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창희 칼럼] '기생충'이 환기하는 ‘고통’에 대한 감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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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창희 미디어미래연구소 실장
입력 2019-06-18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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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창희]


황정은의 「누가」(『아무도 아닌』, 파주: 문학동네, 2016)는 층간소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갈등에 관한 얘기다. 최근에 이사를 온 주인공은 대체로 집에 만족하지만 이웃들이 층간소음의 범인이 누구인지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이는 통에 편할 날이 없다. 그는 가끔 이 집에서 살다가 집을 자신에게 넘겨준 한 노인을 생각한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내가 그를 내쫓은 것은 아닐까? 나도 미래에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닐까? 주인공은 이러한 불안과 염려 속에서 층간소음의 주범으로 몰릴까도 함께 걱정해야 하는 처지다. 이 단편에서 공간과 소음을 두고 치열한 기 싸움을 벌이는 주민들은 사회적 구조 같은 것을 돌아볼 여력이 없다. 결국 가까운 곳에 보이는 이웃들을 의심하고 원망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간다.

「누가」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한국사회에서는 개인이 안온하게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하다. 비단 주거 공간만 그런 것이 아니다. 개인이 국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공간에 대한 점유권 문제는 심각한 수준이다. 도시 곳곳에 들어서 있는 <스타벅스>에 항상 사람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 것은 공공성을 보장해 줄 수 있는 공간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제72회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경사가 아닐 수 없으나 이 영화를 본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어쩔 수 없이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다. 이 불편함은 영화의 수준 때문이 아니라 평소에는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과 관련되어 있다.

이하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다. '기생충'은 공간에 대한 점유권이 없는 이들이 꿈꾸는 판타지가 낳는 비극을 다룬다. 아니 판타지라는 말은 틀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자신들이 일하는 일터이기도 한 지상의 공간을 탈취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으로 점유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영화는 특정한 국면을 계기로 같은 계급의 두 가족이 싸우다가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지고 근세(박명훈 분)가 숨어들어 있던 공간의 주인이 기택(송강호 분)으로 바뀌는 이야기가 된다. 공간의 변방으로 쫓겨난 자들은 결국 자신들끼리 싸울 수밖에 없는 처지에 내몰린다.

아버지를 지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기우(최우식 분)가 내놓은 계획은 관객 입장에서는 허망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그 허망함의 이면에는 쉽사리 선(영화를 보신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이 영화에서 ‘냄새’와 함께 가장 중요한 표현 중 하나가 ‘선’이다)을 넘어올 수 없는 계층의 고통이 자리한다. 근세와 기택이 지하에서 어렵게 보내는 모스 부호는 지상의 공간으로 나올 수 없는 자들이 보내는 고통의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밖에는 읽을 수 없다. 근세와 기택과 같이 공공의 영역에서 발화하기 어려운 존재들은 메시지를 전달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청자의 입장에서 그 메시지를 들어 보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으며, 이는 대중적인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하는 미디어가 수행해야 하는 역할일 것이다. 예술, 미디어, 대중문화가 가지는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고통을 함께 감각하는 계기를 만드는 것이다.

기생충의 러닝타임 131분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기생충을 보고 난 저녁 내 머릿속을 지배한 것은 응원하는 프로야구팀의 승패였다. 많은 이들이 나와 같이 자신에게 다급한 다른 무엇 때문에 금세 영화가 주는 메시지를 잊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눈감고 있는 불편한 진실을 131분 동안 공유하는 경험은 결코 작은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그리고 그 불편함은 문득문득 우리의 일상에서 감각된다. 그러면 아마도 '기생충'이 생각날 것이다. 짧고 자극적인 콘텐츠가 넘쳐난다. 여러 플랫폼들은 이러한 콘텐츠들을 이용하기 편리한 방식으로 추천해 준다. 현재의 미디어 환경은 콘텐츠를 편리하게 이용하는데 최적화되어 있다. 영화 기생충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불편함이고 이 불편함의 정체는 공간에서 배제되어 있는 이들의 고통이다.

문학평론가 김형중은 예술의 최소 조건을 ‘고통’이라고 했던 아도르노를 빌려 예술의 기능을 ‘고통’을 환기시키는 것이라고 지적한다(『변장한 유토피아』. 서울: 랜덤하우스코리아, 289쪽). 영화 '기생충'이 우리에게 환기하는 것은 공간에 대한 점유권을 잃어버린 이들이 느끼는 타인의 고통이다. 그것을 함께 감각 할 수 있는 감수성은 앞으로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덕목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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