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일용의 CEO 열전] ⑪ 실패만 거듭하던 사업가, 천원샵 아이디어로 억만장자에 올라... 야노 히로타케 다이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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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일용 기자
입력 2019-08-03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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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노 히로타케 다이소 회장

  • 실패만 거듭하던 청년 사업가, 100엔샵(천원샵) 아이디어로 일본 버블붕괴 속에서 급성장... 오늘날 100엔샵 선두주자 다이소 만들어

천원샵이란 1000원 내외의 저렴한 생활용품을 대량으로 유통하는 슈퍼마켓을 의미한다. 일본어로는 100엔샵(100円ショップ)이라고 부른다. 1970년대 일본에서 처음 등장해 1990년 초 일본 거품경제 시기에 급성장했다. 2000년대에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시장에 진출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이러한 100엔샵이라는 아이디어는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것일까? 한국, 일본, 대만 등 아시아권 국가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세계 최대의 100엔샵 '다이소(Daiso)'의 창업주이자 현 회장인 야노 히로타케(矢野博丈, 77)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야노 히로타케 다이소 회장.[사진=다이소 제공]


◆사업 실패 후 야반도주... 실패만 거듭하던 청년 사업가

야노 회장은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중국 베이징에서 8남매 가운데 5번째로 태어났다. 사실 야노 히로타케라는 이름은 그의 본명이 아니다. 그의 본명은 '쿠리하라 고로'다. 쿠리하라 가문의 다섯 번째 아이라는 뜻이다. 그의 아버지는 의사였고, 그의 형제들도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의사의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야노 회장은 의사 대신 다른 길을 택했다. 일본의 명문 사립대 주오대학 이공학부의 토목공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어린 시절 권투에 심취해 1964년 열린 도쿄 올림픽에 선수로 출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내와의 만남을 계기로 그의 삶은 변했다. 야노 회장은 히로시마 지방 유지의 딸이었던 아내와 결혼한 후 야노 집안의 데릴사위로 들어가게 된다. 그 집안의 후계자란 의미에서 성과 이름을 현재 이용하는 야노 히로타케로 변경했다. (우리나라에선 매우 보기 힘든 사례이지만, 일본에서는 딸만 있는 집안이 데릴 사위를 들인 후 사위에게 집안의 성을 주고 가문을 이어가는 경우가 제법 흔한 편이다.)

야노 회장은 장인에게 방어 양식장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사업은 실패로 끝났다. 3년 만에 700만엔에 이르는 엄청난 빚을 지고 빚쟁이들을 피해 야반도주라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살아남기 위해 야노 회장은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세일즈맨, 화장지 교환업, 볼링장 아르바이트 등을 전전하며 힘든 생활을 했다. 9번의 전직 후 1972년 약간의 종잣돈을 모은 야노 회장은 다양한 잡화를 이동하면서 판매하는 '야노 상점(矢野商店)'을 창업했다.

창업이라고 거창하게 표현했지만, 현실은 비참했다. 야노 회장이 선택한 사업은 도산했거나, 자금 사정이 어려운 기업의 재고품을 저렴하게 매입한 후 이를 전국을 돌아다니며 판매하는 것이었다. 즉, 현재 '지하철 행상인'들과 같은 길을 걸었던 것이다. 여기에 화재라는 악재까지 일어나 그의 사업을 더욱 힘들게 했다. 힘들게 구매한 제품들이 불타버린 충격으로 그의 아내는 몸져눕기까지 했다.

결국 야노 회장은 홀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행상인을 하게 됐다. 상품 진열 및 정리, 보충, 회계까지 홀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희망찬 미래 같은 것은 없어 보였다. 힘든 하루를 마무리하고 집에 들어온 야노 회장은 결국 만사가 귀찮아졌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모든 제품의 가격을 원가와 관계없이 100엔으로 매긴 후 이를 판매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백화점, 대형마트, 편의점에 이어 4번째 슈퍼마켓 모델로 평가받는 100엔샵은 이렇게 한 사업가의 아픔과 '귀차니즘(만사가 귀찮음을 일컫는 속어)' 속에서 태어났다.
 

초기 다이소의 모습.[사진=다이소 제공]


◆가격은 100엔이어도 품질은 그 이상... 100엔샵에 대한 편견을 깨다

100엔샵은 온전히 야노 회장만의 아이디어가 아니다. 1970년대 이미 모든 제품의 가격을 하나로 통일하고 이를 판매하러 다니는 행상인들이 존재했다. 야노 회장은 단지 이를 100엔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책정했던 것뿐이다.

1970년대 후반 오일쇼크 등의 문제로 제품 원가가 상승하자 이러한 균일가 행상인들은 자취를 감췄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야노 회장은 행상인끼리 모여 다니며 특정 장소를 하루 정도 임대해 판매를 진행하고 다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이러한 친선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 1977년 야노 상점의 이름을 '다이소 산업(大創産業)'으로 변경하고 법인화를 추진했다. 비록 회사 규모는 작지만, 물건만큼은 크게 다루자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다.

다이소는 이렇게 균일가 행상인들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상품을 판매하는 행사에서 시작됐다. 주요 판매 장소는 슈퍼마켓의 주차장이었다. 주차장을 보유한 슈퍼마켓들에게 부탁해 장소를 임대한 후 100엔짜리 제품을 판매했다. 슈퍼마켓 관계자들은 행상인들의 100엔짜리 저가상품이 미끼가 되어 손님을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야노 회장과 다이소의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

야노 회장은 100엔샵이 단순히 미끼상품에 그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당시 100엔샵의 상품들의 원가는 개당 70엔 이하였기 때문에 품질에 한계가 있었다. 이를 두고 일본 주부들은 100엔샵 상품은 싸서 좋지만, 싼 맛에 쓰는 비지떡에 불과하다고 불평했다. 이를 들은 야노 회장은 구매 스타일을 바로 변경했다. 제품 매입가를 98엔까지 올려 100엔으로 가능한 최대 품질의 상품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슈퍼마켓의 주차장을 빌려 대규모 세일즈를 시작한 후에는 일부 제품을 100엔 이상으로 매입해 100엔에 판매하기도 했다. 가격은 저렴해도 품질은 저렴해서는 안된다는 야노 회장의 비즈니스 전략은 적중했다. 덕분에 다이소의 제품은 품질이 좋다는 평가를 받게 됐다.

야노 회장은 행상인들의 제품은 A/S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는 고객들의 지적도 해결하는 아이디어를 냈다. 고객이 다이소를 통해 판매된 제품에 즉시 클레임을 걸고 판매자에게 연락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했다. 덕분에 고객들의 신뢰가 증가했고, 이는 다이소가 100엔샵을 지속해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 돌아왔다.

하지만 일본의 유통기업 다이에의 나카우치 이사오 회장이 장소 대여를 중단하겠다고 통보하면서 야노 회장과 다이소 사업은 큰 전환점을 맞이한다. 매장이 더러워지기 때문에 장소 임대를 중단한다는 이유였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100엔짜리 미끼상품이었던 다이소의 매출이 늘어나면서 정작 소비자들이 슈퍼마켓의 상품을 구매하지 않는 것이 진짜 이유였다.

이렇게 슈퍼마켓이 다이소를 거부하는 것을 본 야노 회장은 다이소가 살아남으려면 행상인 형태를 버리고 유동인구가 있는 곳에 매장을 차리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자신의 아이디어인 100엔샵을 본격화해야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하여 1991년 최초의 다이소 매장이 설립됐다. 위치는 시코쿠섬 다카마쓰 시(市)였다. 자본이 부족했던 야노 회장은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오지에 첫 번째 매장을 내야만 했다.
 

1990년대 다이소 매장 전경.[사진=다이소 제공]


◆천운을 움켜쥐어 지금의 다이소를 만들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야노 회장은 대단히 불행한 사업가다. 결국 선택한 100엔샵도 그리 큰 돈이 되지 못했다. 처음 다이소 매장을 낼 때만 해도 일본 전국에 널린 슈퍼마켓 주인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기회가 야노 회장에게 주어졌고, 착실히 다이소의 내실을 다지던 그는 이를 움켜쥐는데 성공했다. 그 기회란 바로 '일본의 거품 경제'다.

1980년대 일본의 거품 경제가 꺼지고 1990년 초부터 일본 경제는 10년이 넘는 장기 침체에 빠져들게 된다. 소비자들은 지갑을 닫았다. 많은 백화점과 슈퍼마켓이 이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하지만 다이소 같은 100엔샵에겐 천우신조의 기회였다.

소비자들은 100엔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제법 쓸만한 품질의 제품을 판매하는 다이소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다이소의 매출은 수직 상승했다. 5000만엔에 불과했던 자본금은 27억엔으로 급증했고, 2000년에는 일본 '벤처 오브 더 이어'를 수상했다.

다이소의 매장은 일본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판매하는 제품도 100엔 일변도에서 벗어나 '고액상품'이라는 이름으로 150~200엔으로 확대했다. 2004년에는 고액상품이라는 이름을 폐지하고 100엔의 배수인 200, 300, 400, 500엔짜리 제품도 판매하기 시작했다. 500엔을 넘는 고가(?) 제품은 다이소의 콘셉트와 맞지 않아 취급하지 않기로 했다.

급성장한 다이소는 2000년대에 들어 마침내 '규모의 경제'를 달성할 수 있게 됐다. 특정 제품을 대량으로 구매함으로써 해당 제품을 보다 저렴하게 공급받는 업계의 큰 손이 된 것이다. 다이소는 더욱 많은 제품을 저렴하게 판매하기 시작했고, 이를 바탕으로 일반 슈퍼마켓과 경쟁에서 앞서나가게 된다. 100엔샵이 백화점, 대형마트, 편의점에 이은 4번째 슈퍼마켓 모델로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주변 시장의 구매력을 분석한 후 매장 크기를 달리하는 다이소의 전략은 주효했다. 작은 슈퍼마켓만 한 매장부터 1000~2000평 이상의 대규모 매장까지 다양한 크기의 매장을 일본 전역에 설립했다. 지난해 기준으로 다이소는 일본에만 3150개, 전 세계적으로 4000개(한국 제외)의 매장을 보유한 명실상부 100엔샵의 선두주자다. 세리아, 캔두, 왓츠 등 일본 내에 많은 경쟁자가 생겨났지만, 이들을 모두 합쳐도 다이소의 매출을 따라잡기엔 역부족이다.

다이소는 상장 기업이 아닌 야노 회장의 개인 기업이라 매출이나 매장 규모에 관한 정보가 자세히 공개되어 있지 않다. 홈페이지에 공개된 정보도 2014년 것으로 업데이트가 잘 되지 않고 있다. 다이소는 2018년을 기준으로 4200억엔의 매출을 올린 것으로 분석된다. 이러한 매출을 토대로 야노 회장의 재산은 19억달러(약 2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블룸버그 기준). 방어 양식에 실패해 야반도주한 청년 사업가가 50년 간의 노력 끝에 100엔샵이라는 새로운 사업을 개척한 억만장자의 반열에 올랐다.
 

[사진=아주경제DB]


◆한국에는 아성산업과 합작해 진출... 일본 다이소와 별개 운영 강조

2000년대에 들어 다이소는 해외 시장 진출을 꾀하기 시작했다. 2001년 8월에는 대만, 9월에는 한국에 지분 투자를 통해 첫 번째 매장을 설립했다. 이후 아시아 전역과 미국에도 매장을 냈다. 다이소가 직접 진출한 경우도 있고, 현지 회사와 합작해 진출한 경우도 있다. 한국의 경우 아성산업과 협력해 진출한 상태다.

다이소 글로벌 홈페이지에는 한국 지점이 없는 것으로 돼 있으며 글로벌 매장 숫자에서도 한국 매장은 빠져 있다. 한국 다이소가 한국 기업인 아성다이소의 소유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예민한 한일관계를 감안해 표시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아성다이소의 지분은 박정부 아성산업 회장과 아성산업 계열사가 66%를, 일본 다이소가 34%를 각각 보유하고 있다.

현재 국내의 다이소 매장은 1300여개 정도다. 1층 규모의 작은 매장부터 4층짜리 건물을 통째로 차지한 매장까지 다양한 크기를 갖추고 있다. 약 3만2000개의 물건을 유통 중이다. 대부분 5000원 이하의 저가 상품이고, 2000원 이하인 제품도 전체의 70%에 달한다. 2018년 매출은 1조9785억원을 기록해 전년 대비 20.2% 성장했고, 영업 이익도 1251억원에 달한다. 이제 다이소는 한국인의 삶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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