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기의 그래그래] 이름이 뭐냐요? 밥은 먹었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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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기 작가·북칼럼니스트
입력 2017-11-1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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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최보기 작가·북칼럼니스트]


자신을 쥐라고 생각해 고양이만 보면 벌벌 떠는 한 사내가 있었다. 결국 병원에 입원해 정신과 치료를 받은 후에야 자신이 사람임을 명확히 인식했다. 완치와 퇴원 결정에 사내는 기쁜 마음으로 병실을 나섰다. 그런데 한참 후 의사는 병원 마당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그 사내를 발견했다. 왜 그러고 있느냐는 의사의 질문에 그는 “고양이들이 여전히 저를 쥐로 알고 덤빌까봐서요”라 답했다. 사내는 다시 입원을 해야 했다. 그저 웃자고 창작된 유머에 불과하지만 뜯어보면 일방소통과 쌍방소통의 차이를 내포하고 있다.

‘홍길동님, 들어 가실게요’ 같은 엉터리 존댓말과 ‘고객님, 이 상품은 오만원이십니다. 오만원 계산하시겠습니다’, ‘여기 자장면 나오셨습니다’ 같은 사물존대가 새로운 언어문화로 굳건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듣기가 거북해 당사자에게 그것을 지적하면 ‘나도 알지만 어쩔 수 없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말버릇이 없다거나 공손치 못하다고 따지는 손님들이 가끔 있기 때문’이라는 답변 앞에서 더 할 말도 없다.

더구나 사물존대에 익숙한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탓할 수 없는 다른 이유는 우리말의 문법과 어휘 등이 심히 복잡하다는 것이다. 우리야 우리말의 우수성을 자랑하지만 우리말을 외국어로 익히는 외국인에게 우리말은 절대 쉬운 말이 아닐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렇지 아니하지 아니한 것이 아니라 빨갛고 벌겋고 불그레하고 불그스름한 석양 앞에 서면’ 말이다. 존댓말의 복잡함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많이 단순해졌지만 장·노년층의 언어에는 여전히 ‘아빠, 아버지, 아버님, 부친, 춘부장, 장인, 장인어르신, 빙부’ 등등이 혼재한다. 영어라면 '파더(father)'나 '유(you)' 하나면 끝나는 것을.

우리말 규정의 높임말 규칙 중 하나는 과장이 사장 앞에서 부장에 대해 말할 때 “부장이 통화했습니다”라고 해야 한다. “부장님께서 통화하셨습니다”라 말하면 부장보다 높은 사장에게 결례인 것이다. 그런데 과장, 부장, 사장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높임말 원칙대로 또박또박 말하는 과장은 부장에게 은근히 ‘싸가지 없는 놈’으로 찍힐 가능성이 농후하다.

언론계에서는 일찌감치 국장, 차장 등의 호칭 자체에 존대가 포함돼 있으므로 굳이 ‘님’ 자를 붙일 필요가 없다는 뜻에서 신입 기자라도 ‘선배, 차장, 국장’으로 호칭한다. 그런데 이 또한 그들과 거래하는 대기업 홍보실 직원이 어쭙잖게 ‘김 기자, 박 국장’이라며 ‘님’ 자를 뺐다가는 경을 치를 수도 있다. 이처럼 말에 따른 소통은 문법이 아니라 쌍방이 심정과 문화로 동의해야 문제가 안 생긴다. 사물존대가 사라지기 어려운 이유다.

존댓말 문제를 꺼낸 것은 엊그제 지하철에서 겪은 일 때문이다. 경로석 쪽 통로에 서 있던 젊은 남녀에게 뭔가 불만이 있던 노인(어르신)이 반말로 훈계를 한 것 같은 상황이었다. 젊은 남녀는 “그런데 왜 반말이냐”고 강하게 항의하며 “사과하라”고 노인을 몰아세웠다. 젊은이들의 거센 반격에 쩔쩔매는 노인을 대신해 옆에 있던 노인이 “나이 든 사람이 손자뻘에게 반말 좀 할 수 있지, 뭘 그래”라고 거들고 나섰다. 젊은 남녀는 이에 질세라 “우리가 할아버지 손자예요? 자식이에요?”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다음 역에서 그 젊은이들이 ‘재수없다’는 말을 남기며 지하철에서 내렸고, 부근에 있던 중년의 여인이 부들부들 떠는 노인의 손을 잡아주는 것으로 상황은 끝났다.

물론 중년(?)인 나 역시 그 젊은이들이 불쾌했다. 다만, 그걸 지켜보면서 이 즈음에서 세대차이란 쉬운 말을 넘어 전통과 신문화, 동양과 서양, 우리와 개인, 춘부장과 히(He)에 각기 익숙한 말 문화의 충돌을 짚어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몽골제국을 건설한 칭기즈칸은 가장 먼저 대법령(예케 자사크)을 제정했다. 제국 초기 일찌감치 법치주의의 틀을 세웠던 것인데, 그 안에는 ‘누구든 경칭을 쓰지 말고 이름을 불러라. 천호장이나 칸을 부를 때도 마찬가지다’는 조항이 있다. 부하들도 칭기즈칸 자신을 ‘테무친’이라 부르라는 것이다. 이는 대개 두 가지의 뜻을 담은 것으로 해석된다. ‘우리는 위아래 없이 모두 형제’라는 공동체의식의 강조와 ‘경칭 없는 쌍방 수평소통이 일방 수직소통보다 민주적 의사결정과 문제 해결에 더 유리’해서다. 가히 칭기즈칸이다.

이제 우리도 칭기즈칸의 혁명처럼 어법을 고쳐보면 어떨까? 영어처럼 위아래 없이 ‘너’라고 하기엔 너무 충격적이므로 대신 ‘누구나, 서로에게, 무조건 존댓말 하기’를 도입해보면 어떨까? 상대가 어른이든 아이든, 가족이든 남이든 문장 끝에 무조건 ‘요’ 자를 붙여서 말하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이름은 뭐니요? 밥은 먹었니요?’가 될지언정. 그리 되면 언어행태가 부르는 문화충돌도 없앨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평등과 인권 의식도 신장되지 않겠는가.

어려울 것도 없다. 기업들은 이미 수평적 조직문화를 위해 부장님, 과장님 같은 계급장 대신 길동님, 길순님으로 바꾸고 있다. 형제님, 자매님으로 서로를 존중하는 종교기관은 물론 낯선 사람끼리 교류하는 온라인 동호회에서도 이름 중심의 존칭과 상호 존댓말은 벌써부터 자연스러웠다. ‘냉수유서 분수유파(冷水有序 糞水有波), 찬물도 위아래가 있고 똥물도 파도가 있다는 시대가 저물고 있으니 한 번 진지하게 고려해보자’ 하면 너무 진지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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