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완의 월드비전] 北치는 '슈퍼 매' 존 볼턴이 전면에 나선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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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완 논설위원
입력 2019-03-26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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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들 만난 볼턴, 北의 '결렬 책임론'에 "부정확" (워싱턴 로이터=연합뉴스) 존 볼턴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이 15일(현지시간) 워싱턴DC 백악관 밖에서 기자들을 만나고 있다.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이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 책임자로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함께 지목한 볼턴 보좌관은 이 자리에서 최 부상의 책임론 주장에 "부정확하다"고 반박했다.

지난 달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에서 막판에 판을 깬 인물로 존 볼턴(70)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자주 언급된다.  그는 회담이 결렬되기 직전 개최된 확대 정상회담장에 갑자기 노란 봉투를 들고 나타난다. 그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옆에 자리하며 테이블 건너편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응시하는 모습의 사진은 여러가지를 암시한다. 회담을 앞두고 북·미간 치열했던 밀당에서 한발 물러서 있던 것으로 짐작되던 '슈퍼 매(超강경파)' 볼턴의 갑작스런 등장은 암울한 결말의 전조였다.

국제사회의 기대와 달리 하노이 회담이 '노딜'로 끝난 후, 볼턴 보좌관이 트럼프의 충직한 '행동대장'으로 변신하여 북한 '길들이기'의 전면에 나선 모양새이다. 그는 회담 후 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에서 미국이 원하는 비핵화 요구사항을 담은 '빅딜' 문서를 김 위원장에게 건넸다고 공개하기도 했다. 볼턴이 내민 노란 봉투 안의 문건에 적시된 것으로 알려진 생화학무기를 포함한 총체적인 대량살상무기(WMD) 폐기 요구, 그리고 영변 이외에 북한 곳곳에 산재된 핵시설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트럼프가 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언급했듯 북측을 깜짝 놀라게 했음이 틀림없다. 

볼턴은 북한에게 미국의 '싸움닭"이자 '저승사자'와 같은 존재이다. 영변 핵시설 단지 폐기 그것도 전부가 아닌 일부는 제외한 채 대북 제재 완화 등 그 대가를 요구한 것을 보면 트럼프에게 비장의 '볼턴 카드'가 있다는 사실을 가볍게 본 듯하다. 그가 대북 관계의 전면에 등장한다는 것은 북·미 회담의 결렬을 넘어 한반도 '비핵화'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과거에도 여러 차례  볼턴은 한반도가 평화체제 구축의 길로 나아가는 길목에 나타나곤 했다. 

1994 제네바 북핵 합의 무산 시킨 남자 

1994년 5월 북한이 영변의 5㎿ 원자로에서 연료봉을 인출하면서 촉발된 제1차 북핵위기는 그해 10월 미·북 제네바 합의로 봉합된다. 양국은 북한에 핵시설 동결 대가로 2003년까지 1000㎿ 경수로 2기를 함경남도 신포(금호)지구에 지어주고 매년 중유 50만t을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2002년 1월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악의 축(Axis of Evil)’에 이란, 이라크와 함께 북한을 포함시켰다. 같은 해 8월, 제임스 켈리 차관보가 이끄는 미 국무부 협상단이 평양을 방문한 자리에서 북측 인사들과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HEUP) 운영 여부를 두고 언쟁을 벌인다. 이후 백악관은 북한이 고농축우라늄으로 핵개발을 하고 있다고 시인했다며 "제네바 합의는 무효다"라고 선언했다. 

위 두 사건을 배후 조종한 인물은 다름 아닌 볼턴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국무부 군축 및 국제안보담당 차관이던 볼턴은 딕 체니 부통령과 함께 대북 초강경파인 네오콘(neocon) 세력의 중심이었다. 제네바 합의가 깨지면서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를 탈퇴하고 핵실험 도발을 이어가는 2차 북핵 위기가 시작됐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6자회담이 여러 차례 열리지만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한다. 

볼턴의 북한과의 악연은 계속된다. 2003년 7월 31일 국무부 차관이자 미국 측 6자회담 수석대표이던 볼턴은 한국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폭군적 독재자(tyrannical dictator)'라고 비난하고 북한 주민의 삶을 '지옥 같은 악몽(hellish nightmare)'으로 표현하며 북한을 분노케 했다. 다음 달 베이징에서 열리는 제1차 6자회담에 찬물을 끼얹는 발언이었다. 이후 북한 외무성은 그를 '인간 쓰레기, 피에 주린 흡혈귀"라고 맹비난 한다. 이 일로 6자 회담에서 볼턴은 배제된다. 애초부터 볼턴은 다자간 협의체제의 6자회담을 겉으로는 찬성했지만 회의적으로 보고 있었다.   

미국 유엔 대사 중 최대 논란의 인물 

부시 행정부 당시 볼턴은 거친 언행을 일삼는 무례한 외교관으로 낙인 찍히며 주위에 적들이 많았다. 하지만 업무에 대한 추진 능력은 대단한 사람으로 인정되곤 했다. 부시 대통령은 2005년 여야 반발로 볼턴을 유엔대사에 임명하기 위한 상원 인준이 어려워지자 휴회 기간을 틈타 임명을 강행했다. 그는 볼턴을 유엔 대사로 임명한 이유로 "맡은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당시 상원 외교위에서 볼턴에 대한 증언을 한 칼 포드 전 국무부 차관보는 그를 "윗사람에게 아부 떨고 아랫사람은 괴롭히는(kiss-up, kick-down) 사람"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또 공화당 소속 조지 보이노비치 의원은 "반대를 용인하지 않는 사람"이라며 임명 반대 의사를 밝혔다. 조 바이덴 민주당 의원은 "도자기 가게에 황소가 들어가는 것"이라고 비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지 알랜 상원의원은 볼턴이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지니고 그리고 원칙에 충실한 사람으로 UN 대사직에 적합한 인물로 칭송했다. 이코노미스트誌는 볼턴을 미국의  유엔 대사 중 가장 논란을 불러일으킨 인물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여하튼 그는 2005년과 2006년 유엔 주재 대사로 일하면서 직접 북핵 문제를 다루게 됐다.  2005년 6자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수립 내용을 담은 9·19공동성명이 나온다. 그러나 바로 다음 날 미국은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의 북한 계좌를 동결한다. 자금줄이 막힌 북한은 대포동 미사일을 발사하고 풍계리에서 제1차 핵실험을 실시한다. 볼턴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제재를 주도하며 북한 경제의 목을 죈다. 유엔 대사로 재직하면서 볼턴은 해외 주둔 미군이 국재형사재판소(ICC)의 재판 대상이 되지 않도록 100여개국과 협상을 벌여 동의를 얻어내기도 했는데, 그는 이때를 자신 정치 경력 중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꼽고 있다. 인디애나 대학교 데이비드 보스코 국제학부 부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볼턴은 유엔의 외교관들 사이에서 '극단적인 이데올로기의 인물'로 평판이 좋지 못했다고 소개했다. 

콧수염이 문제야 

그는 행정부를 떠나있던 중에도 폭스 뉴스 네오콘의 이론적 근거지라고 볼 수 있는 미국기업연구소(AEI)에서 선임연구원으로 일하면서 대북 강경 발언을 이어간다. '콧수염'이 트레이드 마크인 볼턴은 핵개발 포기에 대한 대가 차원에서 북한에 보상을 제공하면 안 된다고 설파하기도 했다. 2007년 그가 펴낸 회고록 '항복은 선택이 아니다' (Surrender is Not an Option)에서 다자 협력에 의한 전통적인 외교관의 협상을 '항복'이라며 조롱한다. 트럼프가 외치는 '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주의)'와도 궤를 같이한다. 2012년과 2016년의 대선 출마도 고려했으나 마음을 접는다. 그는 국민들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2차례 임기 이후 "위기를 관리할 수 있는 노하우(know-how)를 가진 대통령, 국가의 이익을 지킬 수 있는 대통령을 원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마이클 울프의 저서 '화염과 분노(트럼프 백악관의 내부)'에 따르면. 트럼프 정부가 출범하면서 폭스뉴스 회장이던 로저 에일리스가 “워싱턴의 기존 정치와 외교를 뒤흔들려면 볼턴이 필요하다"고 추천하자, 트럼프는 “볼턴은 그 콧수염이 문제야. 자리에 어울리지 않아"라며 거부감을 나타냈다. 그러나 볼턴은 지난해 3월 트럼프 대통령의 국가안보 보좌관으로 발탁되면서 화려하게 부활한다. 뉴욕타임스는 칼럼에서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콧수염을 기를 만큼 고집이 센 볼턴의 아웃사이더 성향을 트럼프 대통령이 높이 샀을 것이라는 분석을 했다. 당시 CIA 국장이었던 마이크 폼페이오가 국무장관으로 발탁되면서 볼턴과 함께 미국 근대 역사상 가장 공격적인 성향의 외교팀(the most radically aggressive foreign policy team)이 탄생했다고 신문은 보도했다. 볼턴의 전임자인 허버트 맥매스터는 3성 장군 출신의 보수주의자로 이란 핵합의 파기, 아프가니스탄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미국 간의 관계 등에서 트럼프와 사사건건 갈등을 빚어 왔다. 트럼프는 이를 염두에 두고 맥매스터보다 훨씬 강성파이지만 자신의 케미와 맞는 '예스맨' 볼턴을 마음에 두고 있었을 듯하다. 볼턴은 보좌관에 내정된 직후 美폭스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앞으로 할 일은 정직한 정책 중개인으로 대통령이 대외전략에서 폭넓은 선택안을 가질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라며 “지금까지 내가 한 발언은 모두 지나간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월남전 지지하지만 참전은 피한 치킨호크   

네오콘들은 엘리트 집안 출신이 많으나, 볼턴은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주로 노동계급 이웃들 틈에서 자란다. 아버지(잭 볼턴)는 소방관이었고 어머니(버지니아 클라라)는 가정주부로, 소년 시절부터 보수주의에 매료된 그는 볼티모어의 백인, 준 군사학교인 맥도노우(MacDonogh) 스쿨에 입학한다. 이곳에서 그는 미국의 외교 정책과 전쟁에 대한 토론에 몰두했고, '미국 보수주의자의 아이콘' 배리 골드워터 상원의원이 대선에 출마하자 그의 선거 운동을 돕는 학생 조직을 이끌기도 했다. 그는 1970년 예일대를 최우수 등급(숨마 쿰라우데)으로 졸업한다. 재학 중 베트남 전쟁을 지지했지만 메릴랜드주 방위군으로 빠져 전투엔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후일 예일대 졸업생 25주년 상봉행사 관련 책자에서 "솔직히 동남아의 논두렁에서 죽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고 회고했다. 부시 행정부에서 이라크 전쟁을 벌이자고 외친 사람 중 냉전시기나  베트남 전쟁 때 군복무를 한 경우는 거의 없다. 볼턴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사람들은 '치킨호크(chickenhawks)'라고 불린다. 치킨은 겁쟁이, 호크는 강경파를 뜻한다. 볼턴의 강력한 후원자이며 그와 함께 '전쟁광'으로 불리는 딕 체니 전 부통령도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베트남전 징집 연기 신청을 4차례나 내 모두 승인받았다. 1974년에는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한 후, 로펌에서 변호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불과 마흔 살이던 1988년 美법무부 차관보로 기용된 뒤, 1989년에는 美국무부 국제기구 담당 차관보가 됐다.

지난해 안보보좌관에 발탁된 후, 볼턴은 북한의 핵 해법으로 '리비아식' (선 핵포기, 후 보상)을 제시했다가 북한으로부터 또 한번 강력한 반발을 샀다. 이 때문에 지난해 6월 싱가포르에서 개최된 역사적인 첫 북·미 정상회담 전후 볼턴의 역할은 눈에 띄지 않았다. 하노이 회담의 결렬과 볼턴의 재등장으로 북·미 관계가 지난해 초 정면 충돌했던 상황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한반도 평화 정착의 '훼방꾼'이  미국 안보의 중심 인물이 됐다는 시각이 팽배하기 때문이다.  

러시아 스캔들 덮기위한 1회용 카드?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이달 초 한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하노이 회담에서 트럼프는 미국에서 진행된 자신의 개인 변호사였던 마이클 코언의 '러시아 스캔들' 청문회를 덮기 위한 카드로 결렬을 선택했으며, "그러려면 서명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동안 협상을 해왔던 스티븐 비건 특별대표나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등이 할 수 없으니 난데없이 확대 정상회담에 악역을 맡을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을 배석시킨 것"이라고 해석했다.

회담 결렬 이후 볼턴 보좌관이 전면에서 대북 강경 발언을 쏟아내고 있지만, 정 전 장관은 볼턴 보좌관이 앞으로도 큰 역할을 하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정 전 장관은 "협상의 주도권은 여전히 폼페이오가 쥐고 있다고 봐야 한다"며 "볼턴은 (트럼프가) 국내 정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잠시 들여온 1회용일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강준영 한국외대 중국학과 교수는 아주경제와의 전화 통화에서 "볼턴이 대북 강경주의자인 것은 확실하지만, 그가 남북관계 발전의 걸림돌이라는 시각은 비약"이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이 하노이 회담에서 내놓은 영변 핵폐기는 미국의 입장에서 볼때 핵시설의 일부 폐기에 불과하며 이는 과거 대북 핵협상을 고려해볼 때 전혀 새로운 내용이 아니다"고 말했다.

미국 조야가 공감하는 볼턴의 원칙론

그는 "볼턴이 미국의 국가안보 실무사령탑으로서 원칙을 강조했을 것이고, 1년 안에 북핵해결을 자신했던 트럼프는 북핵의 복잡성을 인식하고 볼턴의 원칙론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또 미국이 대선을 앞두고 핵 협상을 서두르지 않을 것으로 보여 "미국 조야가 공감하는 볼턴의 원칙론은 계속 영향을 미칠 것으로 판단된다"고 덧붙였다.

북·미관계 등 미국 외교의 키는 여전히 최고 의사결정권자이며 볼턴의 보스인 트럼프 대통령이 쥐고 있다. 북·미 회담 결렬 이후 북한이 미국의 협상 태도를 비난했으나, 트럼프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의 관계는 여전히 양호하다고 강조하고 있다는 것은 미국과의 협상의 문을 아직 닫지 않았음을 뜻한다. '톱-다운'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비핵화 회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의 결단이다. 

주재우 경희대 교수는 볼턴은 "트럼프의 '충성 매파'로 그의 행동대장을 마다하지 않는 듯하다"며 "전쟁 결정이든 협상이든 볼턴은 트럼프의 결정에 따를 것이고 더 튀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한국 정부는 그가 트럼프 대통령의 비핵화 구상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기에, 더욱 긴밀한 통화를 통해 트럼프의 구상을 더 면밀히 파악하는 데 주력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존 볼턴 약력>

2018.04 ~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 NSC 보좌관

2005.08 ~ 2006.12
주유엔미국대표부 대사

2001.05 ~ 2005.05
미국 국무부 군축 및 국제안보담당 차관

1993
러너 리드 볼튼 & 맥너스 로펌 경영자

1989 ~ 1993
미국 국무부 국제안보담당 차관

1985 ~ 1989
미국 법무부 차관보

~ 1974
예일대학교 로스쿨 J.D.

~ 1970
예일대학교 숨마쿰라우데(상위 5%) 졸업

1948년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출생




 

북·미 확대정상회담, 배석자 '3 대 2' 불균형 눈길 (하노이 로이터=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차 북미정상회담 둘째 날인 28일(현지시간) 베트남 하노이의 소피텔 레전드 메트로폴 호텔에서 확대회담을 하고 있다.이날 확대회담에는 미국 측에서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 믹 멀베이니 백악관 비서실장 대행 등 3명이 배석한 반면, 북측에서는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과 리용호 외무상 등 2명만 배석했다. 당초 배석할 것으로 추정됐던 리수용 노동당 부위원장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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