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의 하이브리드角]​ 고조부(高祖父) 서울 입성기와 강남부동산 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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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 논설위원
입력 2019-05-21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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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조부 한강도하 대작전
일제시대, 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즉 고조부(高祖父)는 우국지사, 독립투사 아닌 경기도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평범한 농부였다. 1920년대 줄줄이 태어난 자식들, 그는 결심했다. 한강을 건너 위쪽으로 가기로, 경기도에서 서울로 입성하기로…한강 도하(渡河)라는 일생일대의 결단을 실행에 옮겼다.

그가 수십 년 동안 농사를 지어온 한강과 맞닿은 남쪽 땅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청담리. 푸를 청(淸), 연못 담(潭) 한자 지명 그대로 푸른 연못이 있었고, 땅 좋고 물 맑아 청숫골이라고 불렸던 마을이다. 지금의 영동대교 아래 강가, 살기 좋았던 고조부의 삶터였던 그곳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청담동이다.

시골 농사꾼인 그가 ‘청담리’를 떠나 서울행을 결심한 이유는 지금 모든 이들이 ‘강남’에 가려는 이유와 다르지 않았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큰 이유는 ‘자식 농사’ 때문이었다. 그 다음은 비즈니스, 강 건너 서울 동쪽 평야지대에서 짓는 농사로 더 많은 돈을 벌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또 노면전차가 다니는 최첨단 교통, 무성영화를 볼 수 있는 서울살이 역시 동경했을 게다. 오랜 천주교 신자라 성당이 가까워지는 건 큰 은혜였다. 게다가 가까운 재래시장은 각종 한약재를 쉽게 구할 수 있어 건강한 삶도 누릴 수 있었다. 하늘에 계신 고조부는 자손들이 ‘수도 서울’에서 잘 자라 세상에 이바지하는 모습을 보며 ‘한강 도하 결단’에 대한 보람을 찾으실 게다. ‘서울이 좋다’하시며.

# 2. 강남이 좋습니까?
청담리를 떠나 서울 강북에 입성한 고조부가 떠오른 때는 지난 7일, 3기 신도시 발표를 보면서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기자들에게 “강남이 좋습니까?”라고 반문했다. 김 장관의 답변을 자세히 살펴봤다. “강남의 수요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는데 강남이 좋습니까? 저는 국민들이 원하는 어느 지역에 살고 싶다고 했을 때 원하는 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수도권뿐만 아니라 전국의 모든 지역이 국민들의 원하는 바람들을 담아내는 주거 여건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특정지역에 살아야 만이 주거 만족도가 높은 나라가 아니라 어디에 살더라도 주거 만족도가 높은 나라를 만드는 것이 저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현재 사는 곳이 있고, 살고 싶은 곳이 있다. 사는 곳과 살고 싶은 곳이 같으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사는 곳과 살고 싶은 곳이 다르면 ‘이주 본능’이 발동한다. 여건이 되면(무리해서라도) 그 본능을 실행에 옮긴다. 부동산 대책의 요체는 서울 강남에 살기를 원하는 이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강남 같은 곳’을 확산시키는 것이다. 김 장관의 말 그대로 ‘어디에 살더라도 주거 만족도가 높은 나라’가 부동산 정책의 핵심이다.

집은 사는(구매) 게 사는(거주) 거라는 이 정부의 기본 철학에도 들어맞는다. 강남 같은 곳을 새로 만드는 것도 중요하고 기존의 비강남지역을 강남처럼 바꿔야 한다. 일제시대 청담리가 아니라 지금 같은 ‘청담동’이었다면 고조부가 당신의 고향, 삶터를 버리고 굳이 서울 강북으로 떠났을까?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은 교육, 경제, 문화 등을 이유로 강남 같은 곳에서 살고 싶어 한다. “강남이 좋다”라며.

# 3. 죽은 도시를 떠나야 하나
고조부 서울 입성 이래 여전히 서울에 본가는 있지만 필자는 여차저차 경기도 고양시에 거주한 지 22년째다. 지난 18일 오후 8시쯤 고양시 주엽공원에서 열리는 정부의 부동산정책 규탄 집회 현장을 찾았다. ‘일산파주검단 신도시 연합회’ 주최, 자리를 잡고 앉은 이들과 서있는 사람 합쳐 4천 명쯤 됐다. 곳곳에 ‘1,2기 신도시 사망’, ‘3기 신도시 철회’ 현수막과 “000 물러나라” 구호가 난무했다. 이들 주장의 요점은 하나다. 신도시를 만들 때마다 약속했던 ‘강남처럼’을 지키라는 거다. 고양, 파주, 검단을 ‘강남 같은 곳’으로 만들라는 거다.

국민들의 주거만족도를 높이는 게 정부의 역할이라면,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 하지 말고 그 구체적인 계획과 실행방안을 밝혀야 한다. 그렇기에 김현미 장관은 “강남이 좋습니까?”라고 묻기보다는 “강남이 좋지요. 지금 여러 분이 사는 곳을, 3기 신도시를 강남처럼 만들겠습니다”라고 말했어야 했다.

집도 땅도 없는 필자는 일산 혹은 파주에 계속 살며 강가와 동네 뒷산, 호수 산책을 즐기고 도서관과 공원을 누리고 싶다. 일산 인근 아파트를 살(구매) 생각도 없지 않지만 고조부를 따라 다시 서울 입성의 결단을 내려야 할지 고민이다. 물론 고조부가 농사 짓던 청담동은 꿈도 꿀 수 없다. 그럼에도 어떤 결단을 내리든 죽은 도시를 도망치듯 떠나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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