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37)]'북한산 톨스토이' 류영모와 '질투'의 최진실

이상국 논설실장입력 : 2020-04-13 13:39
고통과 쾌감은 결국 같은 맛이다

[1992년 방영한 MBC 미니시리즈 '질투'의 한 장면. 고인이 된 최진실이 구기동 현대빌라를 무대로 열연했다. ]

 

[1992년 방영한 MBC 미니시리즈 '질투'의 한 장면.]



최진실이 열연하던 그곳이, 류영모의 뇌곡산장

혹시 1992년 여름(6~7월)에 히트한 MBC 미니시리즈 '질투'를 기억하는가. 남녀 친구의 우정과 사랑 사이에 일어나는 미묘한 감정을 다룬 스토리로 큰 인기를 얻었던 드라마였다. 당시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연기자 최수종과 최진실이 주연을 맡았다. 언론에선 이 드라마의 인기비결을 분석하며 "파라솔 밑에서 마시는 톡 쏘는 사이다 맛"(1992년 7월 2일자 동아일보)이라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최진실과 최수종은 그해 그 방송사의 연기대상 최우수상을 나란히 받았다. 최진실이 열연한 유하경과 김창숙이 맡은 엄마 정성희가 살고 있는 극중의 무대는 서울 구기동 현대빌라다.

구기터널 근처에 있는 구기동 현대빌라는 류영모가 살던 집과 과수원이 있던 자리다. 1936년 아버지가 경영하던 솜공장(경성제면소)을 팔고 종로구 사직공원 근처의 적선동 집도 매각한 46세의 가장(家長)은 당시 겨우 10가구 정도가 살고 있던 구기리로 들어갔다. 1933년 부친 류명근을 여읜 류영모는 3년상을 치렀다. 탈상을 한 뒤 그는 부친이 남긴 가산을 정리하여 오래전부터 꿈꾸어온 귀농을 감행한 것이다. '가나안 복지(福地, 신이 약속한 땅)'로 찾아낸 곳이 구기리 150번지(당시 고양군 은평면 소속)였다.

류영모는 구기리(舊基里, 옛터마을) 일대의 다섯 필지 임야를 샀다. 한 필지가 수천평씩 되는 넓은 구릉지였다. 너무 넓은 땅이라 모두 자경(自耕)하는 건 어려웠기에 두 필지만 쓰고 나머지는 다른 이에게 맡겼다. 거기에 기와집이 한 채 있었는데 이곳을 살림집으로 삼았다. 류영모가 이사 오던 시절엔 자하문을 넘어서면 세검, 구기, 평창 일대를 다 합쳐도 500가구가 되지 않았다. 하루 종일 사람보기가 어려운 '오지'였다. 지금은 입추의 여지 없는 번화가가 되었기에 상상하기도 어려운 풍경이다.

류영모가 '자연인'처럼 한가로이 거닐던 그곳을, 최진실이 친구에 대한 묘한 감정을 추스르며 다시 걷고 있는 장면을 떠올리면 아련한 감회가 일어난다. 한때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으며 '만인의 연인'으로 살았으나 그 인기가 뒤집혀 그를 찌르는 비수가 되었고 결국 안타깝게 비극적인 종언을 맞은 배우. 그를 생각하면,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을 하게 된다. 전성기 때인 24세 최진실이 현대빌라를 오갈 무렵, 그는 이곳이 반세기 전에 46세 류영모가 자신이 지니고 있던 세속적 이익을 위한 것들을 다 정리하고 땀흘리는 성자의 삶을 살기 위해 삽과 호미를 들었던 자리임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역사는 이렇게 말없이 의미심장한 우연을 감추며 돌고도는 것인지도 모른다.

 

[구기리 집 앞에서 류영모와 부인 김효정.]



먹거리 생산 농부가 '예수'다

중년의 류영모는 아내와 세 아들 그리고 막내딸을 데리고 구기리 산동네에 들어왔다. 아들은 의상이 19세, 자상이 17세, 각상이 15세였고 딸 월상은 10세였다. 농사 기술에 익숙하지 못했던 류영모는 일꾼 성백용을 고용해 함께 일했다. 이웃에 사는 젊은이 이상웅도 이들을 도와주었다.

자두·감·복숭아·산능금·앵두나무를 심어 과수원을 만들었고, 감자·고구마·토마토·참외·수박·무·배추로 채소밭을 일궜다. 젖소·산양·닭·토끼·돼지와 같은 가축도 키웠다. 10대의 아이들은 모두 농사일을 거들었다. 류영모는 그가 새롭게 들어앉을 자리를 찾은 뒤 이를 '복거(卜居)'라고 했다. 복거는 동양의 풍수지리를 바탕으로 한 개념이지만, 류영모는 톨스토이처럼 '이마에 땀 흘리며 사는' 도덕적 삶의 실천장으로 여겼다.

구기리는 북한산맥의 흐름을 타고 맥(脈)이 펼쳐져 널찍한 자리를 만들고 있어 주거지로 좋은 지세였다. 뒷산이 수려하고 청명했다. 물길이 굽이쳐 흘러 밭을 일구기에도 좋았다. 그 밖의 것들은 류영모에게 굳이 필요할 것이 없었다. 그가 농사를 지으려는 것은 먹거리를 생산하는 농부야말로 '예수'와 같은 존재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농업'은 경건한 신앙행위와도 닮아 있었고, 또한 굶주린 백성들이 사는 나라를 위한 자기윤리적인 선택이기도 했다. 자연 속에서 생산 노동을 하면서 영성을 추구하는 그는 '북한산 계곡의 톨스토이'였고 '구기리의 은자'였다. 제자 김교신은 은거하는 스승을 찾아와 고구마 싹을 구하기도 했고, 양정학교 학생(조성빈)을 보내서 농사를 배우게도 했다.

1939년 자하문 밖 홍지리 40번지(지금의 상명대 부근)에 근 30년 전에 함께 동료로 지냈던 반가운 사람이 이사를 온다. 오산학교에서 만났던 춘원 이광수다. 류영모는 이 소식을 듣고 이광수의 집으로 인사를 간다. 1910년 18세이던 이광수는 47세가 되어 있었고, 20세이던 류영모는 49세가 되어 있었다.

그날(5월5일) 이광수의 일기에는 류영모가 방문해 노자 도덕경 67장에 대해 얘기했다고 적어놓고 있다. 我有三寶 持而保之 一曰慈 二曰儉 三曰不敢爲天下先(아유삼보 지이보지 일왈자 이왈검 삼왈불감위천하선). "내게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서 그것을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이고, 둘째는 덜 씀이고, 셋째는 구태여 세상에 먼저 되지 아니함입니다." 아마도 이광수가 시골생활을 잘 하는 비결에 대해 물었을 것이고, 그에 대해 류영모가 도덕경을 인용해 넉넉한 마음과 아끼는 마음 그리고 겸허한 마음이면 충분하다고 답을 했을 것이다. 류영모가 구기리에 들어온 뒤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춘원 이광수(1892~1950)]


'북한산인' 류영모와 이웃이 된 이광수

일주일 뒤(5월 12일) 류영모의 맏아들 의상이 이광수를 구기리 집으로 초대하는 편지를 보냈다. "모란이 활짝 피었으니 오셔서 함께 보시기를 (아버님이) 바라고 계십니다." 이날 이광수의 일기를 보면, 지금 현대빌라가 있는 그곳이 '장아사'라는 절이 있던 자리였으며 류영모의 집은 절터 부근에 지은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광수는 이렇게 적어놓았다. "이슬과 참새와 함께 가다. 장아사 법당터의 두 느티나무 신록이 아침햇살에 비친 미관은 말로 할 수 없었다. 경내에 들어서니 모란의 화향이 풍겼는데 수십 그루의 모란이 활짝 피어 있었다. 의상군의 편지에는 지난 밤 비로 꽃들이 상하였다고 하나 그래도 좋았다."

류영모는 모란을 보면서 "이 꽃은 중국적이야, 홍백지에 복(福)자를 써놓은 것 같지"라고 말했다. 이광수는 "그래도 빛깔이나 향기가 동양적이고 한국적이라서 좋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북한산인', '비봉거사'.
구기리의 '농부' 류영모는 이런 호칭을 듣고 살았다. 은자(隱者)의 삶을 택한 그에겐 자연스러운 별명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나타나려고 하지 않고 숨는 게 좋습니다. 숨을수록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더 높이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지요. 위로 오르려는 사람은 깊이 숨어야 합니다. 숨음은 준비하고 훈련하는 일입니다."

은자(hermit)라는 말은 그리스어 erēmitēs에서 유래하는데, '사막에 사는 사람'을 뜻한다. 3세기 이집트나 팔레스타인의 사막에서 고독한 수행을 행하는 에레미테스가 등장한다. 이것이 초기 기독교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가혹한 자연조건을 구태여 선택해 약간의 먹고 마실 것과 최소한의 의복만으로 살았다. 생명을 위협할 만큼의 극단적 금욕고행을 견디며 구도의 수행과 명상을 했다. 이집트의 은자들은 그리스 정교에 수용되어 '황야의 외치는 자'를 선지자와 예언자로 인정하게 된다. 유럽의 수도원제는 은자의 삶을 집단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숨을수록 높이 올라간다'는 류영모의 말은 그의 은둔에 대한 뚜렷한 종교적 인식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고행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았고, 땀을 흘리며 사는 인간의 투철한 신앙윤리를 추구했던 것 같다.

류영모는 구기리 은거시절의 자기인식을 '가련자비(可憐自卑)'라는 시로 남겨놓았다. 제목의 의미는 '가히 연민을 느껴 스스로 낮춤'이란 뜻도 되지만, '가린 자(隱者)의 몸낮춘 생활'이나 '가린 자의 돌없는 비(碑)'를 의미할 수도 있다.

自下門博人 紫霞門外生 ('자하문박'인 자하문외생)
陽止所居處 陰直以己行 ('양지소거'처 '음직이기'행)

어머니 하문(下門)에서 바깥 너른 세상에 떨어진 사람(육신)
자하문 밖에서 살고 있다네
양지 속에 거처를 정하고(해가 지면 집안에 들어가고)
움직이기로 수행한다네(그늘이 내리면 몸을 움직인다네)

이광수 "선생의 도덕경 강의를 듣고 싶습니다"

대문에는 "참을 찾고자 하는 이는 문을 두드리시오'라는 글을 써붙여 놓았다. 참을 찾음은 삶의 진리를 찾는 구도(求道)를 의미하고, 뒷말은 마태복음 7장 7절의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려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petite et dabitur vobis quaerite et invenietis pulsate et aperietur vobis)'라는 구절을 자신과 방문객에게 환기한 말일 것이다.

이웃동네 이광수에게 류영모는 젖소에서 짠 우유를 보냈다. 이광수는 긴 편지로 답장을 했다.

"우유를 베풀어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우와 같이 병약한 사람에게 우유는 좋은 식량이온데, 시장에 파는 것이 늘 만족하지 못했는데 보내주신 것을 먹어보니 참으로 진짜 우유(駝酪·타락)의 맛이 느껴집니다. 시장에 나온 제품은 비록 순수우유라 하지만 크림을 안 걷어낸 걸 기대할 수 없고 끓여 소독하여 단백질이 굳어지는 걸 면할 수 없으며 사료를 싼 것을 써서 영양도 풍부하기를 기대할 수 없는데, 보내주신 우유와 비교하면 색깔과 윤기·농도·풍미가 탈지우유인 것처럼 희멀겋습니다. 아드님 말씀이 선생은 우유를 숭늉이나 김치처럼 상용하였다 하니 진실로 명언입니다. 만일 선생께서 집에서 쓰시고 아직도 남은 것이 있으면 저의 아이들을 위해 1리터라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드리는 돈 12원은 젖소 먹이값에 보태시고 매일 우유를 가지고 오는 사람의 신발값으로 적당히 써 주십시오. 아드님으로부터 들으니 전번에 송아지가 났다 하는데 여러 중생에게 단 젖을 공급할 귀중한 사명으로 세상에 나온 손님이라 잘 자라기를 바랍니다. 소나기 오는 것을 보고 놀라서 우유그릇을 엎었다는 아드님 말을 듣고 웃었습니다. '장자'에 눈동자가 새로난 송아지 눈동자 같다(瞳焉 若初生之犢, 동언 약초생지독)는 글귀가 연상되어 그 송아지 한 번 보고 싶습니다. 날이 좀 따뜻해지면 지팡이를 끌고 선생을 찾아 오래 막혔던 회포도 풀 겸 선생의 도덕경 강의도 듣고 싶습니다. 내내 도안(道安)하시기를 빌며, 이광수 배."

해방 이후 류영모는 이광수에 대해 물으면 말을 아꼈다. 옛벗의 허물을 굳이 꺼내기 싫어서였을 것이다. 자꾸 채근하면 "재주있는 사람이지요"라고 답하고는 다시 입을 닫았다. 류영모 일기 중에는 춘원의 소설을 언급하는 대목이 한 군데 등장한다고 한다. 그의 재능을 아꼈고 소설을 찾아 읽었던 옛 시절의 자취이리라.

류영모에게 40대는 부친을 비롯해 한 세대 앞선 어른들을 보내며 생사에 대해 깊이 성찰하던 시절이었다. 그가 산중생활을 결행한 것도 그런 내면의 반영이었다. 1937년 김정식이 가고 1939년 문일평이 간 뒤 "주검의 사열 행진을 보는 것 같았다"고 당시를 술회했다. 죽음의 불기둥과 구름기둥에 포위된 자신을 발견했다. 그는 '마지막 혹(惑)'이라는 시를 썼다. "다 아니다 다 죽는다 빈탕(허공)이 한데이다/다 아니다 다 죽는다 오직 하나 그만이다/줄곧 왼 한 고디(貞) 말씀 그만이다" 필멸의 존재와 빈탕의 오직 하나. 죽음에 대한 그의 생각은 단호해져 갔다.

51세때 사다리에서 낙마 부상

류영모는 이렇게 설명했다. "우주가 생기기 전에도 하느님 한분이 계셨고 우주가 생긴 뒤에도 하느님 한분이 계시고 우주가 없어진 뒤에도 하느님 한분이 계신다. 모든 상대적 존재는 하느님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나도 하느님의 한 부분이다. 나의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다."

1941년 8월 5일 류영모는 집 옆의 아카시아나무 가지를 삼각사다리에 올라가 자르다가 떨어져 허리뼈를 크게 다쳤다. 2주일간 병상에 누워 지내야 했다. 이때 그는 죽음이 고통이 아니라 좋은 맛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고통을 쾌감으로 여기는 것과 쾌감을 고통으로 여기는 것. 이것이 죽음에 대한 오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고통과 쾌감은 실은 한맛이다. "몸이란 마침내 큰 짐이요, 감옥이요, 못된 장난이다." 그의 50대는 이런 생각과 함께 깊어지고 있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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