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낙안읍성에 가보니...조선시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석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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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호 기자
입력 2020-01-28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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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가집 98가구에 2백여명 거주 순천시 지원받아

  • 사시사철 전형적인 시골풍경 관광객 연 백만명

  • 이순신 장군이 심은 장군목 건재 '수학여행 성지'

 

낙안읍성의 봄 풍경. 단정하게 쌓은 석성의 모습이 이채롭다.[사진=순천시 제공]



“신기해요. 글쎄 오래된 성(城) 안에 사람들이 정말 살고 있잖아요. 어떻게 사는지도 궁금했어요” 서울에서 고등학생 두 딸과 함께 낙안읍성에 온 김미성 씨(52)는 궁금증이 풀렸다며 활짝 웃었다.

낙안읍성의 핵심을 짚었다. 대개 城이라고 하면 덜렁 성문이나 성터만 남아 있기 일쑤다. 그런데 이곳은 빙 둘러 성곽이 있고 성안에 주민들이 실제로 살고 있다. 행정구역으로 순천시 낙안읍이다. 과거와 현재가 한자리에 있는 듯한 특이한 모습이다. 물론 그동안 순천시가 손질하고 다듬었지만 사시사철 옛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 대표 민속마을이자 국가지정문화재다. 사적 제302호로 지정됐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도 등재돼 세계적으로도 주목을 받고 있다.

 

낙안읍성 가을 풍경[사진=순천시 제공 ]



면적은 22만3100㎡로 축구장 31개 넓이다. 98세대 228명이 살고 있다. 석성 길이는 1.4㎞이고 성곽 위 도로폭이 3미터 정도여서 넉넉하게 산책할 수 있다.
현지에 30톤의 고인돌이 놓여 있는 점으로 미뤄볼 때 선사시대부터 마을이 이뤄졌다고 여겨진다.
성 주변에는 열악산,도봉산,백의산 등 5개 산이 둘러싸고 있다. 읍성은 평탄한 분지 모양이어서 평온한 느낌이 든다. 사람이 살기가 좋은 곳이다.
민가 뿐 아니라 당시 수령이 행정 업무를 하던 관청이 있고. 귀빈과 사신이 숙식하는 객사가 있다. 또 수령의 가족이 사는 안채, 내아가 있고 감옥인 옥사까지 갖췄다. 완벽한 자치단체 모습이다.


 

낙안읍성 겨울 풍경. [사진=순천시 제공 ]



수학여행 성지

대부분 I자형 아담한 초가집이다. 60대 이상 시골 출신이라면 돌담에 초가집인 고향마을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고향에 온 듯 착각할 정도다. 골목길이 넓고 흙길이 아닌 점이 다를 뿐. 초가집은 지난 가을에 이엉을 이어 새롭고 다정하다. 집집마다 뒤 안 텃밭이 있고 잎이 두터운 시금치 같은 채소가 심어져 있었다. 아마 반찬거리를 여기서 충당할 듯하다.
고샅에는 군데군데 감나무, 은행나무가 있다. 영락없는 시골 풍경이다. 그러니 어린 학생들에게는 얼마나 신기할까. 동행한 박다인 낙안읍성 문화해설사는 이곳이 ‘수학여행 성지’라고 했다. 봄과 여름방학, 가을에 전국의 많은 학생들이 여행을 오는 바람에 하루 종일 바글바글하다고 한다.
실제로 작년 1년 동안 이곳을 찾은 관람객이 97만 명이다. 입장료를 받고 있어서 정확한 수치다.

주민들 어떻게 사나

순천시가 집 크기에 따라 1년에 500~600만원을 지원하고 있어서 주민들은 이 돈으로 생활비를 하고 지붕 이엉을 잇는다.
읍성 안 토지는 70%가 국공유재산이고 사유재산은 30%다.
국가가 민속문화재로 9세대를 지정해 관리하기 때문에 주민들은 관리비 안들이고 살고 있다. 이들 세대는 이방댁, 뙤창집, 대나무서까래집,ㄱ자집 등 모두 문화재다.
순천시는 58세대를 사들여 관리하고 있다. 객사나 내아는 물론이고 동서남문을 관리하고 있다. 또 두부와 메주만들기,국악체험장,유서체험장, 서당과 세계복식체험장을 운영하고 있다. 축제 때 가장 인기있는 곳이다. 해마다 가을이면 낙안읍성 민속문화축제가 열린다. 주민들은 축제 수익의 일부를 순천시로부터 생활비로 받는다. 순천시는 작년 1년 동안 낙안읍성 입장료로 10억원을 벌었다. 순천방문의 해라 할인행사를 해 예년에 비해 줄었다. 축제 행사비와 읍성관리비로 활용하고 있다. 주민들도 그 덕을 보고 있는 셈이다.
여자노인당에서 만난 박순분 할머니(82)는 “여기서 태어났어. 커서 시집갔다가 50년 살고 다시 돌아왔제. 민박도 하면서 돈벌고 걱정없이 편해. 동네 언니 동생들하고 재미지게 살어.”하며 만족스러워 했다. 이 곳에는 보통 10여명이 모여 점심을 함께 먹으며 도란도란 지낸다고 한다.


 

낙안읍성 한 가정에 있는 아궁이 [사진=박승호 기자 ]



이순신 장군이 머물기도

읍성은 당초 조선 태조 6년 때인 1397년에 김빈길 장군이 군수로 부임해 토성으로 쌓았다. 하지만 비바람에 씻겨 자꾸 허물어지자 230년 후 조선 인조 때 1628년 임경업 장군이 석성(石城)으로 완공했다.
임 장군은 군수를 지내면서 백성들을 두루 편안하게 했는지 선정비가 남아있다. 선정비에는 “억울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내용도 들어있다.
또 이순신 장군이 정유재란 때 3군 수군통도사로 지내면서 낙안읍성에 머물기도 했다. 이곳에서 군인과 군량미를 정비하고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인 명량해전에 출전해 전사했다. 당시 장군이 심은 팽나무가 살아있다. 수령이 420년 넘은 ‘장군목’이다. 8년 전 태풍에 일부가 잘려 나갔지만 여전히 의젓하다.
손병희 선생이 주민과 천도교인들을 이끌며 독립운동을 치열하게 벌였다. 3·1독립기념탐이 이곳에 세워져 있다. 또 판소리 동편제 대가인 송만갑 선생과 시조의 대가인 오태석 중시조도 낙안읍성 출신이다. 그래서일까 ‘낙안읍성 3다’ 가운데 소리가 들어 있다. 소리와 돌, 사삼주가 ‘3다’다. 사삼주는 찹쌀과 누룩,더덕으로 빚은 지역 토속주다.
낙안읍성은 국가지정문화재로 1983년 사적 제302호로 지정됐고 2011년 3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됐다. 2012년 미국의 CNN방송은 ‘한국에서 가 봐야할 곳 50선’으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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