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기획] 수능 만학도 이야기…겨울 같았던 인생, 학교에서 봄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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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은숙 류혜경 기자
입력 2019-11-27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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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거리 떠돌던 어린 시절 넘어서 뒤늦게 이룬 배움의 꿈

  • "학교 온 건 정말 잘한 일…배울수록 남 더 도울 수 있어"

  • "70살 넘어 본 수능시험날은 내인생 최고의 하루였다"



1964년에 태어난 배동식 씨의 기억 속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없다. 아기 때부터 줄곧 보육원에서 자란 고아였기 때문이다. 출생신고도 안된 아이에게 학교는 언감생심이었다. 그나마 몸을 담았던 보육원마저 폐업을 하자 배 씨는 갈 곳을 잃었다. 길이 집이었고, 살아남는 것 자체가 기적인 어린 시절이었다.

그래도 배 씨의 인생은 운명처럼 음악을 만나면서 완전히 달라졌다. 12살 노숙 중 만난 선생님 덕분에 악기를 배웠고, 색소폰과 트럼펫에 능숙한 전문 연주자로 어엿하게 성장했다. 뛰어난 실력을 지녔기에 방송국에서도 일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인생의 한 부분은 언제나 비어있는 듯했다. 무대에서는 박수갈채를 받는 음악인이었지만,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는 언제나 헛돌았다. 속마음을 털어놓을 친구도 일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을 동료도 없었다. 배 씨는 뼈에 사무치는 외로움의 이유가 텅 빈 학력란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랑 아무도 안 놀아줬어요. 이유가 학력 때문이었죠. 다들 음대를 나오거나 전문 교육기관에서 음악을 제대로 배운 사람들인데 나만 학력란이 텅 비어있으니까 안 놀아주는 거예요.”

지난 2015년 배 씨는 서울 노원구 청암중학교의 문을 두드렸다. 청암중·고교는 중고등학교 2년제 학력 인정 학교로, 나이와 성별에 제한 없이 입학할 수 있다. 그리고 4년이 지난 2019년 11월 14일 꿈에 그리던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을 치렀다.
 

서울 청암중고등학교에서 수능 시험을 앞둔 고3 교실 모습. [사진=청암중고등학교 ]

◇인생의 고비마다 지탱해준 선생님···"주눅 들지 말고 자신에게 당당해야"

입시한파가 제대로 몰아닥쳤던 지난 14일. 남들보다는 조금 더 긴 사연을 품고 시험장으로 향했던 이들이 있다. 후배들의 열띤 응원도 학부모들의 애타는 기도도 없었지만, 긴장되는 마음은 다른 수험생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시험장에 들어갈 때 긴장보다 설렘이 더 컸다는 것이 다르다면 다른 점이었을까? 이들은 바로 어린 시절 학업의 기회를 놓쳤다가 수십 년 만에 학교로 돌아와 수능을 치른 만학도들이다. 아주경제는 수능이 치러진 지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은 지난 19일 큰 시험 뒤 여유를 만끽하고 있는 만학도 3명을 만나 조금은 남달랐던 그들의 인생과 남들 못지않게 치열했던 시니어들의 수능 공부에 대해 들어보았다.

올해 수능을 치른 만 55살의 배동식 씨는 14일 고사장에 들어가다 제지를 당했다. 경비를 서시는 분은 배 씨의 수험표를 보고 나서야 "어휴 대단하세요"라며 출입을 허용해줬다. 경비원의 말 한마디에 떨리던 마음이 조금 진정됐었다고 배 씨는 말했다. 그는 "시험을 보고 나오자 지금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 뭐랄까 (자신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넘쳤다. 대한민국에 태어나서 내 인생에 가장 큰 일 중 하나를 해냈다"라는 생각에 감격스러웠다고 말했다.
 

수능 만학도 배동식 씨가 학습 부장으로 활동하며 수업을 준비하는 모습.  [사진=배동식 씨 제공 ]


유난히 굴곡이 심했던 배 씨의 인생. 쉰이 넘어서 시작한 만학도의 길도 쉽지 않았다. 학교도 엄연한 사회생활이었고, 갈등은 빈번하게 터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자신을 거둬준 스승을 생각했다. 배 씨는 "이제 와 생각하면 왜 그랬나 싶지만, 예전에는 선생님들과 충돌이 있을 때마다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러나 막상 그만두려고 할 때마다 나를 사람답게 살게 거둬준 음악 선생님이 생각났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는 생각에 계속 학교에 다녔다"고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학교생활도 안정이 됐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나아졌다.

배 씨는 "나중에 돌아가신 선생님을 모신 곳에 가니까 어쩐지 (선생님이) 나한테 잘했다고 하시는 것 같더라"라고 덧붙였다.

배 씨는 학교에 다닌 것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로 꼽는다. 학교에 다니면서 인생을 바라보는 눈은 크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예전엔 화려한 삶이 품위 있다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다른 이들과 함께하는 삶에 진정한 품위가 깃든다고 생각한다. 미혼모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시작하게 된 이유도 학교에 다니면서 배움이 깊어졌기 때문이라고 배 씨는 생각한다. 예전과는 달리 마음이 시켜서 하는 봉사활동이기에 꾸준한 후원도 이어가고 있다.

올해 수능까지 치른 만학도로서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을 묻자 배 씨는 최선과 용기를 꼽았다. 특히 늦게 공부를 시작하는 이들은 더욱더 당당하게 자신이 학생임을 드러내라고 조언했다.

그는 "주눅이 들기 쉽지만, 주변인들에게 알린다고 해서 못 배운 사람이라는 타박이 돌아오지는 않는다. 오히려 학교에 다닌다는 사실을 응원해주고 도움을 주시려고 하는 분들이 많다. 자신이 당당하지 않으면 오히려 결과가 좋지 않다"고 강조했다.

◇"수능 날은 내 인생 최고의 날"···"많이 배울수록 많이 도울 수 있어."

"내 인생 최고의 날이었어." 박순남(72) 씨는 지난 14일은 수능 뒤 받은 며느리의 축하 전화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가난과 인생의 고단함 속에 그만둬야 했던 공부를 이어갔고, 수능이라는 커다란 산도 넘어섰기 때문이다. 내년 2월 고등학교 졸업식과 3월 대학교 입학식 때문에 박 씨는 벌써 설렌다.

박 씨는 "수능 날 학교 밖에서도 나를 격려해주고 환영해주는 선생님들을 보니까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시험장에 들어가기 전 선생님들은 노령의 박 씨가 시험장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에게 배움을 줄 것이라고 격려했다. '선생님 생각 안 나는데요?'를 수업 시간 내내 단골 대사로 삼으며 힘들게 학업을 이어갔던 박 씨지만, 공부를 시작한 것을 무엇보다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도움만 받았던 박 씨는 이제 남들을 도울 수 있게 됐다. 그는 "더 많이 배우면 더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고 강조했다.

사실 1947년 태어나 서너살에 한국 전쟁을 겪은 박 씨의 인생 여정도 학교와는 거리가 멀었다. 초등학교에 다니기는 했지만, 아버지가 유흥에 돈을 모두 날리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박 씨는 10대는 공장일로 채워졌다. 돈이 없어 재래시장을 돌아다니며 떨어진 배춧잎을 주워 끓여 먹던 시절도 있었다. 결혼을 하고 세 아이를 낳으며 생활은 다소 안정됐지만, 배움에 대한 열망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뒤 책상에 앉아 신문에 나오는 한자를 따라 쓰며 혼자서 공부했다.

70세까지 미뤄온 공부를 다시 하게 된 계기는 아파트 정자에 놓인 광고 전단지였다. 나이가 많아도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말에, 학교에 전화해 박 씨가 꺼낸 말은 “공부가 하고 싶습니다”였다. “오세요”라는 직원의 한마디에 당일에 등록을 마쳤다. 첫 미술시간 'I love you(아이 러브 유)'의 Love가 기억이 안 나서 고생했던 박 씨는 이제 사람들에게 '너도 할 수 있다'라는 "You can do(유 캔 두)"를 외치고 다닌다.
 

수능 만학도 정재순 씨가 수학여행으로 경주로 향하면서 급우와 함께 찍은 사진 [사진=정재순씨 제공 ]


◇“폭력적이고 무섭기만 하던 학교, 이제는 따뜻하게 나를 품어줘”

1963년 정재순 씨가 학교를 그만둔 이유는 무자비한 폭력 때문이었다. 정 씨는 중학교 1학년까지 다니던 학교를 ‘약한 사람들은 못 견디는 곳’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을 앞두고 반 전체가 받던 기합, 몽둥이로 무자비하게 때리는 선생님의 모습에 정 씨는 자기 차례가 되기도 전에 울음을 터트렸다. 자신이 잘못한 일도 없는데 매를 기다리는 그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았고, 이후에는 학교에 더 다닐 수 없게 됐다.

순하고 여린 성격 탓에 학교 진학을 못 하게 된 정 씨는 이후 미용을 배우면서 미용실 사장님이 됐다. 기술로 성공했지만, 학교에 대해 아쉬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정 씨는 "어느 날 욕심이 너무 많아진 나 자신을 발견했고, 내가 너무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라면서 "돈도 벌고 공부도 하려고 하니 잘 안 돼서 하나는 내려놓기로 마음 먹었다. 돈 버는 걸 놓고 학교로 왔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결심을 하고 들어온 학교생활을 이어가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배움의 길에서 만난 친구들이 의지가 됐고, 졸업여행 일정도 잡아놓은 상태다.

학교에 돌아왔지만, 한동안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했다. 그렇게 몇 년을 다니다가 결국 가족들에게 학교 진학 사실을 알렸다. 아이들과 남편의 격려가 이어졌다.

정 씨는 "마음도 약하고 귀도 얇아서 맨날 속고 당하고 그러다가 배우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어서 선택을 하게 된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 씨는 학교에서 배움을 이어가면서 남들도 도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뒤늦은 공부는 포기해야 할 것도 많았다. 미용실도 예약만 받았다. 일도 돈도 내려놓아야 했지만 정 씨는 학교에 돌아온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마음이 맞는 친구를 얻었고, 그가 학교를 그만두게 했던 무서운 선생님 대신 따뜻하게 안아주는 선생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이제는 학교가 좋다는 정 씨는 “수능 날 시험장에 가니 국어 선생님, 영어 선생님이 다 나와서 안아주고 격려해주고 하니 그때야 수능을 본다는 실감이 났다"면서 "누군가 저와 비슷하게 학교로 돌아오려는 문제로 고민한다면 저는 손을 잡고 데려다줄 정도로 좋다”라며 환하게 웃었다.


 

2020학년도 수능을 치른 배동식씨, 정재순씨, 박순남씨(왼쪽부터) [사진=류혜경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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