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85]초등학생·교사·상이군경·윤락녀·경찰까지···‘데모 만능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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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8-09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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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85)

  • 제4장 재계활동 - (80) 데모로 날이 새고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1961년 4·19 1주년을 맞아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에서는 4·18기념비(記念碑) 제막식(除幕式)이 있었다. 내빈축사(來賓祝辭)로는 민의원 의장 곽상훈(郭尙勳)만을 예정하고 있었는데, 개시(開始) 직전에 갑자기 대통령 윤보선(尹潽善)과 국무총리 장면(張勉)이 예고 없이 들이닥쳤다. 유진오(兪鎭午) 총장은 모처럼 참석한 대통령과 국무총리에게 축사를 청하지 않을 수 없어 식순을 무시하고 대통령과 국무총리에게 축사를 청하는 혼란이 빚어졌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축사는 정치공방(政治攻防)의 연설이 되었고 그 바람에 축사를 하기로 예정돼 있던 국회의장마저 흥분하게 되어 그는 등단하자마자 “나도 할 말이 있다”면서 준비된 축사 원고는 옆으로 밀어 놓고 즉흥 정치연설을 하는 촌극이 벌어지지 않는가. 참으로 어이없는 광경에 목당(牧堂) 이활(李活)은 학생들의 동요가 우려되었다. 유 총장은 제막식이 끝나자 다시 단상으로 올라가 학생들에게 가두데모를 벌이지 않도록 간곡하게 당부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런 총장의 당부가 있어서였던지 그날은 무사히 지나갔다. 뿐만 아니라 그 이튿날은 서울운동장에서 4·19 기념식이 있어서 또 걱정이 되었으나, 그날도 큰일 없이 넘어갔다.

4·19 이후 과도정부(過渡政府) 치하에서부터 시작된 데모의 물결은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경향(京鄕)의 구별 없이 계속되었다. 장면 정권은 원내 안정세력을 갖지 못한 채 하루도 조용한 알이 없었다. 일선에서 이를 제지하고 규제해야 할 경찰은 독재정권의 앞잡이로 4·19 당시 크게 질타당한 이후로 무력하기 짝이 없었으므로 데모의 물결은 전국을 휩쓰는 난류(亂流)로 이루게 된 것이다.

교통부장관이 신파(新派)로 변절했다 하여 일으키는 데모, 일본 친선사절(親善使節)의 내한을 반대하는 데모, 국회의원이 경찰을 구타했다 하여 항거하는 경찰관들의 연좌데모, 잡부금 징수 시정을 요구하는 초등학교 학생들의 아동데모, 제대한 교사들이 복직을 요구하는 교원(敎員) 데모, 교원노조(敎員勞組) 결성 반대에 항거하는 단식(斷食) 데모 등등 실로 그 구실이 다양했다. 상이군경들이 생활 보장을 요구하는 의족(義足) 데모에다 창부(娼婦) 축출을 요구하는 기생(妓生)데모, 악덕 포주를 규탄하는 윤락녀(淪落女) 데모도 곁들여 데모로 날이 새고 데모로 해가 지는 데모 만능시대였다.

이러는 가운데 점차 반민주적(反民主的)인 목적의식도 고개를 들어 나중에는 국가 운명을 위협하고 사회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데모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61년 3월 18일에는 30여 혁신단체(革新團體)들이 연합하여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데모를 감행했고, 같은 날 대구에서는 횃불 시위까지 있었는가 하면 3월 22일에는 데모 규제법(規制法)과 반공(反共) 임시특별법(臨時特別法)의 폐기를 주장하는 2대 악법(惡法) 반대 횃불 데모가 시작되어 끝내는 난동화하는 사태가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목당(牧堂) 이활(李活)은 한심스러웠다. 4월혁명(4月革命)이라는 유혈로써 대가(代價)를 치루고 쟁취한 고귀한 자유가 지각없는 일부 부류들의 방종으로 진흙탕을 만들어 놓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판국임에도 극도로 문란해진 사회질서(社會秩序)를 바로잡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는 장면 정권 또한 너무 무기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민들의 숭고한 정의와 준법정신을 수호 못하는 정권은 무익한 존재였다. 정치 사회의 훈련이 뒤져 있는 나라에선 안전과 자유를 동시에 보장할 수 없는 것이고, 서서히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임에도 그러기에는 국민의 지지를 받고도 강력한 통치에는 주저하는 장면 정권은 참으로 안타까운 바가 있었다. 한마디로 아쉬운 것이 인물이었다. 목당은 새삼스럽게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를 생각하고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살아 있었다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을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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