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의 酒食雜記] 편맥(便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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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권 칼럼니스트
입력 2017-10-2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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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종권 칼럼니스트]


한때 대형마트에 아저씨들이 넘쳤다. 헐렁한 바지에 카트를 밀면서. ‘마눌님’에게 끌려 나왔지만, 싫지 않은 눈치다. ‘세계 맥주’ 때문이다.

수입 맥주가 골라 담아 4캔에 9200~9400원이다. 작은 캔이 아니라 500ml다. 한 캔의 표시 가격은 3700~4400원. ‘기네스’, ‘블랑’, ‘필스너 우르켈’쯤이면 반값이나 다름없다. 호텔 바나 시내 전문점에서 한 잔에 9000~1만8000원씩 했던 유명한 맥주들이다.

‘미끼’ 상술이었다. 짐꾼으로 따라온 남편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면서 동시에 충동구매를 유발한다. 맥주를 쓸어담고서 식품(이라 쓰고 안주로 읽는다)코너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노릇노릇 튀겨진 통닭이 동네 프랜차이즈 치킨 가게의 절반 가격에도 못 미친다. 생선회와 삼겹살도 시선을 강탈한다.
자연히 수입 맥주 시장은 확대일로를 걸었다. 매년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는 중이다.

지난 9월 맥주 수입은 전년 동월보다 60.9% 늘었다. 반면 하이트진로는 지난 4년간 1000억원대 적자를 기록했다고 한다. ‘클라우드’와 ‘피츠’를 앞세운 롯데주류도 올해 매출이 1200억~1400억원으로 예상되지만, 영업적자는 불가피할 전망이다.

이랬던 대형마트의 풍경이 사뭇 달라졌다. L마트의 경우 ‘아재’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 수입 맥주 코너도 한산하다. 종류도, 값도 예전과 다르다. 갖가지 맥주가 상자째 쌓여 있던 곳은 국산 브랜드가 점령했다. 전용 잔과 안주까지 붙여서. 수입 맥주의 미끼 효과보다 자사 브랜드 맥주의 판매 부진이 신경 쓰였나.

그보다는 편의점의 대반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척의 동네 편의점에서도 수입 맥주가 4캔에 1만원이다. 교통비를 감안하면 오히려 싸다. ‘홀로’족을 겨냥한 일부 편의점은 한 캔에 3000원 균일 가격이다. 그러니 굳이 대형마트까지 가지 않는다. 퇴근길이나 저녁 산책 후 가볍게 들르면 된다. 게다가 파라솔 달린 탁자에 플라스틱 의자까지 갖췄다. 지난여름 밤 도심의 편의점은 유럽의 노천 카페를 방불케 했다. 원래 가게 안쪽보다 테라스가 훨씬 비싸지 않던가. 지갑이 가벼운 샐러리맨들이나 눈칫밥 ‘사오정’, 취업전선 최전방 청년들에게는 그야말로 ‘만원의 행복’이다.

바야흐로 '편맥'(편의점 맥주) 시대이다. 아이돌그룹 ‘걸스데이’의 혜리가 숙취해소 약을 광고하면서 “피맥(피자), 감맥(감자칩), 노맥(노가리), 양맥(양꼬치), 치맥(치킨)”을 줄줄이 읊지만, 대세는 역시 ‘편맥’이다. 

동네 호프집은 불만이다. 세계 맥주에 입맛이 길들여진 주당들에게 국산 맥주는 밍밍하다. 세계 맥주를 팔자니 편맥에 가격 경쟁이 안 된다. 편의점 업주를 바라보는 호프집 사장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다. 동병상련 자영업자에서 경쟁상대로 돌변한 것이다.

한편으론 편맥 현상이 불편하다. 술이란 본디 ‘더불어’ 마시는 것이다. 자고로 주흥의 ‘3W’는 첫째가 누구(Who)와, 둘째가 어디서(Where), 셋째가 어떤(Which) 술이냐 하는 것이다. 오랜 벗이나 정든 님과 마신다면 장소와 술 종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누구’가 비단이라면 ‘어디서’는 꽃, 소위 금상첨화(錦上添花)이다. 주종은 맨 마지막이다.

반면 편맥은 ‘혼자서 골라 마시는 재미’가 핵심이다. ‘더불어 분위기에 젖어 정을 나눈다’는 술의 본질과 동떨어져 있다. 파편화된 사회 관계 속에서, 사막화된 도시의 변두리에서 홀로 외로운 늑대가 되어가는 현상일까. 혼밥이 한솥밥의 실종이라면, 혼술은 너와 나를 잇는 정(情)의 희석일 것이다. 술에 물 탄 듯이.

홀로 마시는 맥주는 거품에 슬프다. 부동산도, 경제도, 사회 곳곳에도 거품이 잔뜩 끼었다고 하지 않나. 그래도 맥주는 거품이 생명이다. 거품이 없으면 맛도 없고 멋도 없는, 밋밋한 김빠진 맥주에 불과하다. 한 맥주 광고에서 '엔젤 링(Angel Ring)'을 강조하는 것도, 하얀 콧수염처럼 거품을 묻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거품도 맥주일까.

일본의 애주가가 호프집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500cc를 시켰는데, 거품이 가라앉고 보니 400cc였단다. 맥주의 양을 속인 사기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호프집 손을 들어줬다. 거품도 맥주를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이라 판결한 것이다. 사실 거품은 맥주가 직접 공기에 닿는 것을 차단함으로써 급속한 산화를 방지한다. 우리 맥주가 거품이 적고 급속히 사라지는 것은, 그래서 잔 가득히 술로 채워지는 것은 ‘솔직함’이 아니라 ‘부족함’ 때문이다. 거품 기술이 부족한 것이다.

‘폼생폼사’라는 말이 있다. 겉멋 부리는 이를 부러운 듯 비꼬는 말이다. 여기서 폼은 모습을 뜻하는 영어 '폼(Form)'이다. 이를 거품이란 뜻의 '폼(Foam)'으로 읽으면 “거품 같은 인생, 거품처럼 스러진다”는 전혀 다른 뜻이 된다. 

‘나 홀로 맥주’는 알코올 중독의 지름길이다. 차제에 편맥에서의 '혼맥(혼자 맥주)'이 혼맥(婚脈)의 씨앗이 됐으면 좋겠다. 인구 절벽을 막기 위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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