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포커스] 판결공개 거부하는 법원의 '철의장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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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연 기자
입력 2018-04-11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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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연합뉴스]


사람은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동원해 세상과 소통한다. 기자는 기사로, 요리사와 예술가는 창작품으로, 기업은 상품으로 말한다. 이들이 최선을 다한 산출물이 모일 때 사회는 발전한다. 판사는 어떨까. 판사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수많은 판결문들, 세상과 소통할 준비가 됐을까.

평범한 시민들이 판결문을 열람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대법원이 운영하는 종합법률정보 사이트에 등록돼 열람이 가능한 판례는 전체의 0.3%에 불과하다. 실제 2010년부터 2015년까지 처리된 본안소송 930만건 가운데 판결문이 공개된 것은 2만4000건(0.27%)에 불과하다. 처참한 수치다.

판결문 공개가 어려운 이유는 뭘까. 국민들이 법에 무지하거나, 먹고사는 게 바빠서. 이도저도 아니면 법원이 철저하게 진입장벽을 높여왔다는 의미다. 전자는 설득력이 없다. 한국은 ‘소송공화국’이다. 2016년 사법연감에 따르면 2015년 법원이 처리한 소송사건은 636만건에 달한다. 국민 8명당 1명이 소송을 냈다는 얘기다. 

일반 시민이 판결문을 검색하기 위해서는 사건번호, 당사자 이름, 날짜, 선고법원 등을 모두 알아야 한다. 이를 다 알아도 제대로 검색되는 경우가 드물다. 법원은 재판공개신청을 하면 된다고 말하지만 공개신청이 받아들여지는 경우는 희박하다.

때문에 소송을 준비하는 변호사나 기자, 사건의 잠재적인 피해자인 시민들은 법원도서관 판결정보 열람 서비스를 이용한다. 그런데 5000만 국민이 이용할 수 있는 판결 열람가능 컴퓨터는 4대가 전부다. 그마저도 이용시간과 촬영, 출력이 제한된다. 명확해졌다. 법원은 판결문을 공개할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법원이 판결문 공개에 소극적인 이유는 표면상 개인정보 침해다. 판결문에는 범행수법이나 피해자 인적사항 등 특정인물을 파악할 수 있는 구체적인 개인정보와 회사 영업기밀 등 민감한 사항이 담겨 있기 때문에 2차 피해가 우려된다는 논리다. 그러나 이는 개인정보 등을 제외한 별도의 판결문을 만들어 공개하는 선진국들의 행보와 다르다. 미국은 소수민족, 성범죄 등 특정범죄 피해자와 관련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시민들에게 판결문을 공개하고 있다.

대한민국헌법 제109조는 ‘재판의 심리와 판결은 공개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판결문은 법원의 소유물이 아니라 공공재다. 시민들이 판결문을 자유롭게 검색할 수 있어야 사법부의 투명성을 제고하고, 재판의 밀실화를 견제할 수 있다. 매년 천문학적으로 소요되는 법률비용과 법조 브로커들, 이로 인한 전관예우 등 불필요한 사회경제적 비용도 줄일 수 있다.

판사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사법부를 개혁하기 위해 전국법관회의를 정례화했다. 반가운 얘기다. 그런데 그들이 첫 회의에서 논한 내용은 권역법관제도 부활이다. 좋은 재판을 제공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좋은 재판을 위해서는 판결문의 접근성 제고가 먼저 아닐까. '접근성이 낮은 게 판매전략'이라고 외치던 유럽 명품 업체들은 줄줄이 경영위기를 맞고 있다. 시대적 흐름을 외면한 탓이다. 법원이 시대적 우를 범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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