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칼럼] 외교는 동문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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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식 객원 논설위원 (전 국회 부대변인)
입력 2019-05-29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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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임병식 객원 논설위원]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듯했습니다.” “눈은 쥐와 같았는데 두려워할 위인이 못 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상반된 인물평이다.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과 부사(副使) 김성일(金誠一)이 만나고 온 도요토미는 이렇게 달랐다. 1591년, 선조는 두 사람을 일본에 파견한다. 침략 가능성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이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 서인과 동인으로 꾸렸다. 그러나 당리당략에 매몰된 보고는 오히려 판단을 흐리게 했다. 선조는 도요토미를 얕잡아 본 김성일에게 힘을 실어줬다. 결과는 조선 전 국토가 유린됐다. 황윤길과 김성일 간 일화는 외교사를 언급할 때마다 거론된다. 외교에서 사소한 실수나 오판은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지난 역사에는 이 같은 일들이 숱하게 널려 있다.

외교관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균형과 기밀 유지다. 편향된 시각에 머물러서도 안 되지만 기밀 유지는 기본이다. 유출될 경우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나아가 상대할 수 없는 대상으로 인식된다. 정상끼리 전화 통화라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는 이유다. 그런데 강효상 의원과 한국당은 궁색한 논리로 본질을 흐리고 있다. 그들이 주장하는 알 권리와 공익제보는 얄팍한 변명이다. 외교 전문가들은 한 목소리로 비판한다. 반기문 전 UN사무총장은 “정상 간 통화 내용 보장은 기본, 있어서는 안 되는 일", 김숙 전 UN대사는 "자기 합리화를 위해 알 권리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 다른 나라 같으면 실형", 천영우 전 외교안보수석은 "책임 있는 정당이라면 출당할 일", 윤상현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은 "국익을 해치는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윤상현 의원은 강효상 의원과 같은 당이다. 그만큼 사안이 간단치 않다는 반증이다.

한국당 행태는 전형적인 물 타기다. 정청래 전 의원을 끌어들이고, 서훈 국정원장과 양정철 민주연구원장 간 만남을 호재로 여긴듯하다. 정청래 전 의원은 “로데이터(원 자료)를 갖고 있다”고 했지만 자기 과시에서 비롯된 발언으로 보인다. 현 정부와 긴밀함을 보여주려는 의도에서 오버했다. 설령 그렇다 해도 강효상 의원 잘못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정청래는 정청래 대로, 강효상은 강효상 대로 시시비비를 가려야 옳다. 잘못이 있다면 합당한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하다. 서훈과 양정철 만남 또한 별개 사안이다. 국정원 법 개정으로 국정원이 국내 정치에 개입하는 건 원천 봉쇄됐다. 이를 잘 알고 있음에도 억지를 부리고 있다. 국민들 눈에는 잘못을 가리려는 후안무치한 행동이다.

이번 사태를 통해 돌아봐야 할 사안은 오히려 다른데 있다. 공직사회에 만연한 뿌리 깊은 연고주의와 공직기강 해이다. 학연, 혈연, 지연은 어느 정권, 어느 조직에나 상존한다. 같은 고향, 같은 학교라면 아무래도 정서적으로 공유할 게 많을 것이다. 그러니 친교나 친목 차원에서 만남까지 나무랄 일은 아니다. 문제는 공적 영역에까지 연고를 끌어들여 근본을 망각하는 행태다. 고교 선후배끼리 외교 기밀을 주고받은 행위는 어떤 이유로든 용납하기 어렵다. 공직사회를 고교 동문회쯤으로 여긴 몰지각한 행태다. 적어도 공직자라면 자신이 처한 위치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 동문 선후배가 공직을 앞설 수 없다.

다음은 공직기강 해이다. 생명보험회사 직원이 발견한 하인리히 법칙(1대 29대 300)이 있다. 큰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사소한 잘못이 쌓인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큰 사건 1건에 앞서 작은 사건 29건이 있고, 300건에 달하는 조짐이 있다는 것이다. 외교 기밀 누설도 이런 연장선상에서 비롯됐다. 그동안 외교부에는 크고 작은 일들이 끊이지 않았다. 구겨진 태극기는 물론이고 발틱을 발칸으로, 스로바키아를 체코슬로바키아로 오기했다. 의전실수도 있었다. 대통령은 말레이시아에서 인도네시아 인사말을 했다. 또 비위로 강제 소환된 고위직 외교관도 적지 않다. 외교부는 “온정주의를 베풀지 않겠다”며 강도 높은 징계를 예고했다. 강경화 장관과 조윤제 주미 대사 또한 이런 원칙에서 자유로운 지 물어야 한다. 

한국당은 수준 낮은 변명이나 치졸한 말장난을 그만 두어야 한다. 진솔한 사과와 합당한 조치를 취하는 게 맞다. 유출 자체가 문제다. 정상끼리 주고받은 대화가 공개된다면 어느 나라가 상대할 것인가. 신뢰 저하는 당연하다. 이미 부작용은 나타나고 있다. 다음 달 말 트럼프 대통령 방한이 예정돼 있다. 그런데 주미 대사관을 기피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의도나 과정은 중요치 않다. “기강 해이나 보안 의식이 약해졌다”는 핵심을 새겨야 한다. 임진왜란 300여년 후 일이다. 조선을 강제 병합한 통감부 자작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조선을 깔보는 글을 썼다. “예부터 조선인은 서로 어긋나고 이익만을 위해 싸운다. 한 당이 득세하면 다른 정파를 해치고, 한 정파가 세력을 거두면 다른 당을 번번이 넘어뜨린다. 서로 맞서고 배척하는 그 끝을 알 수 없다. 그러다 마침내 파산한다.” 지금 우리 국회가 이러지 않는지 돌아볼 때다. 둘 다 파산하지 않으려면 반대를 위한 반대를 그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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