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선의 검보 이야기⑤] 항우의 얼굴로 본 ‘패왕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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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선 상명대 교육대학원 중국어교육전공 교수(베이징사범대 문학박사)
입력 2019-05-1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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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년 ‘초한쟁’ 극본 축약해 최초 공연 기록

  • 1993년 천카이거 감독 영화로 전 세계서 흥행

  • 고집불통·슬픔 이미지 검보에 고스란히 투영

검보(臉譜)는 중국 경극에 등장하는 배우의 얼굴 분장 중 하나로 크게 소면(素面) 분장과 도면(塗面) 분장으로 나뉜다.

소면 분장은 주로 남자 주인공인 생(生)역과 여자 주인공인 단(旦)역에 사용되며, 얼굴에 살색과 분홍색 분을 먼저 살짝 바르고 검은색으로 눈과 눈썹을 그리는 분장법이다.

도면 분장은 주로 호걸이나 악당인 정(淨)역과 어릿광대인 축(丑)역에 사용되며, 극 중 역할에 따라 색과 도안을 그려 넣는 색채 화장을 말한다.

검보는 바로 모든 정역과 축역의 도면 분장에 대한 통칭이다. 검보라는 명칭은 대략 청나라 시대 말엽에 생겨났으며, 본격적으로 문헌에 보이기 시작한 것은 중화민국 초기부터다.

오늘날 검보는 일반대중들에게 경극 얼굴 분장의 대명사로 널리 인식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공연예술을 대표하는 시각 이미지로 자리를 잡았다.

해당 지역의 문화적 축적물인 검보를 통해 중국의 문화적 코드와 패러다임을 짚어본다. <편집자 주>


경극 ‘패왕별희(覇王別姬)’가 한국에서 새롭게 태어났다. 지난 4월 국립창극단에서 경극 ‘패왕별희’를 창극으로 만들어 공연한 창극 ‘패왕별희’가 성황리에 끝났다.

창극 ‘패왕별희’는 ‘경극을 품은 창극’이라는 참신한 한·중 공연예술 교류 시도로 공연 전부터 주목을 받았다. 이번 공연을 계기로 한·중 문화계에서의 긍정적인 평가와 미래의 발전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패왕별희는 ‘패왕 항우(項羽)가 애첩 우희(虞姬)와 이별하다’라는 뜻이다. 경극 패왕별희는 명대 소설 ‘서한연의(西漢演義)’ 79회와 80회의 내용을 가져 왔다.

진(秦)나라 말, 한(漢)나라의 유방과 초(楚)나라의 항우는 홍구(鴻溝)를 경계로 대치한다. 한의 군사(軍師) 한신은 이좌거를 거짓으로 투항시켜 항우를 출병토록 유인한다.

항우는 우희와 수하 장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출병해 구리산에 진입하다 한의 복병을 만나 해하(垓下)에서 포위된다.

항우는 유방에게 초나라를 빼앗겼음을 깨닫고, 길게 탄식하며 그의 애마 추를 어루만지고는 우희에게 작별을 고한다. 우희는 항우를 위로하기 위해 술을 올리고 검무를 추다 자진하고, 항우는 홀로 탈출해 오강(吳江)에서 자결한다.

이 내용으로 공연하는 경극은 ‘극의 초점을 어디 두느냐’에 따라 제목을 ‘초한쟁(楚漢爭)’, ‘구리산(九里山)’, ‘해하위(垓下圍)’, ‘십면매복(十面埋伏)’, ‘오강자문(吳江自刎)’, ‘오강한(吳江恨)’, ‘망오강(望吳江)’ 등으로 붙였다.

1922년 양샤오러우(楊小樓, 1878~1938)와 메이란팡(梅蘭芳, 1894~1961)이 1918년 양샤오러우와 상샤오윈(尙小雲, 1900~1976)이 주연했던 ‘초한쟁’의 극본을 축약하고 수정해서 패왕별희라는 제목으로 처음 공연했다. 이 공연은 청중의 심금을 울리며 흥행에 성공했다.

패왕별희의 성공은 당시 가장 인기 있던 ‘경극의 꽃’ 메이란팡 효과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작용했다. 기존의 항우 관련 극과 달리, 항우와 우희를 비극적인 사랑의 주인공으로 스토리텔링하고 전면에 부각시켜 제목으로 삼은 것이다.

탄탄한 서사, 메이란팡의 스타성, 대중의 공감대 형성 이 세 박자가 만든 결과는 공연 후 메이란팡의 대표 작품이 됐을 뿐 아니라, 중국은 물론 미국, 일본 등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매이란팡과 양샤오러우의 '패왕별희' 공연. [사진=바이두 캡처]


이 모든 것은 1993년 감독 천카이거(陳凱歌가 제작한 장궈룽(張國榮·장국영), 궁리(鞏俐·공리), 장펑이(張豊毅·장풍의) 주연의 영화 ‘패왕별희(Farewell My Concubine)’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

여기에 영화 ‘패왕별희’는 세계영화계의 주목을 받고 있던 천카이거 감독과 초호화캐스팅, 반사(反思)와 상흔(傷痕)과 같은 시대정신, 동성애, 뛰어난 영상미 등이 잘 어우러져 세계적으로 대흥행했다. 이 영화는 전 세계인들에게 중국 공연예술은 경극, 경극은 패왕별희라는 인식을 깊이 심어 줬다.
 

영화 '패왕별희'의 한 장면. [사진=바이두 캡처]


경극 패왕별희도, 영화 패왕별희도, 창극 패왕별희도 모두 후세에 길이 남을 대성공을 거뒀지만, 정작 작품 속 주인공 항우는 중원을 휩쓸었던 상남자 패왕에서 비운의 고집불통 로맨티스트의 대명사로 이미지를 굳힌 지 100년이 다 돼 간다. 그래서 언뜻 본 항우 검보는 서초(西楚) 패왕의 검보 치고는 너무 나약하고 애처롭다.
 

항우 검보. [이미지=도서출판 학고방 제공]


항우 검보는 흑색 십자문강차검(十字門鋼叉臉)이다. 십자문검은 주요색 한 가지로 이마에서 코 아래까지 칠해 인물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주요색으로 그려진 선과 눈 부위의 구도가 십자형을 이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극에서 긍정적인 영웅과 무장을 나타내지만, 성격이 고집불통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항우의 고집불통 성격은 검보에서 사용한 색에도 잘 나타나 있다. 항우 검보는 흰색 얼굴 바탕에 검은색으로 상징 아이콘을 그렸다. 이로써 다른 사람의 권유를 듣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만 행동하는 사람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항우 검보는 울고 있는 눈과 눈두덩이를 가로로 배치해 그려 넣었다. 세로에는 미간을 중심점으로 삼아 위아래 대칭으로 항우가 사용했던 무기 초천검과 초진창을 그려 넣었다. 검보의 명칭에 강차(鋼叉)는 철로 만든 창이라는 의미다. 무기 아래 코 부분은 우는 모양의 콧방울과 코 부위를 그려 넣었다. 양쪽 눈썹은 초서로 쓴 목숨 수(壽)자를 그려 넣었다.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나이 서른에 요절한 것을 상징한다.

항우 검보에서 읽어 낼 수 있는 키워드는 ‘고집불통’ ‘무기’ ‘단명’ ‘슬픔’이다. 그중 가장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고집불통으로, 항우를 슬프게 만들었고 결국 단명에 이르게 했던 이유다.

항우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먼저 항우는 천하를 얻을 기회와 화근이 될 유방을 제거할 수 있는 상황이 생겼을 때마다 매번 주위의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책사와 수하 장수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고집대로 강행했다.

항우가 자신의 능력만 믿고 주위 사람들의 충언을 받아들이지 않자, 측근들은 항우와 초나라에 희망이 없음을 깨닫고 하나둘씩 한의 유방에게로 떠났다. 이후 그들은 항우에게 독화살이 되어 돌아왔다. 항우의 마지막 전투인 해하전투에서 전투 책략을 짰던 군사 한신, 군대를 거느리고 선봉에서 싸웠던 장수 팽월, 항우를 끝까지 뒤쫓아가 자결한 항우의 시신을 유방에게 바쳤던 장수 여마통 모두 항우의 수하였으니 말이다.

또 항우는 해하전투에서 참패했지만 도망가서 재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오강의 나룻배 사공 노인의 얼굴을 보고 초라한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 재기의 기회를 포기하고 자살을 택했다. 인생은 선택이라지만, 죽고 사는 문제의 선택은 그 어느 때보다 신중했어야 했다. 자살하는 이 누구도 죽음을 원하지 않지만, 고통스러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

초나라 10만 병사가 대장 항우 한 사람만을 바라보며 목숨을 바치던 절체절명의 순간, 항우는 개인의 명예와 자존심을 지키는 것만을 생각하고 10만 목숨값과 같은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었다. 너무나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항우의 패배는 어쩌면 처음부터 당연한 결과였던 건 아닐까.

죽음과 바꿨던 자존심이 낳은 후과(後果)는 시대와 국경을 넘어 두고두고 그의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항우는 초기의 영광보다는 최후의 패자로, 그리고 중심인물에서 주변 인물로 민중들에게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 바로 항우 검보는 시각화된 민중 기억의 반영이다.
 

(왼쪽부터) 한신, 팽원, 여마통 검보. [이미지=바이두 캡처(한신). 도서출판 학고방 제공]


리더가 갖춰 할 가장 중요한 능력으로 경청, 소통, 설득을 꼽을 수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경청하지 않고 소통하지 않은 리더들에게 항우가 유방의 군대에 사면초가(四面楚歌) 상황에 처해 구슬피 읊조리며 불렀던 해하가를 들려주고 싶다.

힘은 산을 뽑을 만했고 기개는 세상을 덮을 만했건만,
형세가 불리하니 애마 추마저 나아가려 않는구나.
애마 추가 나아가려 않으니 어찌할거나.
우희여 우희여 어찌하면 좋으랴.
(力拔山兮氣蓋世, 時不利兮騅不逝, 騅不逝兮可奈何, 虞兮虞兮奈若何.)



 

[정유선 상명대 교육대학원 중국어교육전공 교수(베이징사범대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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