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왕년의 '곤조'는 다 죽었나

노다니엘 아시아리스크모니터(주) 대표입력 : 2020-05-21 18:16
[노다니엘의 일본 풍경화] (10)

[노다니엘]

[노다니엘의 일본 풍경화] 일본인의 곤조


우리말에서 일본 어휘를 없애려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그래도 우리의 언어생활에는 일본에서 유래하는 어휘가 많다. 매일 먹는 빵이나 가방이 그 예다. 둘다 일본을 거쳐 한반도에 들어온 외래어로 빵은 포르투갈의 pão이고, 가방은 네덜란드의 어휘 kabas가 일본에 들어와 kaban이 된 것이다. 근대화 이전에 서양의 문물이 동양에 융화되는 서세동점(西勢東漸)에 뿌리를 두는 외래어 이외에도 한자로 된 일본 어휘가 오늘날에도 한국을 활보하는 것이 많다.

곤조가 한 예이다. 일본의 국어사전은 곤조(根性)를 ‘한 사람이 본래적으로 가지는 성질’ 정도로 정의하고 있다. 한자 그대로 한 인격체의 뿌리에 해당하는 성질이다. 일본인의 심리적 특징을 요약하는 어휘로 섬나라근성(島国根性, 시마구니곤조)이라는 말이 쓰인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 곤조라는 표현이 다소 다른 뉘앙스를 가진다. 성질이나 뗑깡을 부리는 모양을 나타낼 때 쓰인다. 한국해병대의 ‘공식군가’라는 ‘브라보해병’ (일명, ‘곤조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들어있다. “오늘은 어디가서 깽판을 놓고, 내일은 어디가서 신세를 지나.”

서론이 길어졌지만, 일본인의 곤조는 다 어디로 갔는가? 코로나사태 대응에 실패를 하거나, 오키나와 주둔 미군이 성범죄를 저지르거나 하는 사태가 있어도 대학생이나 시민이 동경 한복판에서 데모를 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에서 트럼프가 주한미군주둔비용을 더 내라고 한다고 대학생들이 미대사관저 담을 넘는 곤조를 부리는 게 아닌가? 그러나 일본인의 곤조가 다 죽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역사 속에는 일본인의 곤조가 대형사건을 만든 예들이 있다. 내 마음속에는 세개의 풍경화가 떠오른다.

풍경화 #1: 시마바라의 난

한자를 공유하는 일본에서는 쓰이고 한국에서는 안 쓰이는 말 중의 하나가 잇키(一揆)이다. 일미동심(一味同心)이라고 하는 일체화된 연대정신을 공유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과 그 집단의 무장봉기를 가리킨다. 일본역사연표를 보면 잇키의 숫자가 많다. 따라서 일본인들이 권력에 순종하고 반항하지 않는다는 이미지는 전후에 국한되는 것일지 모른다.

수많은 잇키 중에서 가장 크고 의미가 깊은 것을 하나 고르라면 시마바라의 반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은 민중이 기득권에 대항하여 들고 일어났다는 것 이외에도, 그 원인이 서양종교에 대한 신앙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리스도 교도를 가리키는 ‘기리스탄’은 포르투갈말로 cristão이다. 15세기 전국시대에 이미 일본에는 그리스도교가 전래했는데, 당시에는 범선으로 항해를 가장 왕성하게 한 포르투갈이 주된 역할을 하였다. (이때에 난파한 포르투갈의 선박에서 철포가 일본에 전래하고, 철포로 무장한 일본의 사무라이가 조선반도의 활과 칼을 쓰는 병사보다 우위에 서게 되기도 한다).

에도시대로 들어와 1637년 경에 에도의 사무라이정부가 기리스탄을 탄압하고 가혹한 양의 공물을 요구하자 서양의 범선이 가장 많이 들어왔던 지금의 나가사키현의 시마바라(島原)와 구마모토현의 아마쿠사(天草)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이 난의 최선봉에 섰던 것이 불과 16세의 마스다 시로(益田四郎)라는 소년이었다. 이들은 시마바라 성을 점령하고 약 3만7000명이 정부군에 저항하다가 대부분이 살해된다.

풍경화 #2:

일본의 시민층 또는 기층민이 권력에 대항한 또 하나의 풍경을 고르라면 나는 주저없이 ‘니니로쿠사건’ (2·26사건)을 꼽는다. 1936년 2월 26일, 일본 육군의 보수적 파벌 중 하나인 황도파의 영향을 받은 청년장교들과 1483명의 하사관병들이 부패한 정치가들과 재계인사들을 징치하겠다고 쿠데타를 결행한다. 눈이 오는 날, 그들은 동경 중추를 일시 점령하고 총리관저, 경시청, NHK 그 밖의 기관을 습격하여 요인을 살해하였다. 수상 오카다는 처남이 오인되어 사살되었지만 재무대신 다카하시를 포함한 여러명의 고위정치가들이 살해되었다.

쿠데타를 일으킨 청년 장교들은 극우성향의 지식인 기타 잇키(北一輝) 등의 영향을 받아 정당이나 재벌을 배제하고 천황의 친정 아래 군이 정치의 실권을 잡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항하여 군의 주류인 통제파는 천황의 지시에 따라 진압에 나섰고 며칠 사이에 반군은 항복했다. 일부는 자결하고 일부는 투항하여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당시 반란 가담자들은 재판을 통해 사형 등의 처벌을 받았는데, 순수 파시스트라고 불리던 유일한 민간인 반란 가담자였던 기타 잇키도 처형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반란은 진압됐지만 이 사건은 일본의 우경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군부에서는 일부 광신적인 경향의 황도파가 힘을 잃고, 통제파 군인들이 관료, 정계, 재계 상층부와 연계하게 된다. 이로써 군이 정치를 움직이는 체제가 형성된다. 이보다 4년 전인 1932년에 있었던 5·15 군부쿠데타로 인해 이미 정당정치는 실질적으로 끝났지만, 2·26 사건은 군이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일본식 군부 파시즘을 성립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군부는 만주와 몽골 문제의 해결을 위해 중국정부를 응징해야 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1937년에 노구교사건을 계기로 중국과의 전면전에 돌입한다.

 

[2.26 사건] 




풍경화 #3: 안보투쟁

1951년 9월 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제2차 세계대전의 연합국 47개국과 일본 사이에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이 체결되면서 약 6년 반 동안 일본을 통치해 온 연합군 최고사령부(GHQ)가 철수함과 동시에 일본국 정부에 행정권이 이양되고, 일본에 주둔하던 외국군도 모두 철수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 세계적인 차원에서 냉전은 형성되어 있었고, 일본의 요시다 내각은 미·일안전보장조약을 체결하면서 미군이 계속 일본에 주둔할 수 있게 한다. 이로써 1960년 1월 19일에 새로운 미·일상호방위조약이 조인되었다. 이때 일본 국민들 사이에는 전쟁에 대한 근본적인 거부감이 있었고, 여기에 태평양전쟁을 주도한 정치가들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과 미군주둔에 반발하는 반미감정이 겹치며 안보 조약에 대한 반대 여론이 강해진다. 이를 틈타 좌익의 일본사회당과 일본공산당은 지지자들을 총동원하며 시위를 펼친다.

1960년 5월 19일에 중의원에서 새 조약안이 통과되자 "민주주의 파괴 행위"라며 일반 시민들도 조약 반대 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했고, 연일 국회의사당 주위를 시위대가 에워싸는 등 사태가 점차 격화일로로 치닫게 된다. 6월 10일에는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일본 방문 일정 협의차 하네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시위대에 의해 관용 차량이 포위되고, 미국 해병대의 헬리콥터를 이용해 총리대신 관저로 이동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6월 15일,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서 국회 내부로 진입하려는 시위대와 이를 막으려는 경찰이 충돌하여 시위 참가자이자 도쿄대학 학생인 간바 미치코(樺美智子)가 압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동경대학 문학부 4학년이던 간바는 그날 580만명이 동원된 안보개정저지 제2차 데모에 참가한다. 간바를 비롯한 4000명이 국회를 점거하고 경찰과 충돌이 반복되는 와중에 간바는 사망했다. 향년 22세. 흉부압박으로 인한 질식사였다. 그녀가 죽은 후, 그녀의 묘비에 새겨진 '최후에'라는 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누군가가 나를 비웃는다
저기서도 여기서도
나를 비웃는다
그래도 괜찮아
나는 내 길을 가니까

간바 미치코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분노한 일부 학생들이 경찰차에 방화하는 등 과격 양상으로 번졌다. 최종적으로 이날 시위에는 주최측 추산 약 33만명, 경찰 추산 약 13만명이 참가하였다. 안보투쟁은 기시 노부스케 내각이 물러나게 할 정도로 일본 정계에 압박을 주었고, 자민당 정권은 경제발전정책에 우선순위를 두며 국정운영 방향을 바꾸었다. 하지만 안보투쟁과 1969년에 전공투(全学共闘会議)라는 극렬한 학생운동 세력이 동경대의 야스다강당을 점거하는 사건 이후에는 시민들이 사회개혁에 큰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1960년 6월 15일, 국회 의사당 정문 앞에서 국회 내부로 진입하려는 시위대]




전후 일본의 ‘평화치매’

1970년 이후 일본사회에서는 이렇다 할 대규모의 시민저항이나 운동이 없다. 좋게 보면 평화로운 것이고, 비판적으로 보면 시민사회가 자민당의 장기집권 속에서 안주하거나 길들여진 것이다. 이러한 소극적인 면에서의 평화 내지는 안정을 평화치매(平和ボケ)라고 부른다. 전쟁이나 안전보장에 관한 자국을 둘러싼 현상이나 세계정세를 정확히 파악하려고 하지 않고, 평화로운 일상이 계속된다는 환상을 품는 것, 혹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평화롭다고 생각해, 주위의 현실에 관심을 가지려고 하지 않는 것 등을 의미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전후 일본정치에서, 헌법 전문과 제9조로 상징되는 비무장주의와 국제협조주의, 나아가서 그러한 정향의 토양으로서 미국에 대한 의존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런데 최근에는 정치에서 현실과 동떨어진 평화주의자(비둘기파)나 안보에 무관심한 사람들을 비판하거나, 반대로 비판받은 쪽이 무턱대고 군사력에 의지해 대외 강경론을 주창하는 사람들(매파)을 비판할 때 야유로 쓰이기도 한다. 결국, 일본인을 비웃는 말인 이 평화치매를 가장 많이 애용하는 사람들은 정치가들이다. 중국의 대두, 북한의 미사일발사, 한국과의 갈등을 두고 일본이 평화치매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우파의 현실주의자가 있는가 하면, 미국과 자민당 정치가에 기대어 국가를 위하여 아무것도 안한다고 주장하는 좌파 사람들도 있다.

어느 쪽이 맞건 간에, 위에서 본 풍경화 세개와 오늘의 일본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외부에서 한국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한국이 격동하는 소용돌이와 같다고 한다. 그 반면에 한국에서 보는 일본은 고인물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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