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62] 오이라트는 어떻게 밀려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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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8-02-03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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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토목보의 변’관련 무협영화

[사진 = ‘신용문객잔’ 포스터]

‘용문객잔’(龍門客棧)이라는 제목의 무협영화가 있다. 1967년에 만들어진 것이니 이 영화를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는 홍콩 무협영화의 대가로 알려진 호금전(湖金銓)의 작품이다. 이 영화를 리메이크한 ‘新용문객잔’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1992년 다시 만들어졌다.

‘황비홍(黃飛鴻)’시리즈를 만든 서극(徐克)이 제작한 것으로 임청하와 장만옥, 양가휘 등 이름난 배우들이 등장한다. 스산한 바람이 부는 황량한 벌판에 자리한 숙박업소 용문객잔의 모습과 그 안에서 이뤄지는 반전(反轉) 그리고 객잔 앞 들판에서의 대결 등이 기억에 남는다. 이 영화는 ‘토목보의 변’의 역사적 사실에서 한 가닥을 잡아 만들어 낸 작품이다.

▶소삼협 근처 객잔 배경 영화
토목보 사건 때 포로로 잡혔던 정통제가 오랜 연금 끝에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오른 뒤 병부시랑 우겸(宇謙)은 경태제를 옹립했다는 이유로 저자거리에서 처형된다. 우겸은 경태제를 앞세운 전시 내각체제로 명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충신이었다.
 

[사진 = 영화속 환관]

그러나 정통제는 환관들의 부추김에 현혹돼 그를 처형하고 재산까지 몰수했다. 하지만 우겸의 곳간에는 값나가는 물건은 하나도 없었고 조정에서 받은 예복과 무기밖에 없었다고 한다. 정통제는 뒤늦게 우겸의 처형을 후회하며 우겸을 복권시켰다.

강직한 충신 우겸을 누명을 씌워 제거한 것은 간신인 환관들이었다. 영화는 우겸의 처형과 함께 그 가족들은 유배의 길에 오르면서 시작된다. 환관들은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 부하들을 보내 우겸의 가족들까지 없애 버리려 했다.

그 곳이 장강 소삼협(小三峽) 가운데 한 곳인 용문 근처 한 객잔이었다. 그 과정에 무협영화에서 반드시 나타나야할 정의의 칼잡이가 끼어들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물론 정의 칼잡이는 우겸을 따르던 검객들이었다. 소삼협은 뛰어난 경관을 지닌 곳이지만 영화의 객잔 주변은 황량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주변세력 비하시킨 무협작품
쏟아져 나온 많은 무협 소설과 영화 가운데 명나라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 적지 않다. 물론 토목보 사건 자체를 역사적 배경으로 하는 영화와 TV 드라마, 무협소설도 적지 않다. 그 작품들 대부분은 오이라트와 몽골을 막북의 오랑캐처럼 묘사하면서 포로가 된 황제도 명나라의 뛰어난 무인들이 직접 구출하는 것으로 묘사돼 있다.
 

[사진 = 만리장성 서쪽 끝(가욕관)]

무협소설이야 작은 역사적 사실에 기대어 대부분 상상과 허구를 가미하는 것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무협소설을 읽는 사람의 주류가 이른바 중원사람들일 것이니 그들의 구미에 맞추는 것을 탓할 것은 없다.
 

[사진 = 만리장성 성곽]

그래서 무협소설에서는 한족이 아닌 주변 세력을 새외(塞外), 즉 만리장성의 바깥쪽의 세력이라 해서 야만적으로 취급하기 일쑤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황제까지 포로로 잡았다가 돌려준 오이라트를 그냥 야만인으로 취급하며 무시하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 이후 명나라가 몽골 쪽과 화평 관계를 맺은 뒤 실제로는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북쪽을 상대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을 보면 그렇다.

▶에센, 타이슨칸 제거

[사진 = 오이라트군의 명군격퇴]

명나라가 멀찌감치 돌아서 있는 동안 초원에서는 여전히 동서몽골간의 대립과 신경전이 펼쳐진다. 당시 몽골고원의 지배자는 오이라트의 에센이었다. 하지만 명목상의 칸은 케룰렌 강변에 본거지를 둔 타이슨칸이었다.

에센은 누이동생을 타이슨칸의 정부인으로 삼도록 했다. 그래서 그 사이에 난 자식, 즉 자신의 외 조카를 다음 칸으로 올리려했다. 즉 칭기스칸의 후예이기도하지만 오이라트의 피를 이은 인물을 칸으로 삼아 영향력을 미치려 했던 것이다.
 

[사진 = 영화속 전투장면]

하지만 타이슨칸이 다른 부인에게서 난 자식을 황태자로 내세우려고 했기 때문에 에센은 이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이 문제로 둘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자 타이슨칸은 군사를 이끌고 에센을 공격하고 나섰다. 하지만 에센에게 도전한다는 것은 애초 무리였다. 전투에 패한 뒤 도망갔던 타이슨칸은 결국 살해되고 만다. 이때가 1452년이었다.

▶오이라트 칸 탄생
타이슨칸을 제거한 에센은 동몽골 황족에 대한 대대적인 청소작업에 나섰다. 오이라트인을 어머니로 둔 황족 외에는 거의 모두 죽였다. 몽골사회는 대 혼란에 빠졌다. 사람만 제거된 것이 아니라 동몽골이 가지고 있던 거의 모든 것을 몽땅 없애 버렸다.

이때까지 몽골이 가지고 있던 기록과 문서 그리고 족보 등도 거의 모두 사라져 버려 이후 몽골은 종족별로 새로운 계보를 만들어야하는 상황이 됐다. 이듬해 에센은 스스로 대칸이라 칭하면서 칸의 자리에 올랐다.

칭기스칸 가계의 핏줄이 아닌 오이라트 출신의 칸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칸의 자리를 오래 유지하지는 못했다. 에센이 반란을 일으킨 부하에게 곧 이어 살해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동몽골인들은 에센의 죽음을 텡그리, 즉 하늘의 뜻을 어기고 칸의 자리에 오른 데 대한 칭기스칸의 심판으로 여겼을 것이다.

▶다시 밀려난 오이라트
에센의 죽음으로 오이라트 제국은 쉽게 무너져 내렸다. 동몽골에서 영향력을 잃은 오이라트는 다시 서쪽으로 물러나 그들의 본거지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서쪽 그들의 본거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진 = 일리강]

동몽골에서 밀려난 이들은 이번에는 서쪽으로 세력권을 넓히기 시작했다. 일리강 하류와 추강 등이 있는 서남쪽으로 밀려간 오이라트는 옛 차가타이계 종족들을 서쪽으로 밀어냈다.

또한 지금의 카자흐스탄 지역에 있던 카자흐인들도 회오리바람처럼 밀고 내려온 오이라트의 공격에 견디지 못하고 서쪽으로 도망쳤다. 16세기 후반에 들어 이들 오이라트는 예니세이강 상류에서부터 일리강 계곡에 이르는 지역을 거의 장악했다.
 

[사진 = 석양의 몽골초원]

발하쉬 호수 근처 초원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투르크계 유목민들은 알타이 지역에서 밀어닥친 몽골계 유목민들에 의해 그들의 터전을 잃고만 것이다.

[사진 = 준가르 분지의 목화밭]

[사진 = 준가르 분지]

동몽골에서 쇠퇴한 오이라트는 이처럼 서쪽에서 새로운 세력을 형성함으로써 나중에 오이라트와 같은 줄기에서 파생돼 나와 몽골고원을 다시 장악하게 되는 준가르 제국의 출현을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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