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낱말인문학]효(孝)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들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이상국 논설실장
입력 2019-08-19 14:53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사진=게티이미지뱅크]



# 효도는 늙은 어버이가 불쌍해서 도와주는 일?

'효'는 무엇인가. 우리는 늙어서 스스로 생활능력이 없는 부모에 대해 연민의 태도를 지니며 마음을 다해 보살피는 행위를 효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효는 가엾은 부모를 뒤치다꺼리하는 자신의 당연한 '의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효'처럼 느껴지는 것은 전시대 효의 풍성한 의미가 모두 벗겨지고, 앙상한 뼈대만 남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원래 '효'는 동양사회에서 다양한 리스크(전쟁·폭정·질병·빈곤)에 대응하기 위해 혈연 중심의 공동체를 공고히 하는 과정에서, 부모를 봉양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으면서 강조된 윤리의 핵심이었다. 즉, 불안정한 사회 속에서 안정을 모색하는 핵심네트워크가 부모자식이었고, 그것을 기반으로 한 가족이었기에 '효'라는 가치를 부양하여 근본적인 불안을 완화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 공자는 '효'를 재발견해 자신의 철학을 완성했다

이 같은 가치체계의 중요성을 재발견한 사람은 공자였다. 통찰력이 뛰어난 이분은 '효'야말로 자신이 세상에 제시할 짜임새 있는 '프레젠테이션'의 완결판이라고 생각했다. 공자는 '죽음'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았다. 삶도 모르는데 어떻게 죽음을 아느냐고 스스로가 말했을 정도다. 하지만, 당시 전쟁과 빈곤으로 죽음이 일상처럼 빈번하던 시절에 이 문제를 간과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공자는 '효'의 개념을 정밀하게 확장시킨다. '효'는 단순히 어버이를 봉양하는 일이 아니라,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 인간이 영생과 불멸을 얻는 유일무이한 방안으로 채택된다.

나는 태어나서 살다가 죽지만, 나는 그냥 태어나기 전과 같아지는 것이 아니다. 자식을 낳아, 나의 몸과 나의 혼과 나의 생각을 지상에 두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문이라는 시공을 초월하는 통시적 자아개념이다. 개체적 죽음보다 가치있는 것은 통시적 자아의 '끊이지 않는 삶'이다.

공자는 이런 기본적 틀을 지니고, '효'를 단기적 사회 안정화의 소극적 수단으로만 여기는 데서 더 나아가, 삶과 죽음으로 갈라선 부모와 자식이라는 통시적 자아를 결합하는 방법을 고안했는데, 이것이 '제사'라는 방식의 미팅이다. 제사는 죽은 부모와 살아있는 자식을 정기적으로 만나게 함으로써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하고자 했던, 공자의 야심찬 기획이었다.이것은 생존 때에만 강조되던 '효'를 영원으로 확대하여 인간의 삶의 가치를 완전하도록 하는 혁신적 사고였다.

# 자식이 자식다워야 한다는 것에 담긴 엄청난 뜻

공자의 사회는 불안한 사회였고, 살기도 힘겨웠고 죽음도 빈번했던 '나쁜 세상'이었다. 이 나쁜 세상을 안정감 있게 하기 위한 것이 공자가 가장 긴급하고도 간절하게 목표로 삼았던 무엇이었다. 효! 공자가 이것을 재발견한 것은 인간 역사를 바꾼 위대한 발견이었다. 그래서 공자는 효를 복음처럼 전도하고 다녔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인간이 채택해야 하는 기본은 무엇입니까? 어느 리더가 물었을 때, 그는 그 유명한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를 얘기한다. 왕은 왕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어버이는 어버이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

전쟁을 준비하는 호전적 군왕에게 '효'를 강조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전쟁에서 얻는 것들은 그 군왕 자신을 영예스럽게 하고 자신의 욕망을 채울 수 있는 현세적 이익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너의 자식들, 너의 자손들은 과연 너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 존재들은 너와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시대를 살아갈 바로 '너 자신의 얼굴'이다. 그때 네가 지금 품은 탐욕 때문에 자손이 고통받고 너를 비판한다면, 그것은 네 자신이 자신에게 침을 뱉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효는 나의 근원에 대한 감사, 나의 영원에 대한 배려

효(孝)는 나의 존재, 나의 태생에 대한 감사이며, 나의 과거와 나의 근원에 대한 '적실한 응답'이다. 지금에 와서 왜 효의 개념이 허물어지고 낡은 생각으로 비웃음을 받는지 살펴보면, 그것은 '자아'에 대한 질문이 부족해지면서 공자시대에도 가능했던 사유가 더할 나위없이 황폐해졌기 때문이다. 시간적 자아를 상실한 인간은 무엇에도 구원받기 어렵다. 나름으로 이기적으로 행동했고 그래서 이익을 보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제 몸과 제 생을 미궁으로 쳐넣는, 영원한 어리석음으로 방치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공자는 종교를 말한 적도 없지만, 공자만큼 존재의 구원에 대해 설득력 있게 설계해 놓은 이도 없었다. 그게 '효(孝)'의 실체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