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人100言]김용완 “기업은 커질수록 국가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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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1-24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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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경제의 기적을 이끌어낸 기업인들의 ‘이 한마디’ (16)

동은 김용완 경방그룹 창업자[사진= 경방 제공]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경성방직(현 경방)은 일제시대에 설립된 한국 기업사상 최초의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국민주 형식의 주식회사다.

1919년 3·1운동 직후 인촌(仁村) 김성수 선생은 전국을 돌며 각 지방 유지들로부터 주식을 팔아 자본금 100만원을 마련해 그해 10월 경성방직을 설립했다. 우리 민족이 입을 옷감은 우리 손으로 만들겠다는 신념하에 설립된 경성방직의 주당 가격은 50원이었다. 설립 당시 주식 2만 주는 모두 한국인이 소유했다.

경방은 또 1939년 중국 선양 쑤자툰에 남만방적주식회사를 설립해 한국 제조업 기업 최초 해외 진출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남만방적은 전원 한국인을 채용해 공장내 학교와 직원사택, 의료시설을 갖추는 등 직원을 위한 다양한 복지제도를 실시했다.

자본금은 인촌이 주도했으나. 경방의 실질적인 창업주는 동은(東隱) 김용완 경방그룹 창업자다. 인촌과 처남 매부지간인 동은은 인촌이 운영하던(현 삼양사)에서 근무하다가 1938년 경성방직 지배인으로 시작해 1946년 제4대 사장에 취임했다.

해방 직후 일본인들이 철수하는 바람에 기술인력 부족으로 국내 면방직공장 가동이 중단됐다. 그러자 동은은 남만방적에서 철수한 직원을 타사 공장으로 보내 생산이 재개될 수 있도록 지원했다.

1956년 경성방직은 국내 1호 상장사가 됐다. 같은 해 대한증권거래소가 출범하며 시작된 국내 주식시장은 3월3일 증시 개장 당시 조흥은행, 한국상업은행, 대한해운공사, 조선운수 등 모두 12개 종목이 상장됐다. 이중 경성방직이 회원번호 001번을 받았다.

동은은 경방의 기업정신을 ‘공선사후(公先私後)’로 뒀다. ‘공적인 일을 우선하고 사적인 일은 뒤로 한다’는 것이다. 그는 평소 “기업은 사회적 공기(公器)이다. 기업인은 무조건 돈을 많이 벌기보다 기업을 일으켜 많은 사람에게 생활의 터전을 마련해주고, 기업 이윤을 사회에 되돌려준다는 데 보람을 느껴야 한다”라는 말을 자주 하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

직원에 대한 책임감도 유난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해 종업원 모두가 피난길에 오르자, 경리직원을 동원해 피난지를 찾아다니며 한사람 한사람에게 월급을 지급했다.

동은은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 회장을 여섯 차례나 지내며 개발시대에 재계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국가발전에 이바지했다. 그가 회장으로 재임하던 1972년, 정부가 기업의 만성적인 자금난을 해소하기 위해 회사채 상환을 일정기간 동결하는 등 획기적인 조치를 취할 때 정부 건의에 앞서 스스로 회사채를 갚는 결단을 보였다.

또 남만방적의 경험을 살려 노사 양측이 사내 직원의 의료비용을 반반씩 부담하는 ‘사내 의료보험 제도’를 도입해 직원 복지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도 했다.

동은은 1975년 경영 일선에서 떠나면서 자신이 소유한 경방의 주식을 한 주도 남기지 않고 전부 임직원의 후생사업을 위한 자금으로 내놓았다.

‘분수를 알고 일을 즐기라’는 뜻의 안분낙업(安分樂業)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던 동은은 마지막까지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이며 재계의 거인다운 면모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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