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초대석]창립 1년만에 업계 2위 우뚝...분양홍보 피알페퍼 서희석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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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4-09-02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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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토지신탁 기업홍보 맡으며 성장 기반 마련..."종합 홍보대행사로 거듭" 계획

 

서희석 피알페퍼 대표가 신사동 피알페퍼 본사에서 가진 아주경제와 의 인터뷰에서 이야기 하고 있다.[남궁진웅 timeid@]


아주경제 김창익 기자 =“특별한 게 없습니다.”

기자가 인터뷰할 때 듣는 가장 난감한 말이다. 기사나 이야기 꺼리를 눈에 불을 켜고 찾는 기자에게 특별할 게 없다는 인터뷰 대상의 대답은 더 이상 인터뷰를 진행할 이유가 없다는 말과 같은 의미기 때문이다. 

회사 문을 연 지 1년 만에 매출을 기준으로 부동산 홍보업계 랭킹 2위의 반열에 오른 서희석(43) 피알페퍼 사장을 지난 1일 신사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와의 인터뷰는 쉽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특별할 게’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그의 성공 키워드는 바로 ‘기본에 충실하기’란 사실을 깨닫고 비로소 이야기 꺼리를 찾게 됐다.

"성공이란 말은 아직 어울리지 않는다"는 그에게 성공의 비결을 물었더니 “성공의 비결이랄 것 까지는 없고 그냥 고객의 요구에 가장 빨리 응대를 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덧붙여 “빠른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잘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그 것이 실제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지난해 1월 요즘 가장 핫(Hot)한 트렌드의 거리로 꼽히는 압구정 세로수길에 직원 6명과 피알페퍼 사무실을 냈다. 그로부터 불과 두달 뒤인 3월 한국토지신탁을 고객으로 잡으면서 성장의 기반을 마련했다. 부동산 시행사업에 적극 나서고 있던 한국토지신탁이 연간 단위의 홍보마케팅 대행사를 찾고 있었고, 프리젠테이션(PT)에서 선두 업체들과 경쟁 끝에 피알페퍼가 최종 낙점됐다.

‘PT에서 경영진을 사로잡을 만한 전략이 있었나?’라고 물었더니 서 사장은 “단일 프로젝트를 홍보하는 게 아니라 1년간 기업의 이미지를 관리하고 프로젝트를 홍보하는 일이었다”며 “부동산 담당 기자 뿐 아니라 IR(투자자를 대상으로 한 기업 설명)을 담당하는 증권과 금융부 기자들과의 관계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관련 경험을 담담히 얘기한 것이 눈의 띈 것 같다”고 했다.

본인은 잘 모르는 것 같지만 인터뷰 내내 그가 이야기 보따리에서 풀어낸 자신의 삶은 평범의 범주에서는 벗어나 있었다. 시쳇말로 오히려 버라이어티(다양)했다.

서 사장은 대학 졸업후 1998년 한 벤처 기업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이른바 잘나가는 계열사를 여럿 거느린 지주사로 액면가 5000원짜리 주식이 한 때 40만원에 육박했던 벤처다.

그 곳에서 홍보 업무를 담당하며 홍보·마케팅·IR 등에 대한 감을 쌓았다. 벤처기업이라 업무가 세분화 되지 않은 게 오히려 지금 사업을 일으킬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하지만 거품처럼 부불었던 벤처 열풍이 꺼지면서 다니던 회사가 쇄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2003년 회사가 문을 닫자 그는 입사 동료와 PPL(제품간접광고) 회사를 차렸다. 영화속 본드카로 BMW가 유명해지면서 지금은 PPL이 보편적이 광고 기법으로 자리잡았지만 당시만해도 국내 광고 시장에서 PPL은 개척의 영역이었다.

“뉴욕에서 유학한 동료가 선경지명이 있었던 것 같다. 미국에서는 PPL이 합법이었고 보편화된 단계였고 한국에서도 곧 시장이 커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서 사장의 회고다.

하지만 개척자의 길은 그리 쉽지 않았다. 국내 광고시장에서 PPL은 2010년에서야 합법화가 됐으니 서 사장과 그의 동료는 두 박자를 앞선 셈이었다.  첫 직장에 이어 두 번째 실패를 경험해야 했다.

3년간 경영하던 광고회사의 문을 닫고 그는 2006년 월드건설 홍보팀에 입사하면서 건설업계와 인연을 맺게 된다. 당시만해도 메르디앙이란 브랜드로 승승장구하던 중견건설사중 하나였다.

행운의 여신이 그에게 등을 돌린 것일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건설사들이 줄줄이 도산의 길을 갈 때 월드건설도 거칠은 불황의 파고를 넘지못하고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대상의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한 잔의 고배를 더 마신 뒤 서 사장이 발을 디딘 곳이 바로 (주)용산역세권개발이다. 2011년 사업비 30조원으로 단군이래 최대 개발사업이란 수식어가 붙은 용산역세권 개발 사업의 홍보를 맡게된 것이다. 건설 홍보업계의 쟁쟁한 선배는 물론 유력 언론사의 후보를 모두 제끼고 서 사장의 이력서에 최종 낙점 마크가 찍히면서 그는 업계에서 한 차례 유명세를 치렀다.

“참 파란만장 하다.” 다음 얘기를 듣고 이 말이 절로 나왔다. 용산역세권개발에서의 직장 생활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금융위기의 파고와 자금난을 둘러싼 주주사간의 갈등이 겹치면서 용산역세권 개발 사업은 2013년 5월 최종 파산했다.

당시 얘기를 하면서 헛웃음을 짓는 그에게 우스갯 소리로 “월급장이 팔자는 아닌가보다”고 맞장구를 쳤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 말이 100% 농담만은 아닌 것 같다. 그의 피에는 학창시절부터 사업가의 DNA(유전자)가 있었다.

그의 첫 창업은 대학교 4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 제기시장 한약재상을 알게된 서 사장은 당시 중국약재를 들여다 약재상에 팔면 적잖은 마진이 생긴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았지만 그는 행동에 옮긴 소수에 속했고 학생으로서는 적잖은 돈을 벌었다. 무역회사로 사업자 등록을 했으니 학생 오퍼상 사장이었던 셈이다.

피알페퍼는 서 사장이 사업자 등록을 한 세 번째 회사다. 연간 홍보대행을 맡은 한국토지신탁이 부동산 시행사업을 본격화하면서 사업은 창업 초기부터 순풍에 돛을 단 격으로 급성장세를 탔다.

창립초기 대형 공기업에서 홍보팀장 영입제안이 받고 한 때 갈등도 했다. 보통 취직한 직장이 잇따라 문을 닫게 되면 안정된 직장을 동경할 법도 한데 서 사장은 스카우트 제안을 결국 정중히 거절했다. 여기엔 그의 와이프의 입김이 세게 작용했다. 

서 사장은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사장이 안정된 직장을 찾아 사업을 접으면 믿고 따른 직원들은 뭐가 되냐’는 와이프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피알페퍼는 대우건설과 중흥건설, 중흥종합건설 등의 연간 홍보대행을 잇따라 주수하며 지난 한해 30여개 분양 프로젝트와 기업홍보를 수행했다. 올해는 상반기 이미 30여개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연말까지 60여개 프로젝트를 홍보할 것으로 서 사장은 예상했다. 

“건설에 국한된 홍보대행사에서 벗어나 종합 홍보·마케팅 회사로 키우고 싶다. 건설 홍보의 경우 겨울 비수기를 견뎌야 하는 계절적 리스크가 커 회사를 견실하게 운영하기 위해서는 사업 영역의 다각화가 절실하기 때문이다.” 자신은 특별할 게 없다는 서 사장의 특별한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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