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사당 지붕 위 '돔'은 미국을 따라한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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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수 기자
입력 2019-04-22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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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에 위치한 국회의사당 건물은 본래 여의도에 있지 않았다. 국회의사당은 태평로에 위치한 극장건물에 임의로 마련됐다가 1975년에서야 여의도로 이전돼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새로운 국회의사당 건립 계획이 처음 마련된 것은 1966년 5월이다. 당시 국회는 4가지 건립원칙을 세웠다. △남북통일을 대비하자 △양원제 운영이 가능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상징할 수 있는 역사적인 대규모 건물로 짓자 △국내 기술진으로 건설하자 등이었다.

건립 후보지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종묘와 사적지인 사직공원, 미군이 주둔하던 용산기지 내 골프장, 해병대 사령부, 여의도 등 10여곳이었다. 이 중 현재 위치인 여의도는 후순위였다. 당시 허허벌판이었고, 홍수피해가 잦았던 데다 일제강점기부터 비행장으로 사용된 공군시설이 들어서있어서 이전비용이 많이 들었고 교통여건도 나빴기 때문이다.

그러나 1967년 ‘한강개발 3개년 계획’이 발표되면서 여의도가 유력한 후보지로 떠올랐다. 밤섬을 폭파해 둑을 만들고 시범아파트 등 신도시를 조성하며 마포와 여의도를 연결하는 제4한강교인 마포대교를 건설하려는 서울시 계획에 힘입어 여의도가 최종 국회의사당 건립지로 확정됐다.

건립지 결정 후에는 설계가 문제였다. 건물이 갖는 상징성과 규모로 인해 설계에는 일반 공모까지 병행되는 등 많은 이들이 참여했다. 이 때문에 최종 설계안을 선정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열띤(?) 선정과정을 통해 1968년 12월 7일부터 25일 동안 1차 설계안이 완료됐다.

1차 설계안은 중층 캐노피에 기둥이 있는 형식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미국의회처럼 돔을 얹자는 의견이 더해졌고, 조선총독부 건물이었던 중앙청(5층)보다 높아야 한다는 요구가 추가됐다.이를 거쳐 지금의 국회의사당을 있게 만든 최종 설계도가 1969년 완성됐다.

건물이 갖는 상징성에 걸맞게(?) 그해 7월 17일인 ‘제헌절’에 건설이 시작됐다. 처음 설정된 건립원칙에 따라 우리의 자금·기술·자재만으로 의사당 건립이 추진됐으나, 사실상 ‘돌과의 싸움’으로 전해진다. 화강석 4만3000㎡, 대리석 2만7000㎡가 사용됐으며, 공사 개시 당시 전국에서 어렵게 찾은 석공이 250명이었던 것에 반해 완공 무렵에는 ‘프로급’ 석공이 2000여명까지 늘어났을 정도다.

특히 미국의회를 모방하기 위한 ‘돔’을 올리는 공사도 난제 중 하나였다. 돔 모양인 돌 자체 무게가 1000톤에 달했는데, ‘국내 기술만으로’ 이같은 무게를 들어 올리는 것이 당시 국내에서는 최초로 시도되는 작업이었다. 결국 하중 분산 모의실험만 일본에서 해본 후 실제로는 국내 기술을 최대한 활용했고, 끝내 돔을 올리는 데 성공했다.

건설 시작과 마찬가지로 준공식도 1975년 8월 15일 광복절에 거행됐다. 일수로 따지면 2200여일에 이르는 대장정이었다. 투입액은 135억원으로 1975년 당시 국가예산의 1% 수준이었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에 위치한 국회의사당 전경. [이정수 기자, leejs@a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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