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영, 개인전 <겹의 언어_Palimpsest>… 덧씌우고 지운, 또 다른 흔적에 관한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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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서 기자
입력 2020-01-02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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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월 6일(월) - 1월 15일(수),아트 스페이스 인 (ART SPACE IN)에서

소멸의 공포와 삶의 환희를 향한 욕망 사이의 모순적 접점을 주제로 ‘중첩’이라는 개념에 천착하여 작업을 이어온 정윤영 작가(32세)의 다섯 번째 개인전 ‘겹의 언어_Palimpsest’展이 오는 1월 6일(월)부터 1월 15일(수)까지 인천대학교 아트 스페이스 인 (ART SPACE IN)에서 열린다.

인천대학교의 2020년 신진 작가 전시 지원 프로그램으로 꾸려진 이번 전시에서 정 작가는 동양적 전통 재료에 기반을 둔 레이어드(layered) 방식과 가상 이미지의 일부분을 편집하는 과정을 교차시켜 추상 회화와 공학적 알고리즘의 만남을 보여주는 평면 회화 작품 20여 점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에서는 지난 8월 갤러리 도스에서 열린 개인전 <겹의 언어>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업들을 새롭게 재구성하여 선보인다.

이번 전시의 타이틀인 <겹의 언어_Palimpsest> 역시 지난 전시에 ‘원래의 글 일부 또는 전체를 지우고 다시 쓴 고대 문서’를 지칭하는 단어 ‘팰림프세스트(palimpsest)’만 덧붙였다.

하지만 일반적인 의미의 재활용 전시와는 달리 이미 선보인 기존 전시 작품들을 단순히 재탕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 이면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전시 콘셉트와 관련한 내막을 살펴보자.
 

 



▶덜어내는 것
정윤영 작가의 이번 개인전 제목인 ‘팰림프세스트(palimpsest)’는 재활용 파피루스 또는 양피지에 쓴 고문서를 의미하는 표면적인 뜻 이외에도 ‘다층적인 의미’를 지닌 것을 표현하는 인문학적 은유다.

이것은 종이가 보편화 되기 전에 흔했던 양피지, 석판, 모조 피지 등 여러 종류의 소재가 사용되었는데, 과거 양피지는 상당히 귀했기 때문에 지면 절약을 위하여 구두점 없이 단어와 문장을 연속적으로 쓰기도 하였지만 가장 일반적인 방식은 재사용하는 것이었다.

특히 책의 경우에는 양피지를 재사용하기 위해 양면에 글을 써야 했으므로 오래전에 썼던 흔적을 긁어내거나 씻어서 새로운 빈 페이지를 만드는 일종의 재활용 과정의 결과물이었다.

그렇다면, 정윤영 작가에게 팰림프세스트는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 ‘흔적을 지우고 덧대어 쓰는 것’은 글 뿐만 아니라 그림에 있어서도 유사한 점이 많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화려한 미사여구, 중첩된 수식어나 세련된 묘사 없이 글을 쓰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다채로운 표현 기법과 묘사를 하지 않으면서 ‘진짜 그림’이 되게 하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만은 않다.

그래서 정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선보일 작품들은 ‘지우는 것, 덜어내는 것’에 역점을 두고 작업을 진행했다고 한다. 개인사와 관련한 아픔을 직접 와닿는 대로 다룬 기존 작업과는 조금 다른 접근이다. 그는 창작자의 주관과 내면을 재료와 색, 식물과 신체라는 소재로서 재현한 표현주의적 작품 시리즈를 제작하고 난 후에, 미술 창작의 근원적인 면을 다시금 되짚어보게 되었다고 한다.

"지난 전시에서 보여준 작품들을 다시 돌이켜보니, 제 안의 에너지를 여과 없이 담아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좀 덜어내고 싶어졌달까요? 그래서 절제된 조형적 실험과 함께 그림 안에 들어있는 여러 이미지나 형상들을 단순화시키는 데에 집중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지난 전시에서 전시한 작품의 미세한 일부분을 포착하여 재조합하는 편집의 과정을 바탕으로 하여 작업을 진행했어요. 제가 주로 사용하는 중첩이라는 방식이 단순히 비단을 배접하는 납작한 평면 그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고, 그에 따라서 중첩을 좀 더 다층적이고 입체적으로 시야를 확장하여 생각하게 되었죠. 지난 작품의 일부분을 포착해서 변형해나가는 과정에서도 긴장과 충돌, 이완 같은 조형적 균형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말 그대로 이번 전시에서 선보여지는 작업 자체가 지난 전시에 연결된 것이지만, 그와 동시에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고, 그 위에 덧쓰여진 ‘시간의 겹쳐짐’, 즉, 팰림프세스트와 같은 것이죠."
<정윤영 작가 인터뷰 中>

▶미술과 공학, 그 사이
정 작가는 과거 외과적 수술과 관련한 자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신체와 식물 이미지를 대상화하여 작업을 이어왔다. 하지만 개인적이고 내밀한 아픔을 매개 삼은 작업이 단순하고 진부한 질병의 소산 정도로 이해되지 않기를 바랐다.

이번 전시에서도 작품을 주로 비단이라는 동양적 전통 재료를 여러 겹으로 중첩하는 레이어드(layered) 방식으로 제작하였고, 재료는 식물의 잎, 줄기에서 추출한 진액을 안료와 혼합하여 사용하였다.

지난 작업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 작업에서도 얼핏 작업에 담긴 형상들은 사실상 서로 무관한 패턴을 보이는 듯하지만, 드러난 식물의 이미지에서 인간의 신체와 유사한 부분을 포착하고 그것에 대한 연상 작용이 전 작업 과정에 이어졌다.

특히나 이번 전시 작품에서 선보일 작품들은 관습적으로 균형적인 아름다움을 지녔다고 여겨지는 꽃의 이파리나 열매 같은 식물의 완전한 형태가 아닌 이미지의 일부분을 잘라내고 덧붙였는데, 이러한 편집 과정은 특정 공학 알고리즘에 기반을 두었다.

이러한 복잡한 공정을 거쳐 추상적으로 구현된 결과물로서의 회화 작품은 전시 공간에서 다시 그 제작 과정을 상기시키는 기하학적 도형이나 디지털화된 픽셀, 혹은 망점화된 불분명한 이미지들과 함께 중첩된 상태로 설치된다. 이렇게 상이한 것들이 적층되는 방식으로 설치된 공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심리상태 위에 한 겹을 더하고 또 더하면서 증식과 소멸을 반복하는 조형적 흔적을 쌓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정윤영 작가의 이번 전시 작품을 이해하는 것에 있어서는 ‘중첩’이 핵심이다. 과거의 작업과 현재의 작업 사이의 중첩, 순수 미술과 공학적 알고리즘 사이의 중첩, 시간이나 공간의 겹쳐짐은 미술사에서 숱하게 다뤄온 중첩이라는 키워드와 차별화된다

. 무엇보다 정 작가에게 있어서, 중첩은 소멸의 공포와 삶의 환희를 향한 욕망 사이의 모순적 접점을 담아내고 있다. 중첩은 결국 선후나 상하를 떠나서 뒤섞이며 우리 존재에 관한 고정된 시간 관념을 뒤흔들면서 삶에 관하여 더욱 원초적이고 근원적으로 접근하여 되돌아보게 하는 수단이 되어준다.

그의 개인적인 기억의 과정을 보여주는 ‘겹의 화면’은 작가의 선별적인 선택을 통해 미학적으로 승화된 깨달음의 기쁨을 관객들과 공유할 준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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