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슨이 '물꼬' 튼지 45년··· 협력·견제로 '상호공존' 틀 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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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차이나 황현철 기자
입력 2017-11-03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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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닉슨, 첫 방중 마오쩌둥과 정상회담

  • 카터, 해빙무드 타고 1979년 정식수교

  • 톈안문 사태로 양국 관계 급속 악화

  • 부시·클린턴, 잇단 방중 경색 풀기도

  • 오바마는 재임기간 3차례 중국 방문

1972년 2월 21일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과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가졌다.[사진=바이두]

지난 1972년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이 미국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올해는 닉슨 전 대통령이 역사적인 중국 방문을 이뤄낸 지 45주년이 되는 해다. 그동안 미·중 양국 관계는 시진핑 주석이 앞서 말했던 것처럼 "비바람이 불 때도 있었지만, 항상 역사적인 발전을 이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동안 리차드 닉슨부터 제럴드 포드, 지미 카터, 로널드 레이건,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 등 미국 역대 대통령들이 중국을 방문해왔다. 그들이 중국을 방문했던 발자취를 통해 미·중 관계의 변화상을 읽어본다.

◆닉슨독트린→핑퐁외교→닉슨 방중

1969년 3~6월 중국과 구소련은 국경에서 수차례 무력충돌을 빚었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전으로 국내외적 압박을 받는 상황이었다.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은 그해 7월 25일 괌에서 ‘'아사아의 안보는 아시아에 맡긴다'는 대아시아 정책을 담은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이는 냉전체제가 완화되는 ‘데탕트’ 시대를 이끌며 미·중 관계의 새로운 포문을 열었다.

1971년 4월 미국 탁구팀의 방중은 ‘핑퐁외교’를 만들어냈다. '외교계 거물'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의 작품이다. 그는 같은 해 7월 비밀리에 베이징(北京)을 방문해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총리를 만나 닉슨의 중국 방문에 합의했다.

중국은 그해 10월 25일 유엔 총회에서 알바니아 등이 발의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유엔 조직 내 합법 권리 회복 문제’ 표결로 대만을 밀어내고 유엔 회원국이 됐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1972년 2월 21일 닉슨은 미국 대통령 최초로 방중해 마오쩌둥(毛澤東) 전 중국 국가주석과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가졌다.

닉슨의 방중은 ‘상하이(上海)공동성명’ 발표로 이어졌다. 성명은 평화공존원칙에 따라 패권추구에 반대하고 대만은 중국의 일부라는 내용이 담기며 양국 관계의 정상화로 이어졌다.
 

1984년 중국을 방문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덩샤오핑 주석이 악수를 나누고 있는 모습.[사진=바이두]

◆미·중 수교 이뤄낸 카터···반공주의자 레이건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1978년 4월 “하나의 중국만을 인정하고 중국과 정식으로 외교 관계를 맺는 것이 미국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미·중 양국은 12월 4일 세 가지 합의를 이뤘다. 핵심은 하나의 중국과 대만이 중국의 일부임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해빙무드로 접어든 양국은 1979년 1월 1일 정식 수교를 맺었다. 그러나 미국이 대만에 무기를 수출하는 문제로 양국 관계는 공든 탑이 무너질뻔한 위기를 한차례 맞는다. 장장 8개월에 걸친 협상 끝에 1982년 8월 17일 양국은 ‘8·17 공동성명’을 이끌어낸다. 성명에서 미국은 대만에 수출하는 무기의 질과 양을 줄여나가기로 했다.

그리고 ‘뼛속까지’ 반공주의자로 알려진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도 1984년 양국수교 후 첫 중국 방문을 가졌다. 그는 국빈방문 기간 중 리셴녠(李先念) 당시 국가주석과 덩샤오핑(鄧小平) 등을 만나 “미국은 앞으로 3개 공동성명의 의무를 따르고 하나의 중국 정책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3개 공동성명은 양국 관계의 기반을 이루는 ‘상하이 공동성명’, ‘미·중 수교 성명’, ‘8·17 공동성명’을 말한다.
 

1998년 중국을 방문한 빌 클린턴 대통령과 짱저민 국가주석.[사진=바이두 ]

◆톈안먼 사태 이후 부침 거듭한 미·중 관계

양국 관계는 1989년 6월 중국 톈안먼(天安門) 사태 이전까지 고위 인사 간 상호 교류, 경제협력 및 과학기술 교류 증대 등 꾸준히 진전됐다. 1989년 2월에는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전 대통령(아버지 부시)이 중국을 방문했고, 같은 해 11월에는 미국 해군함대가 칭다오(靑島)에 기항하는 등 군사 관계도 증진됐다.

그러나 톈안먼 사태 이후 양국 관계는 상호 제재와 보복 조치로 급속히 악화됐고 부침을 거듭하기 시작했다. 이에 ‘아버지 부시’는 과거 주중 연락처 주임으로 베이징에서 근무했던 경험과 이때 맺어진 중국 고위관료들과의 밀접한 관계를 바탕으로 양국 관계 개선과 우호 강화에 힘썼다.

1997년 10월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이 톈안먼 사태 이후 중국 국가원수 최초로 미국을 방문해 양국 관계는 다시 해빙기를 맞는다. 장 전 주석의 방미를 계기로 양국은 21세기를 향한 ‘건설적·전략적 동반자 관계’ 추진에 노력하기로 합의했다.

이듬해 6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중국을 방문해 핵(核)확산 억제, 아시아 금융위기, 국제 안보문제 등 주요의제에 있어 양국의 전략적 대화를 통한 공동협력 의지를 드러냈다. 그리고 지역과 국제문제 해결에 있어 양국의 공조체제의 중요성을 확인하고 향후 관계발전의 기반을 구축했다. 뿐만 아니라 전략핵 미사일을 상호 조준하지 않기로 합의하고 한반도 안정을 위한 협력도 강화하기로 합의했다.
 

2009년 중국을 방문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후진타오 국가주석.[사진=바이두 ]

◆ '중국위협론' 대두···G2 협력과 견제

아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2001년 상하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 참가했고, 이듬해 2월 베이징을 방문했다. 하지만 2000년 이후 미국의 정찰기 활동이 증가하면서 양국 간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계속됐다. 급기야 중국 해역에서 양국 군용기가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해 미·중 관계는 더욱 꼬여만 갔다. 또 중국이 장기간 고속 성장을 바탕으로 군사력과 국제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미국 내에서 ‘중국 위협론’도 대두됐다.

중국은 양국의 고위급 접촉을 통해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2005년 8월 베이징에서 개최된 제1차 미·중 전략대화는 바로 그 노력의 결실이다. 이를 기점으로 양자 간 협의체가 강화되면서 상호협력과 이해증진의 발판이 마련됐다.

2009년 1월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출범한 이후 양국은 활발한 상호 방문으로 관계를 강화해갔다. 오바마는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세 차례나 중국을 방문했다.

또 양국은 세계 경제 회복, 지역 및 세계적 도전, 기후변화, 에너지, 환경 등 전 세계적 문제에 대한 공조 의사도 표명했다. 2010년 들어서 양국 관계는 그해 1월에 있었던 미국의 대만 무기 수출 계획 발표와 2월에 있었던 오바마의 달라이 라마 면담, 무역분쟁 및 위안(元)화 환율 평가절상 문제 등으로 어려운 국면에 맞닥뜨리기도 했다.

오바마 집권기에도 양국은 크고 작은 마찰이 끊이지 않았지만, 대화 채널은 지속적으로 확대 강화되며 안정적 관계를 이어갔다. 미국은 중국을 범세계적 문제 해결의 동반자이자 세계를 이끌어가는 리더국으로 인정했고, 주요 2개국(G2)은 협력과 견제를 통해 상호공존의 틀을 구축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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