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감옥 끌려간 김상헌, 明 망한 뒤에도 묘비에 절개 새기다

입력 : 2019-12-25 16:53

<17>청나라에 맞선 척화파 김상헌이 잠든 안동 김씨 선산 · 황호택(서울시립대) 이광표(서원대) 교수 공동집필 

1636년(인조 14년) 12월 청태종은 청과 몽골의 연합군 12만명을 직접 이끌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왔다. 베이징(北京)의 명과 전쟁을 벌이기 전에 후방의 조선을 다잡아두려는 전략이었다. 청군의 선봉대는 임경업(林慶業) 장군이 지키던 백마산성(白馬山城)을 우회해 밤낮을 달려 선양(瀋陽)을 떠난 지 10여일 만에 서울에 육박했다. 이른바 병자호란이다.
청군이 개성을 지난 뒤에야 조정은 비로소 피란 짐을 꾸렸다. 종묘사직의 신주와 함께 원손(元孫), 둘째, 셋째아들과 궁중의 여인들을 먼저 강화도로 보내놓고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청군이 홍제원(弘濟院·지금의 서대문구 홍제동)에 다다랐다. 인조는 밤에 숭례문을 빠져나와 허겁지겁 강화도를 향해 떠났으나 청군의 진격이 빨라 길이 막혔다. 이조판서 최명길(崔鳴吉)이 홍제원의 청군 진영에 가서 술과 고기를 먹이며 출병의 이유를 묻고 시간을 지연시키는 사이에 인조는 세자와 백관을 대동하고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방향을 틀었다. 예조판서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은 북풍한설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왕의 가마를 호종(扈從)하고 산성으로 들어갔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남한산성. [사진=경기문화재단 제공]

병자호란 때 최명길이 쓴 항복문서 찢으며 통곡

청군에 포위된 산성에서는 주화론(主和論)과 척화론(斥和論)이 격하게 대립했다. 김상헌은 임진왜란에서 조선을 구해준 명나라의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망각해선 안 된다며 청나라에 끝까지 맞서 싸우자는 척화론에 앞장섰다. 그는 최명길이 쓴 항복문서를 보고 통곡을 하면서 찢어버렸다. 산성에서 한달 보름을 버티던 인조가 청태종에 세번 무릎을 꿇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적인 항복의식을 치르고 전쟁이 끝났다. 김상헌은 청나라 선양으로 끌려가 6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그가 청에 끌려가면서 지은 시조가 청구영언에 실려 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김상헌과 달리 주화론자(主和論者)였던 최명길은 현실주의자였다. 망해가는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다가 청나라의 말발굽과 칼날에 나라가 유린되는 상황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나중에 최명길도 명과 밀통해 반청(反淸)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청나라에 끌려가 2년간 억류생활을 했다. 김상헌이 갇혀 있던 바로 옆방이었다. 연려실기술에는 선양 감옥에서 둘이 나누었다는 한시가 기록돼 있다. 김상헌은 “두 대에 걸쳐 나눈 교분 다시 찾아서, 평생의 의심 모두 풀어버렸네”라고 했다. 최명길은 “그대 마음 굳은 바위 같아서 끝까지 바뀌지 않거니와, 나의 도(道)는 둥근 고리 같아서 일에 따라 변한다네”라고 답했다.
 

대원군 때 철폐된 석실서원터임을 알리는 표지석. [사진=유대길 기자]


청음집에는 인조가 심양에 갇혀 있는 김상헌에게 보낸 위로 편지의 내용이 들어 있다. 1645년 청음은 선양에서 볼모 생활을 마치고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했지만 인조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여 벼슬을 단념하고 석실(石室)에 은거했다. 

 청 감옥살이 6년 후 귀국···인조 싫어하자 벼슬 안하고 은거

청음의 묘는 남양주시 와부읍 신(新)안동 김씨 선산에 있다. 안동 김씨는 본관은 같으나 시조를 달리하는 신안동 김씨와 구안동 김씨 두 가문이 있다. 신안동 김씨는 한양에 올라와 장동(壯洞)에 살았다고 해서 장동 김씨라고도 불린다.
신안동 김씨의 와부읍 선산을 둘러보면 조선시대에 그 문벌이 어떠했는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선산 맨 아래에는 신연(神淵)이라고 불리는 작은 연못이 있다. 실용적으로 보면 선산에서 흘러나오는 지하수를 담아 배수 기능을 하지만 후손의 복을 기원하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옥호저수형(玉壺貯水形)의 이 명당은 풍수지리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꼭 들르는 코스다.

천하명당이라는 신안동 김씨 선산 앞에 있는 신연(神淵). [사진=유대길 기자]


연못에서 선산을 바라보고 왼쪽에 입향조(入鄕祖) 김번의 묘가 있다. 김번은 평양서윤을 지내 그의 후손들을 서윤공파라고 부른다. 집안에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원래 이곳은 김번의 부인인 남양 홍씨의 친정 땅이었는데, 풍수지리로 방앗간 지혈이었다고 한다. 김번의 큰아버지인 학조대사가 조카며느리인 남양 홍씨에게 방앗간 지혈에는 곡식과 물이 절로 모이니 남편이 죽으면 무덤을 이곳에 쓰라고 권유했다는 것이다.
이 선산에는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된 김극효와 김광찬의 묘도 있다. 김극효는 김상용·김상헌 형제의 아버지로, 신안동 김씨 서윤공파(庶尹公派)의 중시조(中始祖)로 일컬어진다. 직계후손에서 대제학(大提學)이 6명, 재상(영의정·좌의정·우의정) 15명, 왕비(王妃) 3명, 후궁(後宮) 1명, 부마도위(駙馬都尉) 2명을 배출했다. 김광찬의 양부가 상헌이다.
권력은 불과 같아서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다. 불에서 너무 멀면 얼어죽고 너무 가까우면 타죽는다. 안동김씨들도 사색당쟁과 사화에 얽혀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김상헌의 손자로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金壽恒)은 사약을 받고 죽으면서 후손들에게 벼슬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후대로 내려가면서 지켜지지 않고 세도정치의 정점을 찍었다.
 

청음 김상헌의 묘표는 명나라가 망한 뒤에 세워졌지만 '有明朝鮮'의 문정공이라며 여전히 명나라를 섬기고 있다. [사진=유대길 기자]


김상헌의 묘표에는 ‘有明朝鮮 文正公 淸陰 金先生 尙憲之墓’(유명조선 문정공 청음 김선생 상헌지묘)라고 씌어 있다. '유명조선'은 그 의미를 새겨보면 조선이 자주독립국가가 아니라는 참으로 부끄러운 말이다. 당시의 시대상인 사대주의를 반영한다. 유(有)는 명(明)의 외로움을 덜어주는 발어사(發語詞)이면서 ‘아주 크다’는 의미를 지녔다. 조선은 대국인 명의 제후국이라는 뜻이다. 명나라는 1644년에 망해 청나라가 들어섰고, 김상헌은 1652년에 죽었는데 ‘유청(有淸) 조선’이라고 쓰지 않았다. 명나라는 없어졌지만 조선은 오랑캐 청나라가 아니라 성리학의 모국인 명나라의 사상적·이념적 정통성을 이어받았다는 의미다.
그의 묘 앞에는 그의 유언시가 비석에 새겨져 있는데, 명·청 교체기에 그의 변치 않는 절의(節義)를 담고 있다.

지성(至誠)은 금석에다 맹세하였고
대의(大義)는 일월에다 매달았다네
(중략)
옛 도에 합하기를 바랐건마는
오늘날에 도리어 어긋났구나
아아 백대 세월 흐른 뒤에는
사람들이 나의 마음 알아주리라

형 김상용은 강화도 지키다 성 함락되자 화약 불지르고 자폭

청음의 세살 위 형 김상용(1531~1637)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를 지키다 성이 함락되면서 청군이 물밀듯이 밀려오자 남문루(南門樓)에 쌓여 있던 화약에 불을 지르고 자폭했다. 김상용의 묘는 시신이 없어 옷자락을 가져와 묻은 유복(遺服) 묘다.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됐다. 안동 김씨 분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그의 묘 옆에는 함께 폭사한 서손(庶孫) 김수전(金壽全)의 묘가 있다.
김상헌이 죽은 후에 큰형인 김상용과 함께 제사하는 석실사(石室祠)를 세웠고 2년 후에 석실서원이 된다. 김상용·상헌 형제의 도덕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석실서원은 청음과 두 형제와 함께 김수항·김창집·김창협·김창흡·김원행·김이안·김조순 등 주로 안동 김씨들이 배향됐다. 신안동 김씨의 세거지(世居地)는 세 곳이다. 경북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는 본관이고, 한양의 장의동(현재 종로구 청운동)은 권력의 중추일 때 살던 동네이고, 석실은 정신을 이어가는 교육기관이 있던 곳이다.

석실서원터에서는 한강이 바라다 보인다. 붉은 벽의 기와집 건물은 양주 조씨의 재실 영모재. [사진=유대길 기자]


김원행의 제자 가운데 홍대용은 박지원·박제가와 교분을 쌓으며 북학(北學)으로 나아가 실학으로 이어졌다. 김조순(1765~1832)은 딸이 순조의 왕비가 되면서 안동 김씨 60년 세도의 문을 열었다. 그의 아들 김좌근은 영의정을 세번이나 지내며 권력의 절정에 다다랐다. 안동 김씨 세도가 한창일 때는 마차꾼들이 장의동을 지날 때 시끄러운 소리가 날까봐 마차를 들고 갔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하에서 낮은 포복을 했던 대원군은 1869년 서원철폐령을 내리면서 석실서원을 없애버렸다. 고종은 민비와 자신이 묻힐 묫자리로 금곡의 양주 조씨 선영을 점찍고, 양주 조씨들에게는 석실서원 터를 내주어 선산을 옮기게 했다.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인 조말생의 묘도 이런 연유로 이곳에 왔다.
석실마을 입구에는 석실서원 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들어 있다. 옛날에 석실서원이 헐리면서 나온 벽돌, 주춧돌, 기왓장이 이 동네 집들의 건축자재로 쓰였다고 김형섭 학예사는 말했다. 석실서원의 모습은 겸재 정선의 그림을 통해 후세에 전해진다.

석실서원이 철폐될 때 안동김씨 선산으로 옮겨온 석물들. 도연명의 절의를 상징하는 '취석(醉石)'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다. [사진=유대길 기자]


석실서원에 있는 기념물들은 서원이 철폐된 후 신안동 김씨 선산 김수증의 묘 아래로 옮겨졌다. 취석(醉石)은 도연명의 고사에서 유래됐다. 도연명은 술에 취하면 바위 위에서 잠이 들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그 비석을 취석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세속에 물들지 않는 도연명의 절의를 상징한다. 석실서원 묘정비문은 송시열이 지었고 김상헌의 큰손자인 김수증이 썼다. 김수증은 예서와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잘 써 명필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석실마을 앞으로 흐르는 한강을 석실서원 시대의 사람들은 미호(渼湖)라고 불렀다. 건너편 미사리에서 강물의 흐름이 느려지면서 모래와 자갈이 퇴적해 평탄한 지형을 이루었다. 미사리가 물흐름을 막아 유속이 느려지고 강폭은 넓어진다. 석실서원에 배향된 김원행은 아호를 미호라고 지었고 후손들이 펴낸 문집의 이름도 미호집이다. 석실서원 터에서 바라보는 미호는 신안동 김씨들의 성시(盛時)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잔잔한 호수 같은 강이다.
<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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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지원-남양주시(시장 조광한)
협찬-MDM 그룹(회장 문주현)
도움말-남양주시립박물관 김형섭 학예사


<참고서적>
1.민족문화대백과사전
2.역사평설 병자호란 1, 2 푸른역사, 한명기
3.남양주 석실서원, 경인문화원, 윤종일 등
4.남양주에서 답을 찾다, 남양주시, 조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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