 한국과는 풍경이 완전히 다른 나라가 있다. 영국 대학이다. 영국 맨체스터대학 물리학과 교수로 오래 근무한 서울대 물리학과 양운기 교수로부터 그곳 얘기를 들은 바 있다. 학과 1학년 정원이 250명이라고 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맨체스터대학 물리학과 사이트에 들어가서 학생 수를 확인하니, 양 교수 전언대로다. 놀랍다.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정원이 54명이다. 5배 차이가 난다. 맨체스터대학이 어떤 대학인가? 대학평가에서 세계 100위 안에 드는 명문이다.

맨체스터대학만 물리학과 학생 수가 많을까? 옥스퍼드대학이나 케임브리지대학은 어떨까? 마침, 서울시립대 물리학과 박인규 교수가 ‘물리학에 미친 나라, 옥스퍼드대학 물리학과 규모를 알아냈다‘라는 제목의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박 교수는 옥스퍼드대학 물리학과 과장에게서 확인했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옥스퍼드대학 물리학과는 전임 교수 120명, 박사급연구원(포스트닥) 180명, 엔지니어·행정직원 160명, 대학원생 400명, 학부생 760명이다. 학생 수는 말할 것도 없고, 교수 수도 한국의 서울대와 카이스트는 옥스퍼드대학 물리학과와 비교가 안 된다.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는 39명이고, 카이스트는 36명이다.

맨체스터대학, 옥스퍼드, 케임브리지는 왜 이렇게 물리학과 학생이 많을까? 양운기 교수에 따르면, 맨체스터대학 물리학과 졸업생 모두가 물리학자가 되는 게 아니다. 음악가, 예술가 등 다양한 분야로 진출한다. 물리학과에는 그런 학생을 위한 과정이 마련되어 있기도 하다.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아니 그러려면 바로 음대나 미대에 가지 왜 생뚱맞은 물리학과에 가서 학부를 마치나? 이에 대해 양 교수는 “물리학은 학문의 기초를 하는 곳이다. 과학적인 사고를 배운다. 물리학을 학부에서 공부하고, 다른 학문은 대학원에 가서 하면 된다”고 했다. 그는 또 “물리학을 공부한다는 건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영국에는 한국보다 생각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 나는 이 차이가 어떻게 나타날지 두렵다”고 말했다.

양 교수의 말 중에서 내 귀에 특히 들어왔던 건 물리학과와 공대 학생의 차이였다. 영국인은 물리학과를 가고, 제3세계에서 온 학생은 공대를 가득 채우고 있다는 것이다. 이건 뭘 말할까? 영국에 제조업이 없으니 영국인은 공과대학에 가지 않는다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영국은 제조업 국가가 아니고, 그 다음 단계의 사회로 성숙해 가고 있기에 대학이 한국과는 다른 모습이 아닐까 싶다. 거기에 맞는 사람을 대학은 길러내는 것이다.

한국은 성숙된 사회로 가고 있다. 사우디에 가서 사막에서 몸으로 때우면서 엔지니어링을 하던 시기는 지났다. 남들이 만들어놓은 기초과학지식을 갖고 반도체산업과 자동차산업, 조선업에서 지금까지 잘해 왔다. 하지만 더 이상 안 통할 거다. ‘패스트 팔로어’ 전략은 끝났고, ‘퍼스트 무버’로 가야 한다는 얘기가 나온 지 오래되었다. 공대를 키웠던 시대를 지나 자연과학 시대를 열어야 한다. 공대를 키우지 말자는 뜻이 아니다. 그동안 상대적으로 키우지 못했던 자연과학을 육성해야 한다는 말이다.

나도 대학을 진학할 때 물리학과에 가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세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 한국은 수학과 물리학, 화학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한국 경제를 이끌 새로운 산업도 기초과학에서 나오고, 과학 분야 노벨상도 나온다. 엔지니어만 대우받았던 로마식을 넘어, 자연과학도를 한국사회가 우대해야 한다. 물리학에 미친 역대급 국가로 한국이 가야 한다. ‘소부장(소재·부품·장비)'에서 일본을 극복하려면 우리가 밟아야 하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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