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할 곳이 없다'..손정의도 외면한 日스타트업 시장

윤세미 기자입력 : 2019-07-11 06:54
세계 3대 경제국 日 유니콘 2개 불과..韓 9개 日신생기업, 자본 조달 위해 '쉬운 상장' 의존 위험 회피하고 안정 추구하는 분위기도 한몫
"우리는 유니콘 사냥꾼이다."

일본 소프트뱅크 손정의(일본명 손 마사요시) 회장이 지난달 20일 소프트뱅크 주주총회에서 한 말이다. 유니콘이란 기업가치 평가액이 10억 달러(약 1조원)를 넘는 비상장 스타트업(신생벤처기업)을 가리킨다. 경쟁력 있는 스타트업에 대한 전략적이고 적극적인 투자를 계속하겠다는 얘기였다. 

손 회장은 스타트업 투자계의 거물로 통한다. 소프트뱅크와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가 주도해 조성한 1000억 달러 규모의 세계 최대 기술투자펀드인 '비전펀드'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75개 유니콘에 투자해왔다. 차량공유업체 우버와 사무실 공유업체 위워크 등이 대표적이다. 한국 전자상거래 업체 쿠팡 역시 비전펀드에서 30억 달러의 자금을 유치한 바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천문학적 돈을 미래 사업에 쏟아붓고 있는 손 회장의 눈에 정작 본국인 일본 기업은 하나도 들지 못했다는 점이다. 뒤집어보자면 일본 스타트업 시장이 그만큼 투자에 매력적이지 않다는 방증일지 모른다. 
 

[그래픽=아주경제]


◆세계 3대 경제 대국 日, 유니콘은 2개가 전부

리서치업체 CB인사이츠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에는 약 360개의 유니콘이 있는 것으로 집계된다. 이 중 거의 절반은 미국에 있고 4분의 1은 중국에 있다. 이 두 나라는 거대한 자본과 시장을 가진 만큼 당연한 결과로 보이기도 한다. 연간 스타트업에 투자되는 금액이 각각 1000억 달러를 넘길 정도다. 

세계 3대 경제대국 일본은 어떨까. 놀랍게도 2개가 전부다. 한 곳은 만화 채색을 자동화하는 인공지능(AI) 개발업체 프리퍼드네트웍스(Preferred Networks), 다른 한 곳은 도쿄 소재 가상화폐 거래 플랫폼인 리퀴드그룹(Liquid Group)이다. 일본은행의 대규모 통화부양책 덕에 투자환경이 우호적이고 정부가 적극적으로 벤처 투자를 장려하고 있음에도 유니콘이 2개밖에 없다는 것은 의외일 수밖에 없다. 비교하자면 인도에는 유니콘이 18개, 한국에는 9개가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최근 오피니언을 통해 이 같은 일본의 유니콘 기근 현상의 배경을 조명했다. 그중 하나로 거론한 게 '낮은 상장 문턱'이었다. 유니콘은 수천억원대 대규모 투자를 받으면서 탄생해 증시에 상장이 되면서 생을 마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상장 후엔 더 이상 유니콘이 아니라는 얘기다. 

실제로 성장성이 높은 스타트업으로 구성된 도쿄 증권거래소의 마더스지수는 상장기준이 낮기로 유명하다. 미국 나스닥의 경우 상장을 위해 최소 125만주의 유통주식이 필요하다면, 마더스지수의 경우 2000주만 있으면 된다. 신생기업들이 벤처캐피털을 설득하는 힘든 과정을 생략하고 손쉽게 자본을 조달하기 위해 상장을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인 셈이다.

그 결과 마더스지수에는 투자자들에게 확실한 믿음을 주지 못하는 소형주가 난무하고 있다. 마더스지수 편입 283개 기업 중 96%가 시가총액이 10억 달러에 못 미친다. 나스닥의 경우 그 비율이 30% 수준으로 훨씬 낮다. 지난 2년 동안 상장으로 생을 마친 유니콘은 중고물품 거래 앱인 메루카리(mercari)와 클라우드 기반 명함관리 앱인 산산(Sansan)뿐이다. 

이는 악순환으로 연결된다. 손 회장과 같은 큰손은 좋은 선택의 여지가 적은 일본 대신 해외로 눈을 돌리고, 일본 신생기업들은 회사를 유니콘으로 키워줄 투자자를 찾지 못한 채 자금 확보를 위해 상장을 서두르게 되기 때문이다. 

도전보다 안정을 선호하는 일본의 사회적 분위기 역시 유니콘 기근 현상에 일조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일본 젊은이들은 스타트업보다 도요타와 같은 대기업에서 일하는 것을 훨씬 선호한다. 젊은이들의 위험 회피는 창업률 하락으로 이어지며, 신생기업은 우수 인재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또 일본 스타트업 창업자들은 실리콘밸리 창업자들과 다르게 투자자들에게 자금을 요구할 때 무척 소극적인 것으로 유명하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사진=연합뉴스]



◆'2023년까지 유니콘 20개 만들라' 아베의 주문

다만 창업 초기 회사들이 자금 조달을 주로 증시 상장에 의존하던 추세에도 서서히 변화 조짐이 보이고 있다고 니혼게이자이가 전했다. 올해 3월까지인 2018/19 회계연도에 일본 스타트업이 조달한 벤처캐피털 자금이 3457억엔(약 3조7500억원)을 기록, 상장을 통해 조달한 2200억엔을 웃돌면서다. 2019/20 회계연도에는 사상 처음 4000억엔대에 이를 전망이다.

여기에는 대기업들이 스타트업과 협력하는 '오픈 이노베이션'의 영향이 컸다는 분석이다. 일본에서 지난 4년간 스타트업 투자를 위해 기업형 벤처캐피털(CVC)을 설립한 기업은 55곳에 이른다고 한다. 지난해 일본 대기업들이 스타트업에 10억엔(약 108억원) 이상 투자한 경우는 34건에 달했다.

일례로 모바일 결제 플랫폼인 오리가미(Origami)는 지난해 9월 도요타와 도요타파이낸스로부터 67억엔을 유치했다. 클라우드 기반 회계 소프트웨어 제공업체 프리(Freee)는 네이버 라인, 미쓰비시UFJ은행 등으로부터 65억엔을 확보했다. 성장 잠재력이 큰 스타트업이 일본의 산업 구도를 바꿀 것이라는 기대 속에 투자금이 계속 유입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현재 일본의 유니콘은 2개에 불과하지만, 유니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후보 기업들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기업가치 평가액이 유니콘의 10분의 1(1억 달러) 이상인 이른바 '차세대 유니콘' 수는 올해 47개로 1년 전에 비해 2배 넘게 늘었다. 9000만 달러에 이르는 스타트업은 22개로 집계된다. 오는 2023년까지 유니콘 20개를 만든다는 목표를 내건 아베 신조 일본 정부에도 반가운 소식일 터다. 아베 정부는 정부 지원을 확대하고 투자를 촉진하는 등 스타트업 활성화 정책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일본무역진흥기구(JETRO)의 니시카와 소타로는 "일본 정부는 경제 성장이 제조업과 기술을 장악한 주요 기업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틀에 박힌 사고방식으로는 급변하는 기술 변화 속도를 따라가기 어렵다"면서 "아베 정부가 경제 주요 정책 중 하나로 스타트업 육성을 추진하고 있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아주경제와 컴패션의 따뜻한 동행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네티즌 의견 0
    0 / 300

    실시간 급상승

    9.9초 더보기

    아주 글로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