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디지털]소녀에게 필요한 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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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주 기자
입력 2018-04-11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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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맥주 강국 일본, 각도에 맞춰 맥주를 따라주는 기계가 있다고?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각도에 맞춰 맥주를 따라준다 [사진=유튜브 캡처]


추웠던 겨울이 지나고 한국을 비롯한 미국, 일본에서 프로야구가 일제히 개막했다. 국내 야구팬들은 기다렸다는 듯 야구장으로 몰려가 경기를 즐기며 환호성과 탄식을 쏟아낸다. 그럴 때 빠질 수 없는 게 바로 시원한 맥주다.

그런데 야구장에서 우리나라보다 맥주를 더 많이 즐기는 나라가 있다. 바로 일본이다. 일본은 맥주산업이 매우 발달해 아사히, 에비스, 기린, 삿포로 같은 맥주회사들뿐만 아니라 지역마다 명소를 대표하는 맥주들이 즐비하다. 그 정도로 일본은 맥주 대국이다.

오죽하면 일본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맥주 회사가 이끈다는 말이 있을까. 일본에서는 맥주회사들이 문화를 만들고 그 문화 속에 자연스레 맥주 소비를 유도한다.

일본의 야구장에 가면 인상적인 장면을 볼 수 있다. 바로 자기 몸집만한 맥주통을 메고 다니며 맥주를 파는 소녀들이 많다는 것. 얼마나 많은가 하면 경기를 보는데 방해가 될 정도다. 그 소녀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상냥한 표정으로 "여기 시원한 맥주가 있습니다!"하고 목청껏 외치면 도저히 맥주를 안 사먹고는 배길 수 없게 된다.

또 한가지 더. 일본에는 남녀노소 불문하고 야구를 보며 혼자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이 많다. 이 때문일까. 야구장을 비롯한 거리 곳곳에 맥주를 따라주는 기계가 있어 흥미롭다.

맥주 따라주는 기계는 종류가 다양하지만 기본적인 메커니즘은 똑같다. 처음에는 기계가 맥주잔의 각도를 45도로 기울인다. 이어 맥주가 절반 이상 담기면 맥주잔의 각도는 좁아지며 끝으로 맥주거품이 눈 내리듯 내려앉으면 그야말로 원샷하기 딱 좋은 맥주 한 잔이 완성된다.

이 기계의 등장은 일본의 '혼네'(진짜 마음)와 '다테마에'(가짜 마음)를 구분짓는 특유의 문화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타인 앞에서 늘 가면을 쓰듯 웃고 과한 정중함을 보이는 일본 사람들도 내심 '다테마에'에 지쳤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일본인들은 '다테마에'가 필요 없는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을 늘 갈구하는지도.

이렇듯 맥주회사들의 강세와 고독을 필요로 하는 일본의 문화가 결합해 탄생한 맥주 따라주는 기계는 혼자 맥주를 즐기면서도 누군가가 맥주를 따라주는 기분이 들게 한다. 여기서 포인트는 맥주를 파는 것을 넘어서 따라준다는 것이다. 내 손으로 따라마시는 술과 남이 따라주는 술 맛의 차이는 마셔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야구장에서 무거운 맥주통을 메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웃어야 하는 그 소녀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야말로 기계가 따라주는 맥주 한 잔의 고독이 아닐까. 경쟁에 지친 우리 역시 일본에 간다면 한 번쯤 경험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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