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고전문학 산책] 사랑에 비겁했던 어느 중국 고대 문인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신민야 청운대 중국학과 교수(고대문학 박사)
입력 2018-07-10 10:09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 명나라 후기 문인 '왕즈덩'과 난징 기녀 '마샹란'

[신민야 청운대 중국학과 교수(고대문학 박사)]

왕즈덩(王穉登, 1535~1612)이라는 중국 문인이 있었다. 명나라 후기 사람으로 벼슬은 하지 못했지만 문학, 회화, 서법, 바둑 등 여러 분야에서 명성이 높아 상당한 문화적 지위를 가졌던 사람이었다. 그의 서화와 시문은 당시 얼마나 인기가 많았던지, ‘가짜’가 돌아다닐 정도였다.

왕즈덩은 명대 후기에 유행했던 양명학(陽明學) 좌파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다. 양명학 좌파는 그동안 성리학(性理學)에 의해 억압돼 왔던 인간의 욕망을 긍정했기 때문에 왕즈덩도 이 사상의 영향을 받아 쾌락주의자의 일면을 가지고 있었다.

왕즈덩은 어느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12세부터 32세까지 20년간 기루(妓樓)를 출입하며 기녀에 빠져 살았음을 언급한 적이 있다. 이 말은 32세 이후부터는 청루(靑樓) 출입을 끊은 것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실은 이후에도 기녀와의 즐김은 계속됐다.

무려 일흔이 넘어서도 15세 소녀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다 한다.

이런 왕즈덩을 평생 사랑한 여성이 있었으니 바로 마샹란(馬湘蘭, 1548~1604)이라는 기녀다. 마샹란은 명나라 말기에서 청나라 초기에 이르는 시기에 난징(南京) 친화이허(秦淮河·진회강) 부근에서 이름난 8명의 기녀 중 한 명이다.

글씨, 그림, 가무, 시 등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재주를 가졌고, 특히 난을 그린 난화(蘭畵)로 유명했다.

◆동등하지 않은 신분, 동등하지 않은 사랑

왕즈덩과 마샹란 두 사람의 인연은 마샹란이 26세, 왕즈덩이 39세 때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당시에 탐관오리들이 기녀를 괴롭혀 돈을 뜯어내는 일이 많았다. 마샹란 역시 나쁜 관리에게 작은 일로 꼬투리가 잡혀 돈을 뜯기고 봉변을 당한 일이 있었다.

이때 왕즈덩이 중재를 해줘 다행히 목숨을 건지고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평소 왕즈덩을 연모하고 있던 마샹란은 이 일을 계기로 왕즈덩의 첩이 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왕즈덩은 자신이 대가를 바라고 마샹란을 도운 것이 아니라며 마샹란의 청을 거절했다.

이때 상황을 언급한 글에서 왕즈덩은 마샹란과 자신의 마음이 서로 맞았을 뿐, 만약 자신이 마샹란을 첩으로 맞아들이면 다른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왕즈덩이 마샹란의 청을 거절한 것은 자신이 마샹란을 첩으로 받아들일 경우 자신이 누리던 명사(名士)의 지위에 타격이 올까 두려워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벼슬은 없었지만 문화 권력을 가졌던 왕즈덩과 온갖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나, 기녀라는 천민이었던 마샹란 사이에는 커다란 신분의 벽이 있었다. 신분이 동등하지 못한 남자를 사랑한 대가로 마샹란은 평생 ‘외사랑’의 멍에를 지고 살아야 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마상란의 사랑 한풀이

왕즈덩은 마샹란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첩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왕즈덩에게 거절을 당한 마샹란은 그 뒤로 다시는 첩이 되겠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도 57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30년간 마샹란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왕즈덩만 존재했다.

당시 기녀가 상인과 결혼하거나 문인과 결혼해 양민 신분이 되는 경우도 꽤 있었다.

만약 왕즈덩의 마샹란에 대한 감정이 진지한 것이었다면, 마샹란의 청을 받아들여 첩으로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그녀를 자신으로부터 철저히 떠나보내야 했다.

마샹란을 받아들이지는 않으면서 그녀가 자신을 30년이나, 사랑하도록 내버려 둔 왕즈덩은 사랑에 있어서 철저한 비겁자였다.

이후 두 사람은 서신은 계속 주고받았으나, 마샹란이 죽기 전 16년간은 서로 만나지 못했다.

왕즈덩의 70세 생일 때 남경의 마샹란이 왕즈덩이 있는 쑤저우(蘇州)로 축하잔치를 해주러 가면서 둘은 16년 만에 극적인 해후를 하게 된다.

당시 마샹란은 57세였다. 마샹란은 층층배를 사 미녀들을 싣고 소주로 와서는 왕즈덩의 70세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를 몇 달 동안이나 성대하게 열었다.

왕즈덩은 이때의 일을 자신이 쓴 마샹란 전기 ‘마희전(馬姬傳)’에서 자세하게 서술했다.

이 몇 달간 잔치는 매일 새벽까지 이어졌고 당시의 마샹란을 마치 춘추시대 월나라 미인 시스(西施)가 천년의 세월이 흐른 후 다시 구름에서 내려온 듯하다고 묘사했다.

몇 달에 걸친 왕즈덩의 생일 축하연을 마친 마샹란은 항주(杭州)의 스후(西湖·서호)를 유람했으나 더위를 이기지 못해 곧 난징으로 돌아갔다.

난징으로 돌아간 마샹란은 병이 악화돼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쑤저우에서 몇 달간 베풀었던 화려한 연회는 결국 30년간 홀로 품어왔던 왕즈덩에 대한 사랑의 한풀이가 됐던 셈이었다.

마샹란이 죽기 얼마 전 왕즈덩에게 보낸 편지 ‘준유오중첩(準遊吳中帖)’에서도 그녀는 “당장 큰 배를 사 낭군의 댁으로 건너가서 술잔을 잡고 마음을 얘기하며 등불 아래서 즐기고 싶다”라고 생애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었던 왕즈덩에 대한 애절한 사랑을 고백했다.

◆왕즈덩의 뒤늦은 후회

마샹란이 세상을 떠난 후 왕즈덩은 마샹란을 애도하며 쓴 12수의 만시(挽詩) 중 한 수에서 마샹란의 청을 거절했던 것을 후회하며 “다른 생엔 또 왕창에게 시집오는 것 허락하리(他生還許嫁王昌)”라며 다음 생에서는 자신에게 시집오는 것을 허락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는 뒤늦은 후회일 뿐 마샹란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이 시점에서 문득 이런 의문이 든다. 왕즈덩은 과연 마샹란이 30년 동안이나 마음에 두고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었던 사람이었을까?

왕즈덩이 쓴 마샹란 전기 ‘마희전’에는 마샹란이 자신의 70세 생일을 축하해주러 왔을 때 그녀에게 농담으로 했던 말이 인용돼 있다.

“그대는 점점 젊어져 미모가 샤지(夏姬·하희)와 같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신공무신(申公巫臣)처럼 될 수 없소!”

샤지는 춘추시대 정 나라의 공주로 음탕한 여자의 대명사로 여겨진다. 미모가 뛰어났던 샤지는 ‘열녀전(列女傳)’의 기록에는 “세 번 왕후가 되고, 일곱 번 아내가 됐으며, 귀족과 고관들이 그녀를 두고 다퉜다”고 나와 있다.

신공무신은 초나라의 대신이었다. 그는 초나라 왕과 신하들이 서로 샤지를 아내로 맞이하려고 싸울 때 대의를 내세워 교묘한 말로 물러나게 권하고는 정작 자신이 샤지를 데리고 진 나라로 도망간 인물이다.

아무리 농담이라고 해도 30년간 자신만을 사랑한 마샹란을 샤지로 비유한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가 마샹란을 조금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음을 알게 해 주는 대목이다.

필자가 보기에 왕즈덩은 그녀가 그렇게 평생을 걸고 사랑할 만한 남자가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후대인이 마샹란을 이해하는 데는 왕즈덩이 쓴 그녀에 대한 전기와 그녀에 대한 만시, 그녀의 그림에 대해 평가한 시 등이 큰 영향력을 가진다.

한 남자로서는 비겁했던 왕즈덩이 문화 권력을 가진 문인으로서 기녀 마샹란의 평가에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것을 보면서 씁쓸함을 느끼게 된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