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경제, 7년의 찰떡공조에도 뚫리지 않는 디플레의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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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완 논설위원
입력 2020-07-22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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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민국, '디플레이션 마인드셋' 경계하라

  • 닮고싶지 않은 그대 '아베구로' 좀비경제

 [일본은행 구로다 총재, EPA·연합뉴스]



[이수완의 월드비전] 2013년 2월 하순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중앙은행인 일본은행 새 총재에 구로다 하루히코 (黑田東彦) 당시 아시아개발은행(ADB) 총재를 내정하자 월가는 그를 국제금융시장이라는 화려한 무대에 복귀하는 록스타(rock star)처럼 반겼다. 그는 공격적인 통화완화정책의 주창자이다. 1999~2003년 재무성 국제금융담당 재무관 시절 엔화 가치를 떨어뜨리기 위한 외환시장 개입을 주도하며 '엔저 투사'라는 별명까지 얻은 인물로, 아베 총리에겐 잃어버린 20년으로 불리는 일본의 '디플레이션 늪'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아베노믹스'를 국제 금융계에 설득 시키고 이해시킬 수 있는 최고의 적임자였다. 도쿄 주식 시장은 4년 5개월 만의 최고치로 폭등하며 그의 등장을 환호했다.  7년이 지난 지금 국내외 전문가들의 기대와 신뢰는 실망으로 바뀌고 있다. 잠시 깜박거리던 경제 회복의 등불은 코로나19로 다시 꺼지고 일본은행의 항로엔 어둠만 짙게 깔려있다.


아베 총리의 충직한 '소방수'

'아베구로.' 아베 총리와 10살 위인 구로다 총재(75)의 성씨를 조합한 것으로 일본의 금융완화정책을 통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아베노믹스의 핵심은 바로 '아베구로'이다. 예상대로 구로다는 아베 총리의 충직한 '소방수' 역할을 다했다. 1990년대 초반 자산버블 붕괴로 시작된 장기 물가 침체, 즉 디플레이션은 어느 정도 완화된 모습이다. 실업률도 크게 개선시켰다. 하지만 일본은행은 지속적인 통화완화정책에도 불구하고 구로다가 2013년 약속했던 2% 인플레이션 타깃에는 여전히 근접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일본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년대비 0.6%에 불과했다. 무엇보다도 기업들이 임금인상을 주저하며 가계의 소비가 늘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도 이젠 2% 인플레션 타깃에 대한 미련은 버린 듯하다. 대신 고용 확대에 포커스를 두고있다. 일본은행은 지난 4월 2022년 물가상승률이 0.4~1.0%를 기록할 것으로 공표했다. 구로다 총재의 임기인 2023년 4월까지 목표 달성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이다. 지난해 30여명의 전현직 일본은행과 정부 관계자를 인터뷰한 로이터는 일본의 통화정책 정책 결정 과정에서 구로다의 입지는 크게 약화되고 있는 반면 정부 관료들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구로다 총재 취임 이후 일본 경제는 수년 동안 여전히 침체를 벗어나지 못했다. 물가도 그대로였다. 2016년 1월 하순. 일본은행 본관 7층은 자정이 지나도록 불이 켜진 채 있었다. 9명의 금통위원에게 마이너스 금리라는 초유의 정책 도입을 설득하기 위한 회의였다. 시중은행이 중앙은행에 돈을 맡기려면 이자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불해야 하는 제도이다. 제발 기업이 은행에서 돈을 대출받아 투자 좀 해달라는 경제부양 극약 처방이었다. 이후 마이너스 금리는 5-4로 가결되었다. 이 정책의 도입은 대실패였다. 장단기 금리시장은 혼란에 휩싸이고, 의도했던 엔화 약세는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결국 시중은행의 이익만 대폭 감소시키며 '구로다노믹스'에 대한 불만은 고조되었다. 구로다 총재가 이후 계속해서 새로운 통화정책을 실험하고 있지만, 재정적자만 눈덩이처럼 늘어가고 산업경쟁력과 구조조정 등 근본문제는 그대로이다. 일본의 GDP대비 국가부채는 2018년도 무려 238%를 기록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국가 중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이러한 엄청난 국가 채무에도 불구하고 일본 국채가격이 안정을 유지하는 이유는 있다. 채권자 80~90%가 국내에 있는 일본 국민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일본 국채는 대표적인 안전자산으로 꼽힌다. 아베 총리에 대한 대단한 충성심은 인정받아, 구로다는 2018년 2월부터 임기5년의 총재직을 연임하게 된다.

일본은행의 막대한 돈풀기는 경쟁력 없는 '좀비' 기업들도 위기를 버티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기업의 생산성증가와 기업지배구조 개선 노력은 후퇴한다. 일본은행은 찍어낸 돈을 국채매입뿐 아니라 상장지수펀드(ETF)를 사들여 기업의 주가를 떠받쳤다. 은행의 대차대조표가 터무니없이 부풀려져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양적 완화, 재정지출, 구조개혁 이라는 아베노믹스 '3개의 화살'을 무기로 일본은 한때 장기불황 탈출에 대한 기대감이 고조되었다.  결과가 신통치 못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3번째 화살인 구조개혁이 이뤄지지 못하고 양적 완화와 재정지출이라는 2개의 화살만 무차별적으로 사용한 결과이다. 코로나19로 일본 경제는 가파른 내리막길을 향하고 있다. 일본은행은 2020년 회계연도 4.7% 역성장을 예고하고 있다. '4번째 화살'이라던 도쿄 올림픽마저 올해 개최는 물 건너갔다.

일본은행의 총자산은 지난 2019년 8월 31일 기준 572조엔에 달했다. 유럽중앙은행의 총자산을 뛰어넘는 세계 최대규모이다. 올해 일본은행은 '역대급' 양적 완화로 사실상 무제한 국채매입에 나서면서까지 경기 충격을 필사적으로 방어하고 있다. 현재 시장에 나온 국채의 50% 가까이 보유하고 있다. 만약 금융완화가 종료되면 금리 상승으로 일본은행의 이자비용은 크게 늘어난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갈길 잃은 외국인 투자가들이 안전자산인 일본 국채에 대한 투자를 크게 늘리는 것도 부담이다. 외국인 투자가들은 일본 국채에 장기 투자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여차해서 한꺼번에 썰물처럼 빠져나간다면 세계 금융시장의 충격파는 불가피하다. 2013년 구로다 총재 취임 당시 GDP의 30% 수준이던 일본은행의 총자산은 이제 5조 달러 규모인 일본 GDP를 초과했다. 총자산이 GDP 대비 20% 인 미국의 연준(FRB), 40%인 유럽중앙은행(ECB)과 비교해 막대한 규모이다. 그렇다고 금융완화를 멈출 수도 없는 상황이다. 다른 세계 주요 중앙은행들도 코로나19로 인한 경기침체를 막기 위해 막대한 돈을 뿌리고 있는 상황인지라 더욱 그렇다.



세계경제의 퍼즐.. 일본화(Japanification)

세계 4대 중앙은행(미국 FRB, 유럽 ECB, 일본 BOJ, 영국 BOE)가 올해 상반기 투입한 유동성은 22조 달러 규모로 미국 GDP 규모와 맞먹는다. 대규모로 돈을 풀면 생산이 늘고 소비가 되살아나 물가 상승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일본은 그렇지 못한 게 세계 경제의 오랜 퍼즐이다. 미국과 유럽까지 전례없는 수준의 돈풀기에 나선 가운데 일본화(Japanification)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돈을 아무리 풀어도 저성장·디플레이션이 지속되고 부채만 크게 증가하는 미래의 모습은 세계 경제의 악몽이기 때문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 연준의 '헬리콥터' 돈풀기는 자금이 부동산과 주식시장으로 흘러 결국 가진 자들의 부를 더욱 늘려놓고 말았다. 일본의 경우도 부의 양극화는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고도 경제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이웃 중국과의 경쟁이 심화되면서 초조한 일본 기업들은 근로자 임금 인상에 소극적이다. 풀린 돈은 부동산과 주식을 소유한 부자들과 기업들의 자산규모만 키우고 있다. 포브스에 따르면, 일본 기업들의 현금보유는 4.5조 달러까지 늘었다. 일본 GDP의 89%이다.

코로나19 이후 아베 정권은 GDP의 40%인 2조 달러가 넘는 규모의 소비 부양 패키지를 내놓았다. 단기적으로 경기 급랭을 막을 수 있겠지만, 생산성 제고 등 일본의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데는 한계가 있다. 아베노믹스의 3번째 화살인 혁신과 구조개혁에서 성과가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스타트업 창업 열기는 미약하고 기업주들은 근로자 임금인상보다는 현금싸놓기에 바쁘다. 코로나19로 급한 불을 꺼야 하는 상황인데 그동안의 지속적인 유동성 확대는 독이 되고 있다. 일본이 너무 일찍, 너무 많이, 너무 오래 돈을 풀어 이번과 같은 대형위기에 대응할 카드를 소진해 버렸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지난 4월 27~28일 구로다 총재는 금융정책 회의를 주재하고 추가적인 금융조치로 국채매입 상한 한도를 없앴다. 기업어음(CP)과 회시채 구입 상한액도 3배로 늘리겠다고 했다. 전달 ETF 매입 목표액을 두 배로 늘린 데 이은 추가 조치이다.

디플레이션은 통상 시중에 유통되는 돈이 부족해서 생기는 현상이다. 디플레이션과 싸우기 위해 20년 가까이 돈을 풀고 있는 일본의 문제는 화폐의 유통량이 아니다. 돈이 미래 투자를 위해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업이나 가계 모두 5~10년 후 경제가 더 나아질 것이라는 자신감이 결여된 상태이다.  미래 투자를 위한 대출과 투자가 기대만큼 늘지 않으면서 일본은행의 무력감만 커지고 있다. 문제는 수익은 안 나지만 빌린 돈으로 이자를 갚고 명맥을 유지하는 좀비기업만 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일본 경제의 상당부분이 좀비화(zombie-fication) 될 것이라고 포브스는 경고했다. 일본은행은 최근 디지털화폐(CBDC)의 실증실험에 나서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탈(脫)달러를 지향하는 중국이 디지털 위안화 도입에 속도를 내자 긴장한 일본은행의 의례적인 반응으로 보긴 힘들다. 잦은 자연재해 때문에 현금을 은행에 맡기는 대신 직접 보유를 선호하는 일본인들이 많은 현실에서, 디지털 엔화 도입은 일본의 만성적인 디플레이션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일 것이다.

대한민국, '디플레이션 마인드셋' 경계하라

일본처럼 저성장, 저출산, 고령화 모드에 진입하는 한국도 가계 기업 정부의 부채가 급증하고 있다. 무려 3차례 코로나19 추경으로 59조원의 자금이 투입된다. GDP 대비 국가채무도 작년도 38.1%에서 올해 43.5% 수준으로 급등할 전망이다. 기업들도 빚이 눈덩이처럼 늘어나고 있다. 특히 대기업보다 코로나19 위기 대응력이 약한 중소기업들의 부채 증가세는 확연하다. 신용위험지수는 글로벌금융위기 이후 가장 높은 최고 수준에 달하고 있다. 가계부채도 소득 증가에 비해 훨씬 빨리 증가하고 있다. 일본의 경험은 기업이 ATM기기에서 마구 돈을 빼쓰게 한다고 해서 경기가 살아나거나 경쟁력이 높아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일본처럼 저성장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살릴 수 있는 기업은 과감하게 살리되 경쟁력 없는 부실 기업은 구조조정을 통해 신속하게 도태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좀비기업은 신성장 사업 육성을 가로막아 자원배분의 비효율성만 커지기 때문이다. 특히 재정건전성과 부채증가속도를 고려한 재정운용이 필요하다. 피치 등 세계적인 신용평가회사는 세계 각국이 돈 풀기로 재정적자가 늘어나자 신용등급을 무더기로 강등시키고 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부채 관리를 위한 한국 경제의 기초 체력은 현저히 떨어지고 있다. 시중에 풀린 막대한 유동성이 부동산이나 주식투자보다는 미래 세대를 위한 과감한 기업 투자로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미래를 선도하는 기업을 많이 키워낸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경제위기를 맞이하여 선거와 표를 의식해 돈만 풀고 적절한 정책을 펼치지 못한다면 일본처럼 저성장의 늪에 빠질 위험은 커질 것이다. 

외국인 투자가들에게 한국의 임금, 노조, 규제는 3대 걸림돌이 되고 있다. 특히 최저임금 인상, 주52시간 근무제, 공공부문의 일률적 정규직화 등 노동시장의 구조적인 문제는 그들의 발길을 다른 나라로 돌리게 한다. 규제혁신도 말뿐이다. 정부는 반(反)기업 또는 반(反)부자 정서를 완화시키고 ‘투자하기 좋은 환경,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기업도 '하면 된다'는 정신으로 재무장하고 초격차를 실현하는 일류기업이 되도록 밤낮으로 뛰어야 살아남는다. 그렇지 못하고 일본의 '디플레이션 마인드셋'이 우리 마음속으로 전이된다면 한국의 미래는 없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산업화를 이루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나라의 하나이다. 발전은 그냥 저절로 얻는 것이 아니다. 땀방울과 강력한 의지 그리고 차별화된 전략과 비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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