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겸의 차한잔] 출구 없는 우리네 인생, 대도무문(大道無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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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겸 칼럼니스트(문학박사)
입력 2019-05-16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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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이나 집이나 대화를 안 하는 우리에게 하루하루는 힘든 고통의 연속일 따름이다. 고통에서 탈출할 수 없을 것 같은 벽 안에 갇힌 우물 안의 개구리 나아가 우울한 개구리가 됐다. 스스로 낸 소리가 반동돼 돌아온 소리조차 나갈 틈이 없어 지옥의 소리 같은 아우성으로 오래전에 청력을 상실해 버린다. 어쩌면 스스로 귀를 닫아버렸다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인 듯싶다.

우리가 오래전부터 법처럼 공동으로 하나씩 세워져 있는 벽 외에도 자신들만의 치외법권이나 편견 선입견 등의 고정관념의 벽을 높이 굳건하게 세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사방에 만들어진 벽과 만든 벽을 채워가다 보면 결국 사방이 꽉 막힌 출구 없는 인생이 돼 버리나 보다. 서양화의 큐빅이라면 모를까 동양화의 여백 같은 여유로운 삶은 점점 더 불가능해져, 마치 이상향인 무릉도원의 일처럼 느껴질 수 있다.

멀리서 보거나 2차원적으로 보면 그렇지만, 다시 대화를 시도하기 위해 다가가면 문이라고 할 만한 출구는 없더라도 내 몸 하나 드나들 틈은 있다. 만리장성에도 쌓을 수 없는 지형이 있으며 모든 성에는 비밀의 문은 없더라도 몸을 낮추면 개구멍이라도 있다는 생각을 못 하고 살아간다.

결국, 늘 분노를 폭발시켜 벽을 부수고 나가 진짜 벽에 갇히는 역행이나 퇴보로 인한 고통은 심화만 될 따름이다. 그동안 고통의 원인인 벽으로 느껴졌던 것들이 사실은 방어막이 되어준 것을 겨우 알게 되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을 넘어 천우신조일 것이다.

모든 일에는 해결의 열쇠가 있으며 그 열쇠로 열 수 있는 출구가 있기 마련이다. 열쇠조차 찾지 않고 열쇠를 찾아도 열쇠에 맞는 제 문을 제대로 찾지 못한다. 여유 없는 마음이기에 겨우 찾아도 한번 돌려봐서 잘 안 되면 아닌가보다는 인내 없는 짜증이라는 벽을 또 만들어 어렵게 얻은 열쇠조차 무용하게 한다.

늘 없다고 생각하는 스스로 마음을 바라봐야 하는데 무한경쟁 속에서 금권주의의 노예로 내몰린 현대인들은 아프기만 할 따름이다. 그나마 “미친 거 아냐?”라는 말을 스스로 던질 때마다 반성할 수밖에 없는 ‘내 탓’이 늘 감사하다.
 

[사진=하도겸 칼럼니스트(문학박사) 제공]


주역의 팔괘를 바라보면 늘 진법으로 사방이 다 막혀 있는 듯 착각하게 한다. 우주 천지가 다 하늘인 것 같아도 그 안에는 해와 달과 별, 그리고 또 다른 은하계가 있다. 벽에 걸린 시계처럼 하늘이 원형으로 된 것 같아도 내 눈이 우주를 담을 수 있게 타원형이며 안구가 원형일 따름이지 그 역시도 경계일 따름이다.

결국, 사방팔방 모두 땅의 모습을 보고 싶기에 만든 편의적인 방위일 따름은 아닐까? 그리고 그 모서리에 있는 각은 서로 접합된 부분이라는 뜻으로 다른 곳보다 견고하지 않을 수 있다는 뜻도 포함된다. 깨뜨려도 되고 살짝 벌려도 된다는 의미를 함축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견고해 보여도 다가가서 보면 늘 틈이 있고. 거꾸로 원래 벽이 없었으나 언뜻 보거나 듣고 있다고 믿은 우리네 탓이 더 큰 것도 알게 된다.

그렇게 사잇길을 빠져나가는 것도 아재 개그로 중도(Middle way)가 아닐까 싶다. 원래 큰길이었는데 작게만 보고 못 빠져나가는 꼴이 다들 지나가는 잘만 지나가는 넓은 길을 수억원의 외제차라고 생각해서 흠이 생길까 봐 엄두도 못 내는 ‘부자 초보 운전사’ 같다. 자존감 없이 자존심만 내세우는 우리 마음의 벽을 은유하는 것은 아닐까?

원래 벽은 있기도 하지만 없기도 하다. 대로는 아니라도 하더라도 사람 사는 곳이라면 완벽하지 않기에 골목길은 늘 있다. 벽과 벽 사이에는 그리고 공간적으로도 여러 개의 벽이 쳐져 있어 멀리서 볼 때는 하나의 만리장성과 같은 장벽이 쳐져 있을 뿐이다.

하지만 언제나 문은 있으며 벽이 없는 틈도 있다는 점. 고통을 해결할 방법이 있다는 점. 대화를 통해서 견고한 문도 열린다는 점 등등. 그러고 보면 하나를 보고 듣더라도 생각할 게 참으로 많다. 그걸 생각해 내는 것도 이제 유행도 지난 명상의 힘이 아닐까 싶다.

출구가 안 보이는 우리네 인생. 출구가 없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원래 벽이 없던 곳도 있으며 벽도 안만들 수 있는 힘도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아는 견문을 넓힌 소중한 어제였다. 단지 보고 듣는 어제에 멈추지 않고 스스로 깊고 넓게 생각해서 글을 쓰는 오늘. 그리고 실천하며 문을 달고 만드는 그런 수행 같은 삶을 사는 내일이기도 하다.

문사수(聞思修)로 삼세(三世)를 설명하는 대장부인 부처님께는 언제나 문 없는 큰길만 열어 있을 뿐인가 보다. 이 모든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벽을 만들고 부수고 언젠가는 이 모든 것을 떠나 사잇길을 찾다가 결국 그 자리에는 문도 필요 없는 대자연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도 인연(因緣)일 것 같다.

부처님오신날? 오시는 날? 오셨던 날인지 모르는 그 날에 한치도 변하지 않는 우리네 불교계의 폐습에 조계사 관불식에 한 손을 치켜세운 아기 부처님이 공존하는 이웃 종교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로서의 반배도 손사래를 친 한 사람을 보고도 자비롭게 웃을 수 있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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