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 통찰洞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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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 서울대 교수(종교학)
입력 2018-02-1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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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가수트라 I.7

[사진=배철현 서울대 교수(종교학)]

 
시(視)
내가 하루 종일 본다. 나는 두 눈을 통해 들어오는 많은 정보들을 ‘나’라는 렌즈를 통해 쉴 새 없이 해석한다. 그 해석된 정보들은 ‘나’라는 정체성을 건설하는 조그만 벽돌들이다. 파탄잘리는 요가를 자신에게 감동적인 진정한 자아를 ‘보는 행위’라고 정의했다. 그는 진정한 자아를 산스크리트어로 ‘드라스트르’라고 표현했다. 드라스트르는 ‘보는 행위’ 그 자체이며, 동시에 어떤 대상을 보는 주체인 ‘보는 사람’이란 의미이기도 하다.
 
내가 보고 싶은 대상을 온전히 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무엇인가?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란 표현처럼,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이다. 내가 두 눈으로 어떤 대상을 볼 때 나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수동적으로 볼 수도 있고 혹은 반대로 적극적으로 관찰할 수도 있다. 수동적으로 ‘그저 보는 행위’는 장님이 아닌 이상, 누구든지 본다.

내가 오늘 직장으로 출근하기 위해 버스와 지하철에 승차했다고 가정하자. 내가 ‘보는 행위’를 의식하지 않고 무심코 본 사람들은 충분히 백명 이상 될 것이다. 이들 중 튀는 의상을 입었거나 특이한 행동을 한 사람이 없다면, 내 기억에 남는 사람은 없다. 이렇게 그저 보는, 그러나 나의 정체성을 만드는 정보가 되지 못하고 사라지는 ‘보는’ 행위를 영어로 ‘룩’(look)이라고 부른다.
 
‘그저 보는 행위’와 다른 ‘보는 행위’가 있다. 한자로는 시(視)다. 내 시선이 그 대상에 머물러 소통을 시도한다. 나는 이 봄을 통해 내가 가지지 못한 생소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내 시선을 그 대상 위에 머무르게 둔다. 이런 봄을 표시하기 위해 영어단어 ‘룩’(look)에 전치사가 붙기 시작했다. ‘쳐다보다’(look at; look upon), ‘돌보다’(look after) 혹은 ‘(사전에서 낱말을) 찾아보다’(look up) 등이다. 내가 어떤 대상에 관심이 생겨, 내 시선이 따라가 그 대상에 머무는 행위를 나타내는 영어 단어가 따로 있다. 바로 ‘시’(see)다. ‘본다’는 의미로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이 단어는 원래 ‘눈으로 따라가다’라는 의미다. 관찰자가 그 대상을 자신의 눈으로 끌고 들어와 자신의 경험 안에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 위해 관찰자의 눈으로 그 대상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행위다.

우리는 대개 사물들을 무심코 보는 습관대로 보며(look), 그 대상에 관심을 가지고 눈으로 따라가지(see) 않는다. 우리가 흔히 천재라고 부르는 과학자, 예술가, 작가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자신이 마주친 관찰의 대상을 인내하며 보고 또 보는 자들이다. 그들은 단순히 보고, 눈으로 따라가는 것을 넘어서 '관찰'(觀察)한다.
 
관찰(觀察)
‘관찰’이란 자신이 응시하는 대상을 처음 보는 것처럼, 자기 스스로 ‘깨어 있어야’ 한다. 자신이 그 대상에 관한 선입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여,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영어로 ‘워치’(watch)라고 부른다. 영어 단어 ‘워치’는 ‘깬 상태에서 보다’라는 의미 이외에 ‘손목시계’ 혹은 ‘(야간) 경계’라는 뜻으로 모든 같은 어원에서 다양한 의미로 파생됐다. 종교에서는 ‘신앙적인 이유로 참회하며 잠을 삼가는 행위’인 ‘철야’(徹夜)라는 의미도 있다. 원인도-유럽어 어근인 ‘웩’(*weg-)은 원래 ‘강하다; 살아있다’라는 의미였다. 이 어원에서 유래한 라틴어 ‘위길리아’(vigilia : 영어의 virgil)는 ‘저녁의 한 기간’을 의미한다. ‘웩’이 영어가 속한 게르만언어 어근인 ‘왁얀’(*wakjan)으로 변화해 ‘야간 경계를 서다’ 혹은 ‘깨어있다’라는 의미가 됐다.
 
영어단어 ‘워치’는 두 눈으로 보는 육체적 행위를 넘어 정신적·종교적 의미를 취했다. 이 영어단어와 유사한 의미군(意味群)을 가진 단어가 프랑스어 ‘옵세르베’(observer)다. ‘옵세르베’는 ‘준수하다’, ‘고수하다’ 혹은 ‘스스로를 관찰하다’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프랑스어의 조상언어인 라틴어 ‘오브세르바레’(observare)에서 유래했다. 오브세르바레는 ‘미리’(ob) 자신이 관찰하려는 대상을 특별한 이유를 위해 ‘지키는’(servare) 행위다. 이 단어에는 특히 관찰의 대상에 ‘자신’이 포함됐다.
 
통찰(洞察)
영어단어 ‘워치’가 관찰대상의 겉모습을 관찰하거나 혹은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행위라면, 영어단어 ‘퍼시브’(perceive)는 관찰대상의 속모습 혹은 자신의 속마음을 ‘가만히 들여다 보는’ 행위다. ‘위치’(watch)가 눈으로 보는 행위라면 ‘퍼시브’(perceive)는 마음으로 보는 행위다. 퍼시브는 인간의 오감을 모두 동원해 ‘철저하게’(per) 자신이 응시하는 대상에 감추어진 핵심이나 원칙을 자신의 소유로 ‘장악하는’(ceive <*capere) 행위다. 퍼시브는 ‘꿰뚫어 보는’ 행위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이란 책에서 ‘꿰뚫어 보는 행위’를 설명한다. 이는 두 눈을 통한 감각적 지각이 아니라,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대상이 존재하는 외적인 상황뿐만 아니라 그 대상이 존재하는 내적인 이유까지 보는 행위다. 그는 이 개념을 독일어로 ‘두륵식틱카이트’(Durchsightkeit)로 표현했다. 천재적인 예술가는 오랜 수련을 거쳐 한순간에 핵심을 보는 능력의 소유자들이다. 19세기 프랑스 화가인 웨젠 들라클루아(1798~1863)는 제자인 앙리 마티스에게 관찰과 통찰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만일 네가 오층 창문에서 일층 바닥으로 떨어지는 사람을 스케치하지 못하면, 너는 위대한 작품을 결코 그리지 못할 것이다.” 위대한 화가란 사물의 본질을 한순간에 장악하는 사람이다.
 
요가는 통찰을 얻기 위한 지속적인 수련이다.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 I.6에서 생각을 다섯 가지, 즉 통찰, 착각, 망상, 미몽, 기억으로 구분했다. 이들 중 ‘통찰’만이 자신이나 외부의 편견에 ‘오염되지 않은’ 생각이라고 말한다.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 I.7에서 “프랏약샤 아누마나 아가마흐 프라마나니(pratyakṣa anumāna āgamāḥ pramāṇāni)"고 말한다. 이 문장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통찰은 직관(直觀·직관을 기초로 한), 유추(類推), 그리고 (믿을 만한 사람의) 증언(證言)이다.” 철학과 과학은 ‘실재’에 관한 올바른 지식을 획득하고자 한다. 파탄잘리는 지식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통찰의 유형을 인도 상키아철학의 경전 ‘상키아송’(Sāṁkhya Kārikā) 전통을 그대로 수용하여 셋으로 구분했다.
 
통찰의 세 가지 유형인 직관, 유추, 그리고 증언을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핸드폰 게임에 중독된 초등학생을 둔 아버지가 있다. 아버지는 평소 아이의 핸드폰 사용시간을 제어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버지는 퇴근 후 집에 돌아와 게임에 몰입하고 있는 아이를 직접 목격한다(직관). 아버지는 아이에게 게임을 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그 후, 아이가 방으로 들어가 한참 동안 나오지 않는다. 아버지는 아이가 십중팔구 게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유추).

또는 아버지가 퇴근 후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의 하소연을 듣게 된다. 어머니는 아이가 게임만 한다고 말한다(증언). 직관은 직접경험을 통해 얻는 지식이며, 유추와 증언은 간접경험을 통해 획득된다. 유추는 이전의 직접경험을 통한 이성적인 판단을 기반으로 생성된다. 증언은 자신이 그 현장에는 없었지만, 자신이 믿을 만한 사람의 말을 통해 대상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전달한다.
 

헝가리 출신의 미국 생화학자 얼베르트 센트죄르지(1893~1986) [사진=배철현 교수 제공]


첫째, 통찰은 ‘직관’(프랏약샤·pratyakṣā)이다. 직관은 보고, 냄새 맡고, 만지고, 듣고 맛보기, 즉 오감 중 하나 이상을 동원한 직접 경험을 통해 얻는 올바른 지식이다. 만일 내가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의 ‘고백론’을 안다면, 내가 그 책을 오랜 시간 눈으로 읽고 손으로 만졌다. 만일 내가 ‘김치찌개’를 안다면, 나는 그 음식을 후각, 미각, 촉각을 통해 직접 경험했다. 상키아 철학은 ‘통찰’에서 ‘직관’을 유추나 증언보다 우위에 둔다. 유추나 증언은 직접경험인 직관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인도 서사시 ‘마하바라타’와 ‘베다’를 집대성했다는 브야사(Vyasa)는 직관을 다시 둘로 구분한다. 하나는 오감을 통해 감지한 그 대상만의 개별적인 ‘특성’(特性·비세사viśeṣa)과 그 대상이 다른 물질들과 공유하는 공통적인 ‘보편성’(普遍性·사만야·sāmānya)이다. 내가 호수의 잔잔한 파도에 반영된 달의 모습을 본다고 가정해보자. 내가 잔물결을 통해 일그러진 달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봤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달’의 참모습이라고 판단하지 않는다. 내가 인식하는 ‘치타브리티’라는 물결치는 호수에서 출렁이며 왜곡된 그 순간의 ‘개별적인 달’뿐만 아니라, 저 밤하늘에 떠 있는 왜곡되지 않은 ‘보편적인 달’을 관찰한다. 이 두가지를 모두 보는 것이 ‘직관’이다.
 
둘째, 통찰은 ‘유추’(아누마다·anumāna)다. 브야사는 유추를 관찰의 대상이 가진 특별한 범주가 다른 대상들과 공유하는 공통적인 범주를 인식하는 행위로 해석한다. 예를 들어 내가 저 먼 산에서 연기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면, 나는 당연히 그곳에서 불이 났다는 사실을 유추한다. 내가 불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지만, 연기를 통해 불의 존재를 가정한다. 이 유추를 가능하게 하는 끈이 바로 ‘수반성’(隨伴性·브얍티·vyāpti)이다. 연기는 불을 수반하지 ‘물’을 수반하지는 않는다.
 
셋째, 통찰은 ‘증언’(아가마·āgama)이다. 증언은 믿을 만한 사람의 말이나 믿을 만한 증거를 통한 정보에 의지한 지식이다. ‘믿을 만한 사람’은 환각, 나태, 어리석음과 같은 흠이 없는 사람이다. 그 사람의 말은 내 귀로 들어가 올바른 정보로 수용된다. 증언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 단어 ‘아가마’(āgama)는 원래 ‘(누군가의 입을 통해 전달되어) 지금까지(ā) 내려온(gam) 것; 전통’이다. 이 전통을 통해 만들어진 가장 권위가 있는 것이 바로 ‘경전’이다. 불교에서는 아가마를 입으로 전해 내려온 모든 경전을 총칭하는 용어로 ‘아함경’(阿含經)이라 부른다.

인도철학의 가장 유력한 학파인 ‘베단타’ 학파는 ‘아가마’, 즉 경전을 사물에 대한 가장 올바른 지식을 획득하는 기준이라고 여긴다.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에서 힌두교 경전에서 한 구절로 인용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힌두교 경전을 포괄하는 ‘증언’을 가변적인 ‘치타브리티’의 일부로 여겼다. 또한 ‘통찰’의 말미에 ‘증언’을 위치하여 베다를 가장 중요한 경전으로 여기는 힌두철학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헝가리 출신의 미국 생화학자 얼베르트 센트죄르지(Albert Szent-Gyorgyi, 1893~1986)는 비타민C의 효능을 발견해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색에 관심이 많아 사물들을 단순히 보지 않고 관찰하기 시작한다. 그는 바나나가 시간이 지나면 짙은 고동색과 검은색으로 변하는 사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바나나 속에 있는 폴리페놀이라는 화학물질이 공기 중 산소와 결합하여 이 현상을 만든다. 그는 오렌지와 같은 과일이 검게 변하지 않는 이유를 추적해 비타민C를 발견했다.

통찰은 일상에 대한 재발견이다. 일상을 재발견하기 위해 자신이 관찰하는 대상을 지속적으로 보는 수련이 필요하다. 요가는 일상 중에 자신의 마음을 응시하는 수련이다. 나는 대상을 그저 보는가 아니면 꿰뚫어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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