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문대통령이 1919년 건국 주장할 때 내가 말려…김구가 임정의 전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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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논설고문. 서울시립대 초빙교수
입력 2019-03-14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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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호택이 만난 사람]③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

  • 이 전 원장 "이승만 임정대통령 때 갈등 있었지만 미국과의 외교 큰 성과 냈다"

이종찬 우당기념관장 인터뷰[남궁진웅 기자, timeid@ajunews.com]

이종찬 우당기념관장 인터뷰[남궁진웅 기자, timeid@ajunews.com]


서울 종로구 신교동 우당(友堂)기념관에는 이건영 석영 철영 회영 시영 호영 6형제의 사진이 결려 있다. 이조참판, 한성부 판윤을 지낸 이유승(裕承)의 아들들이다. 이유승은 백사 이항복의 9대손으로 그의 집안은 정승 판서 참판을 다수 배출한 명문가였다. 이들 6형제는 우리나라가 국권을 빼앗긴 1910년 겨울 식솔과 노복을 포함해 60여명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했다.
대가족의 망명을 주도한 이는 넷째 회영(會榮 · 1867~1932, 호는 '우당'). 그는 시대 조류를 앞서간 혁신적인 인물이었다. 망명자금을 댄 이는 둘째 석영(石榮 · 1855년 ~ 1934년). 석영은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李裕元) 대감 댁 양자로 들어갔다. 12촌 집안이었다. 이유승 집안은 부유하지 않았으나 이유원 대감 집의 재산은 어마어마했다. 망명할 때 이 재산을 가져가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여기에서 배출된 졸업생들이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 정규군을 격파했다.
6형제 중 4형제가 이국 땅에서 비운(悲運)의 죽음을 당했다. 거부의 양자였던 석영은 중국 빈민가에서 굶어 죽다시피 했다. 다섯째 시영(始榮 · 1869~1953)만 고국에 살아 돌아와 대한민국의 초대 부통령을 지냈다.
3·1 운동 100주년에서 시작해 4 ·11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까지 정부 언론 시민단체 등에서 각종 행사가 열리고 있다. 우당의 손자인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도 이곳저곳 불려 다니느라 겨를이 없다고 기념관 직원이 말했다.

-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4월 11일이 임시공휴일로 지정되는가?.
“우리가 요청을 해서 정부에서는 양해가 됐다. 그런데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에서 반대를 한다. 경제가 안 좋은데 노는 날이 너무 많으면 안 된다는 이유다. 법정공휴일도 아니고 올해만 임시공휴일로 하자는 것인데 너무 인색하다.”
그의 사촌동생인 이종걸 의원은 민주당의 3·1 운동 임시정부 100주년 특별위원회 위원장이다. 그에게 “이 위원장은 거들지 않느냐”고 묻자 “동생이 지금 해외에 있는데 돌아오는 대로 이야기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종걸 의원과 족보가 어떻게 되나.
“아버지끼리 형제다. 이 의원 아버지가 우리 막내 삼촌이다. 할아버지는 같지만 할머니가 다르다. 우리 할머니가 1908년에 돌아가셨고, 우당이 이 의원 할머니(이은숙 여사)와 재혼했다. 그러니까 이 의원의 부친은 우당 후처의 막내아들이다. 소실(小室)이 아니고 정식으로 결혼했다.” 이은숙 여사는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후원하고 임시정부의 자금을 조달한 공로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1948년 제정된 제헌헌법은 국호 ‘대한민국’과 ‘3·1 운동의 정신을 계승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등 주요 골격을 임시정부의 헌법에서 가져왔다. 제헌헌법 전문(前文)에는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라는 구절이 들어 있다. 두 차례의 헌법 개정에도 불구하고 이 대목이 계속 유지되다가 5·16 쿠데타 이후 헌법에서 폐지됐다. 그러다가 1987년 6월항쟁을 통해 쟁취된 민주 헌법에서 부활했다. 광복군으로 활동했던 김준엽 고려대 총장이 상해임시정부 요인 집안의 자제인 이종찬 의원에게 당부를 했고 이 의원이 여야 의원들을 찾아다니며 성사시켰다.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제헌헌법보다 조금 더 명확하게 한 것이다. 내가 여야 의원들을 설득해 야당 측에서는 선선히 승낙했고, 여당의 현경대 의원한테도 이야기해서 만장일치로 헌법에 넣었다.”

-우파 지식층 일각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헌법 전문에 문제를 제기하며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을 세운 건국절(建國節)로 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사실 문재인 대통령이 ‘대한민국은 1919년에 건국했다’고 말하길래 내가 ‘그러지 말라’고 조언했다. 왜냐면, 3·1 독립선언서를 보면 맨 마지막에 ‘조선건국 4252년 3월 1일 조선민족대표’로 돼 있다. 단군이 건국한 게 건국이고, 개천절이 건국절이다. 나는 이것을 따라야 한다는 입장이다. 임시정부에서도 건국기념일을 언제로 할지에 대한 논의를 거쳐 개천절안이 의정원을 통과했다.
고려, 조선, 대한제국, 임시정부, 대한민국 정부까지… 정부는 계속 바뀌었다. 조선왕조 초기에 명나라가 자꾸 고려 때 정한 국경을 문란 시키니까 국가간 교섭을 하면서 ‘아국(我國)이 귀국과 결정한 사항을 그대로 준수하자’고 했다. 여기서 ‘아국’은 고려를 말한다. 조선 왕조도 고려를 계승했다. 이런 전통이 이어졌다.
국호를 1919년에 ‘대한민국’으로 정했고, 민주공화정을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왕정(王政)이었다. 1948년에 건국을 했다면 그전에는 나라가 없었다는 말인가. 그러면 큰 혼란이 생긴다. 독도도 우리나라 것이 아닌 게 돼버린다. 나라가 없었는데 무슨 소유권이 있나. 나라가 있었지만 정부가 없었던 것이다.”
집안의 경험과 연구를 통해 독립운동사와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관해 그만큼 정통한 이도 찾기 어렵다. 필자도 인터뷰를 하면서 독립운동사와 해방전후사에 관해 공부가 많이 됐다.

-1948년 5월 10일에 치러진 총선에 김구 주석이 참여하지 않은 것을 두고 백범을 비판하는 쪽에서는 “상해임시정부 사람들이 ‘대한민국 건국’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다.
“김구 선생이 임시정부 대표는 아니다. 그런 혼란을 없애기 위해서 임시정부 기념관을 짓고 있다. 기념관에는 이승만부터 김원봉까지 다 들어온다. 물론 김구 선생도 들어온다. 그렇게 들어와야 통합적인 임시정부가 되는 것이다.”
약산(若山) 김원봉은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해 일제의 요인을 암살하고 총독부의 주요 기관을 폭파하는 활동을 했다. 1942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해 광복군 부사령관 겸 1지대장, 임정 군무부장을 역임했다. 1948년 6월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여했다가 월북해 북한의 국가검열상 노동상 등을 지냈으나 김일성이 연안파를 제거할 때 숙청당했다. 약산은 남에서는 월북한 ‘빨갱이’였고 북에서는 ‘반동’이었다. 영화 ‘암살’에서 사건의 배후인물로 등장하는 약산은 일본경찰이 현상금을 김구 선생보다 더 높게 걸었을 정도다.
“왜 ‘김구=임시정부’냐. 백범은 임시정부의 일부분이다. 이시영 초대부통령, 이범석 광복군대표, 지청천 광복군 총사령관, 신익희 내무총장 다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김구 선생은 임시정부의 전체가 아니고 부분이다. 백범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했던 조소앙 선생이 돌아와서 나는 ‘이북과 결별하고 대한민국 정부에 참여한다’고 말했다.”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약하던 많은 독립투사 중의 한명이었던 백범이 독립운동의 영도자이자 임정을 대표하는 인물로 우뚝 솟은 것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다. 윤 의사 의거로 도산 안창호가 체포돼 고초를 겪자 백범은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거사는 모두 나와 애국단의 소행'이라는 성명서를 작성해 언론기관에 돌렸다. 이 성명이 나오면서 백범은 한국인은 물론 중국인들로부터도 영웅으로 숭앙을 받게 됐다(장정화 저 '장강일기'). 
해방 후 정국에서 주요 정치세력인 한민당(총무 송진우)은 여운형이 상해임시정부를 부인하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을 만들고 후에 조선인민국화국으로 개편할 때 이에 반대하면서 “지금 해외에 있는 임시정부가 들어오면 봉대(奉戴)해서 새로운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한민당은 총무가 지금의 당 대표와 같은 자리였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 회의에서 신탁통치를 결정했다.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세력이 전부 우파가 되고, 찬성하는 세력이 좌파가 돼 싸움이 벌어졌다. 이때까지도 한민당과 김구 선생은 한 덩어리였다. 나중에 임시정부가 갈리면서 일부는 한민당과 힘을 합쳐서 대한민국 정식 정부를 수립하자고 했고, 일부는 분단의 영구화를 우려해 통일정부를 만들자고 했다. 노선 상의 차이다. 김구 선생 중심의 한독당 세력은 통일정부, 이승만 중심의 한민당은 우선 정부부터 세워놓고 유엔 감시 하에 선거를 치르자고 했다.”
북한에서는 소련이 내세운 김일성이 인민위원회 조직을 해나가고 있던 때여서 남한만이라도 단독선거를 치르자는 판단이 현실적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분단의 고착화를 막기 위해 남북한 통일정부를 세워보려던 노력을 백범의 실패 내지 과오로 폄하할 일만은 아니다.

-우파 일각에서는 임시정부가 여러 독립운동의 한 갈래일 뿐인데 헌법 전문에 들어간 것은 과공(過恭)이라고 깎아내린다.
“1919년에 임시정부가 여럿 생겼다. 상해 임시정부가 4월 11일에 수립됐고, 블라디보스톡에도 임시정부가 있었다. 한성에서도 4월 23일에 임시정부를 선언하고, 이승만을 총재(대통령)로 추대하는 그룹이 있었다. 그런데 1919년 9월 11일에 전부 모여서 ‘정부가 이렇게 많으면 안 된다’며 하나로 하자고 했다. 그래서 ‘대한민국’으로 했다. 정부를 한성에다 둬야 마땅하지만 둘 수 없으니 임시로 상해로 정한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해 임시정부는 통합된 대한민국 정부가 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합동으로 선포된 후에는 만주에 있던 독립군들이 임시정부 밑으로 들어왔다. “처음에는 임시정부에 반대하던 약산을 비롯해 모든 독립운동 세력이 다 임정 밑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분열된 것도 사실이다. 1944년에 다시 합치자고 해서 1945년에 다 합쳤다. 임시정부에 들어올 때 유림선생은 아나키스트였고, 김성숙은 사회주의자였지만 다 의정원 의원이 됐다. 합쳤다가 분열됐다가 또 합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임시정부를 떠난 일도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할 때 갈등이 생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분의 노선은 총을 든 무장투쟁 보다는 외교적 접근이었다. 그래서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를 만들고, 본인이 대통령 겸 구미외교위원장 자격으로 미국에 가서 외교전을 했다. 큰 성과를 냈다. 김구 선생은 주석을 하고, 이승만은 위원장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이승만의 역할을 자꾸 역사에서 지우려고 하는데 나는 반대한다.”

-미군 사령부의 하지 중장이, 상해 임시정부가 환국할 때 개인 자격으로 하라고 했다. 상해 임시정부의 존재 자체를 부인 내지 무력화하려는 시도가 아니었나.
“미국의 무지에서 비롯된 과오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첫째, 처음에는 38선이 아니라 39선을 그었다. 소련이 이야기를 해서 38선까지 내려왔다. 미국은 한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몰랐던 것이다.
둘째, 소련은 코민테른이 있었기 때문에 진주하자마자 인민위원회를 만들어놓고 자기네는 그 뒤에 숨었다. 소련 장군은 ‘우리는 조선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왔다. 앞으로는 조선에 자치적 능력을 다 주겠다. 인민들이 통치하도록 만들겠다’고 했다. 소련은 군정을 안 했지만 실제로는 군정 이상이었다. 반면 맥아더 장군의 포고령 1호는 ‘여기(남쪽)는 내 통치 하에 점령한다’였다. 그래서 좌파들이 소련은 해방군, 미군은 점령군이라고 이야기했다. 북쪽은 1945년 9월에 김일성을 데려다가 훈련을 시켰는데, 남쪽에서는 이승만이 10월에야 귀국했다. 임시정부가 군정을 혼란시킬 수 있다고 해서 미군정이 입국을 지연시키는 바람에 임정 요인들은 11월 23일에 들어왔다. 들어올 때도 개인 자격의 귀국을 다짐하는 서약서를 쓰고 들어왔다. 미군정의 전후 처리가 굉장히 서투르고 무지했다.”

-문 대통령이 지난 4일 청와대에서 해외 거주 독립유공자 후손들과 오찬을 하면서 ‘친일하면 3대가 떵떵거리고,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었다’고 했다. 실제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독립운동하느라 아이들 교육도 못 시켰을 것이고, 있던 재산도 다 거덜내고 망한 사람이 많다. 대부분이 교육을 못 시켜서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빈곤과 무지가 세습됐다. 내가 우당장학회를 만든 것도 그런 세습을 끊기 위한 뜻이다. 우리 정관에는 독립운동가 후손들만 돕게 돼 있다. 독립운동으로 인한 무지와 빈곤의 세습을 개선해보자는 뜻으로 1984년부터 했다. 보훈처에서 학자금 도와주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당연한 거라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에서 아직 친일잔재 청산이 부족하다고 보는가.
“특히 역사학 부문이 그렇다. 독립운동을 한 분들, 이를테면 박은식, 이상룡, 이시영, 신채호 선생이 ‘우리 역사는 반만년의 역사’라고 했다. 독립선언서에 4252년이라고 나와 있고, 금년이 4352년이다. 4352년 전에 우리나라는 건국됐다. 역사가 여기서부터 이어져 와야 하는데 역사학회 강단사학자들은 ‘단군 조선은 신화에 불과하다’며 우리나라는 서기 전 10세기 때 시작됐다는 학설을 내고 있다. 우리 역사를 반 토막 내는 것이다.
일본 사학자들은 우리 반만년 역사에 대해 열등감을 가졌는데, 그걸 없애기 위해 만든 역사관을 왜 아직도 따르는가. 그런 점에서 일재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다. 특히 역사학에서 일재 잔재가 온전하고 있어 역사 광복이 안 됐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적 청산 등은 이미 다 시대가 지나갔다. 지금 친일파 재산을 환수하는 것은 잘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일부가 청산 과정에 있다. 하지만 역사학은 완전히 청산되지 않았고, 강단사학자들이 일본 학자들의 사관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우당 형제 중에 이시영 선생은 부통령이 되고 자손에서 국회의원이 둘 나왔다. ‘3대가 망한다’는 ‘룰’의 예외 같은데….
“내가 신흥무관학교의 전통을 잇기 위해 육사에 들어갔다는 것은 대외적인 명분이었고 실제로는 돈이 없어서 국비로 교육해주는 대학을 찾아간 것이다. 나나 이종걸 의원이나 국민의 사랑 속에서 성장했다.”

-우당 6형제 중 다른 형제의 집안은 어떤가.
“다섯 째(시영)만 해방 후 살아서 돌아왔다. 첫째(건영)는 1924년에 선영이 자꾸 훼손되니까 선영 찾으러 들어왔었다. 나머지는 다 해외에서 돌아가셨다. 어마어마한 재산을 망명과 독립운동에 헌납한 둘째(석영)는 굶어 죽었다. 셋째(철영)는 병사했고, 넷째(우당)은 고문으로 돌아가셨다.”
우당기념관에는 소화(昭和) 7년(1932년) 11월 24일자 동아일보 기사가 전시돼 있다. 이회영씨가 중국 다롄(大連)에서 ‘일경의 조사를 받다 숨졌다’는 내용이다. 일경은 우당이 자살했다고 밝혔지만 부친의 시신을 인수한 딸 규숙은 혈흔이 낭자한 얼굴과 역시 핏자국이 묻은 옷을 확인했다. 고문치사임이 분명했다.
“여섯째(호영)는 1933년 만주사변 이후에 일본군인지 마적대인지 모르겠지만, 당시 공격을 받아서 집이 불탔고, 내외와 아들이 모두 몰살됐다. 일본이 배후에서 시켜서 마적대가 공격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으나 진상이 밝혀지지는 않았다.”

-문 대통령과 2017년에 임시정부 마지막 청사였던 충칭을 함께 방문했는데, 옛 기억의 장소가 남아있던가.
“옛날 것을 모조품으로 만들어 비치했는데,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옛날에 비해 화려했다. 옛날엔 더 구질구질했다. 그렇게 깨끗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 건립위원장을 맡고 있는데, 추진 경과를 말해 달라.
“박근혜 전 대통령 시절인 2015년에 내가 정부에 건의했다. 2019년 임시정부 100주년에 기념관 준공을 하자. 그러려면 2015년에 시작해야 한다. 대통령 임기가 끝나서 현직 때 기념관 개관은 못하더라도 역사에 남는다고 했다. 결국 박 대통령의 승낙을 받았다. 당시 이병기 비서실장이 나한테 전화해서 ‘적극 추진하라. 내가 뒷받침하겠다’고 했다. 보훈처장도 처음에 열성이더니 얼마 있다가 식어버리더라. ‘고려해보겠다’고 하고는 시작을 안 하더라. 내가 이병기 실장과 이야기해서 국회에서 예산 10억원을 2016년 예산에 반영했는데 한 푼도 안 쓰고 다 반납했다. 그리고 2017년에 또 예산 10억원을 얻었다. 마침 박원순 서울시장이 후보지였던 서대문구 의회 자리를 내줘서 시작할 수 있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필요한 자금을 헌금 받아 지으라고 해서 사업이 중단됐다. 400~500억원 되는 돈을 어떻게 헌금으로 받나. 2017년 대통령 선거 때 문재인 대통령 후보가 와서 ‘이건 헌법 전문에도 나와 있으니 헌금이 아닌 국비로 지어야 한다’고 공약을 했다. 근데 내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사업이 진영논리에 빠지면 이상하게 될 것 같아 당시 홍준표 자유한국당, 안철수 국민의당, 유승민 바른정당, 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에게 다 동의를 받았다. 그래서 국비로 짓게 된 것이다.
5당이 다 합의를 한 후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이화장이다. 이인수 박사에게 ‘당신 아버지는 1948년의 대통령만이 아니다. 1919년 세운 대한민국도 당신 아버지가 대통령인데 왜 이건 이야기 안 하고, 1948년만 이야기하느냐’고 했다. 사실상 동의를 받았다.”
애국가의 작곡가인 안익태씨는 친일 행각이 상세히 드러나 있고, 작사자로 알려진 윤치호 씨도 친일파였다. 진보세력 일각에서는 친일잔재 청산 차원에서 애국가 교체를 제안하고 있다.
“애국가는 국가가 아니다. 지금은 애국가를 국가 대행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나중에 우리가 진짜 통일 정부가 되면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 지금의 애국가는 잠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계 어느 나라를 봐도 국가에는 4절이 없고 1절만 있다. 국가는 나중에 짓기로 하고, 과도기적으로 애국가를 대신 부르자고 하면, 그걸 가지고 시비할 것은 없다.”

-우당은 노비 해방, 적서(嫡庶)차별 타파, 여성에 대한 부당한 인습에 반대, 개가(改嫁)를 장려하였다. 당시 뼈대 있는 양반 가문의 자제로서는 대단히 혁신적인 사고를 했는데….
“우당은 진보적이었고, 어떤 점에서는 이상주의자였다. 그래서 현실과 안 맞는 부분들이 있었다. 하지만 철저한 행동주의자였다. 상해 임시정부에 가 있으니 서로 다툼을 하다 에너지가 다 소모될 것 같으니 다시 베이징에 와서 행동하는 흑색공포단과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 만들어 대일 항쟁을 했다. 당신이 66세였을 때, 아나키스트들이 누가 거사에 갈지 투표를 하는데, 투표를 정지시키고 이번에는 자기 차례를 달라고 하셨다. 당신이 여기까지 오느라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데, 여기 남아있으면 안 되지 않느냐고 하셔서 당신이 들어가겠다고 해서 들어갔다. 들어가다 잡혔지만 행동주의자, 이상주의자였다.”

-우당이 고종 망명계획에도 관여했나.
“1910년에 망명할 당시, 우리 가문과 안동의 이상룡 가문, 강화도의 양명학파가 다 올라갔다. 따로 갔지만 만주 황도천에 모여서 경학사를 설립했다. 경학사에 기반을 두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그런데 흉년이 2년간 들었다. 돈이 다 떨어져가자 우당 선생이 1913년에 국내에 잠입했다. 예전에 ‘돈 다 대줄게, 따라갈게’하던 사람들이 다시 만나니 마음이 달라져 있었다. 일본의 통치가 강화돼 돈을 줄 수가 없다고 하니 우당의 고민이 시작됐다. 사람들이 돈은 안 주고 세상은 변한 것이다. 그렇지만 고종을 망명시키면 돈을 안 낼 수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공작을 시작했다. 고종의 매부인 우리 외할아버지의 딸과 우당의 아들을 결혼시켰다. (그 결혼으로 낳은 아들이 이종찬)  당시에는 양자를 들이더라도 임금의 허가를 받아야 했는데, 결혼 이야기를 하기 위해 고종에게 접근했다. 당시에는 일본이 고종도 감시하고 있었는데, 결혼 이야기를 하러 들어가서 슬쩍 망명을 이야기했더니 고종이 결심을 했다. 그러면서 고종이 ‘내 돈 중에 일부가 민영달한테 있으니 찾아서 쓰라’고 하셨다. 그래서 우당이 민영달한테 가서 고종의 허가를 받았다고 하니 당시 5만원을 줬다. 그 돈을 받아 베이징에 집도 샀다. 그러고 나서 얼마 안 있다 고종은 독살당했다.”

-광복군과 신흥무관학교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광복군이 신흥무관학교의 정신을 이어받았다.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이 지청천, 이범석이고, 학생이 김원봉, 김학규다. 지청천은 광복군 총사령관, 김원봉은 참모장 겸 임시정부 군무부장·광복군 1지대장, 이범석은 2지대장, 김학규는 3지대장이다. 광복군은 창설할 때 3개 지대와 1개의 사령부로 이뤄졌다. 그 우두머리가 다 신흥무관학교 교관 아니면 졸업생이므로 전통을 이은 거라고 할 수 있다. 또 광복군의 모든 매뉴얼을 윤기섭이 만들었다.
전북 전주에 신흥고등학교가 있는데, 광복군 군가가 교가다. 정세균 전 국회의장이 신흥고를 나왔는데, 예전에 김대중 전 대통령을 수행해서 북한에 갔을 때 공항에서 북한 사람들이 교가를 연주했다고 한다. 가사는 다르지만. 그래서 정 전 의장이 왜 북한에서 신흥 학교 교가를 연주하는지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광복군 군가였다. 학교 설립자가 연결이 돼 있어 그렇게 됐다고 한다.
신흥무관학교는 경희대학교와도 인연이 있다. 경희대는 원조를 따지자면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로 구성된 학우단이 세운 학교다. 학우단이 이시영 부통령을 앞세워 설립했다. 그러나 조영식 전 총장이 부산 피난 당시 학교를 가져갔다.”

-3·1운동 100주년은 어떤 의미가 있나.
“3·1 독립선언서는 대단한 명문이다. 대한독립선언문, 2·8독립선언문, 기미년 독립선언문 세 개다 명문이다. 당시 시대적 상황은 세계 1차 대전이 끝나고 제국주의를 하지 말자, 남의 땅 차지해서 부리는 건 안 된다, 식민지 만들면 안 된다, 모두에게 민족 자결권을 줘라 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레닌은 제국주의론을 쓰면서 ‘우리는 모든 외국의 것을 다 포기한다’고 했다. 이것이 시대적 조류였는데, 유럽에서만 그랬지 동양에서는 여전히 일본이 패권을 쥐고 다른 나라를 지배했다. 그 시대적 역행을 제일 먼저 지적한 것이 우리의 독립선언서다. 너희들 정신 좀 차려라, 지금 시대는 약육강식이 아니라 민족 자결의 시대다, 이걸 왜 모르느냐. 이와 관련해 베이징대학교의 천두슈(陳獨秀) 교수는 ‘우리는 한국을 무릎 꿇고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아무리 일본이 총·칼로 몇 만 명을 죽였어도 우리가 이긴 싸움이다.”
독립협회와 신간회 등에 관여했던 독립운동가 월남 이상재 선생은 “해방이 되면 우당(이회영의 호) 가문에 빚을 갚아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상해임시정부 기념관은 국가의 혜택을 입은 사람들이 나라가 위기에 닥쳤을 때 어떻게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사회 지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교육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인터뷰=황호택 논설고문·서울시립대 교수
정리=장은영 정치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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