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삼국지 기행3-허베이편> 3-1 바오딩, “유비, 황족의 뿌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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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2-02-06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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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 황족의 뿌리를 찾아서


(아주경제 배인선 김현철 기자) 조조는 천시(天時), 손권은 지리(地利)를, 유비는 인화(人和)를 얻었다는 말이 있다. 유비는 생사고락을 함께 하기로 한 관우와 장비뿐만 아니라 제갈량, 조자룡 등과 같은 훌륭한 인재가 곁에 있었기에 조조, 손권과 함께 천하의 3분의 1을 차지했다는 뜻이다. 유비 스스로 쌓아 올린 덕망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유씨로써 황족이라는 후광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삼국지연의에서 한나라 헌제는 유비가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으로 자신의 먼 친척 뻘임을 알고 그때부터 ‘유황숙’이라 부르며 따랐다고 한다. 짚신이나 만들어 팔았던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밑바닥 신분이던 유비는 이때부터 단숨에 황족의 후예라는 '비단옷'을 걸치고 봉황의 날개를 펼쳐 한나라 정통을 계승한다는 명분을 얻고 훗날 국호를 한(漢)이라 하고 촉(蜀)을 세웠다.

장비사당 내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가 도원결의를 맺었다는 장소인 ‘도원삼결의고리(桃園三結義故里)’에 놓여진 유비상.


그가 황족의 후예여서일까. 삼국지연의 속에는 유독 유비를 도와주는 사람이 항상 많았다. ‘황실의 후예’인 만큼 무언가 귀하고 남을 압도하는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겼을지도 모른다. 삼국지 저자 진수는 “유비는 한 고조의 풍모를 갖고 있었으며 영웅의 그릇이었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우리는 유비가 황제의 후예라는 역사적 기록을 더듬어 허베이성 바오딩 만청(滿城)현에 있는 유비의 선조 중산정왕 유승의 옛 무덤을 찾았다.

△중산정왕 유승의 묘, 감도는 황제의 기운

바오딩 시내에서 북서쪽으로 약 19km를 달려 도착한 곳은 태항산맥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만청현. 여기서 또 언덕을 따라 서쪽으로 달린 지 약 십 여분. 눈 앞에 거대한 산 하나가 시야를 가로 막았다. 바로 지난 1968년 발굴돼 중국 고고학계를 뒤집어놓은 1000여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무덤, 유비의 선조 중산정왕 유승의 묘다.

산 기슭에서 정상까지 이어진 케이블카에 몸을 실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 도중 발 아래에 장대한 풍광이 펼쳐진다. 해발 230m의 릉산은 풍수지리적으로 아주 유리한 곳이다.

저 아래로 펼쳐지는 장대한 경관에 감탄하며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는데 안내원은 “산 전체가 무덤으로 이뤄져 있으며 특히 이곳엔 유승의 묘 외에도 20여개의 황족 일가 무덤이 발견돼 ‘릉산(陵山)’이라 불린다”며 “해발 230m인 릉산은 풍수지리적으로 매우 뛰어난 곳”이라고 설명했다.

아직 발굴이 안 된 묘가 이 산 도처에 널려 있다고 하니 아무곳이나 언덕배기위의 나무 밑을 파기만 하면 함께 묻어놓은 금은보화가 나오지 않을까 싶어 공연히 마음이 설랬다.

 
유승의 묘 주변 산에는 아직 20여개의 무덤이 발굴되지 않은 채 묻혀져 있다고 한다. 아무곳이나 나무 밑을 파기만 하면 묘가 발굴 될 것 같다.


총 3개의 봉우리로 이뤄진 이곳은 뒤로는 태항산맥을 병풍으로 삼고, 앞으로는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위에서 바라보니 가운데 우뚝 솟은 널찍한 봉우리 앞쪽 양 옆에 작은 봉우리 2개가 삐죽 나와 있어 마치 ‘용좌(龍座 황제가 앉는 의자)’와 같다는 느낌을 주었다.

총 3개의 봉우리로 이뤄진 릉산은 가운데 우뚝 솟은 널찍한 봉우리 앞쪽 양 옆에 작은 봉우리 2개가 있어 마치 용좌를 연상케 한다.


한나라 경제의 아들로서 이복동생인 한 무제보다 나이도 많았지만 서자라는 이유로 황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중산정왕 유승(劉勝). 훗날 자신의 후손이 천하를 다스리는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것임을 암시라도 한 것일까.

△천고의 수수께끼가 풀리다

산기슭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약 7여분 올라가면 중산정왕 유승의 묘 입구에 도착할 수 있다.

케이블카를 타고 7여분을 올라 우리는 산 정상에 도착했다. 산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지난 1968년 바로 이 무덤이 발견된 그 역사의 현장에 도착했다.


중산정왕 유승의 묘가 처음 발굴된 곳. '천고의 수수께끼가 이곳에서 풀리다(千古之謎 從此揭開)’는 글귀가 적혀있다.


한나라 때 전해져 내려오는 왕릉 중 가장 완벽하게 보존돼 있다는 이곳. 발굴 당시 중국 고고학계의 흥분과 감동을 전하기라도 하듯 이 곳에는 ‘천고의 수수께끼가 이곳에서 풀리다(千古之謎 從此揭開)’는 글귀가 적혀있다.

안내원은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한창 불어닥치던 1968년 5월 인민해방군이 방공호를 만들던 도중 우연히 이곳에 동굴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 무덤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고 말했다.

당시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친히 저명한 역사학가 궈마뤄(郭沫若)를 이곳에 파견해 홍위병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스럽게 무덤을 발굴했다고 전해진다.

구시대 유물이 싹쓸이 청산되던 문화대혁명 시기에 발굴돼 오히려 문화대혁명의 피 바람에서 피해갈 수 있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중산정왕 유승의 묘 입구. 출입문을 철물로 완전히 봉쇄해 '완벽한 밀실' 형태를 갖춰 도굴꾼의 침입을 막을 수 있었다.


석회암으로 이뤄진 돌산을 뚫어 만든 동굴 안에 무덤을 만들고 출입문을 철물로 완전히 봉쇄해‘완벽한 밀실’ 형태를 갖춤으로써 이곳은 도굴꾼의 침입을 막을 수 있었다고 안내원은 설명했다.

특히 암석질의 산에 뚫은 이 방대한 무덤굴은 현대적인 시공방법으로도 백 명을 헤아리는 사람들이 1년여 넘는 시간을 들여야 만들 수 있다고 했다. 당시 유승이 얼마나 대단한 세력을 가진 황족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주색에 빠져 살았던 유승

우리는 무덤에서 유비의 선조인 중산정왕 유승의 발자취를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20m 거리의 묘도를 따라 무덤 내부로 들어서면 마치 하나의 궁전처럼 차고, 창고, 응접실, 안방, 심지어 화장실까지 구비돼 있다.

20m 거리의 묘도(墓道)를 따라 무덤 내부로 들어서니 꽤나 널찍해 보였다. 가로 38m, 세로 52m, 높이 7m의 면적이었다.

무덤은 마치 하나의 궁전처럼 현실세계를 완벽하게 재현해 놓은 모습이었다. 안에는 통로, 차고, 창고, 응접실, 안방, 심지어 화장실까지 모두 갖추고 있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창고에 놓아진 수십 병의 술 항아리. 안내원은 “이곳에서 총 33개의 사각형 모양의 크고 작은 술항아리가 발견됐다”며 “이는 무려 5t이나 되는 술을 저장할 수 있는 크기로 성인 남성 여럿이 수 십 년은 마실 수 있는 어마어마한 양”이라고 설명했다.

창고에서는 33개의 사각형 모양의 술항아리가 발견됐다. 유승은 술과 풍류를 매우 즐긴 인물로 역사서에 기록돼 있다.


실제로 역사서에서 유승은 매일같이 술과 풍류에 빠져 살던 인물로 묘사돼 있다. 그만큼 여색도 밝혀 슬하에 자식만 무려 120여명을 둔 것으로 전해진다. 이 무덤에서 발굴된 두서너 점의 몇 가지 고대 성(性) 기구들이 이를 잘 뒷받침 해준다. 유비의 옛 선조가 주색에 빠진 한량이었다니, 영웅호색이란 옛말이 무색치 않아 보인다.

한편으로는 줄곧 한 무제의 견제를 받았던 유승으로써는 감시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주색에 빠져 방탕하게 행동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황제가 되지 못한 유승은 어쩌면 훗날 유비가 한나라 정통성을 계승해 촉 황제로 즉위했을 때 이곳 무덤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으리라.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 있을 즈음 발길이 멈춰선 곳은 침실. 바로 그 유명한 금실로 옥편을 짜서 만든 금루옥의(金縷玉衣)가 발견된 현장이다. 물론 현재 무덤 안의 금루옥의는 전시용이며 그 진품은 스자좡(石家庄) 허베이성 문물연구소에 보관 중이다.

2798점 옥과 1100g 금실로 이뤄진 금루옥의. 당시 최고의 장인솜씨로 10년에 걸쳐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안내원은 “고대 사람들은 옥석이 시체를 썩지 않게 한다고 믿었다”며 “황제와 귀족이 죽으면 늘 옥으로 만든 갑옷과 비슷한 수의를 입혔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총 2798점 옥과 1100g 금실로 이뤄진 금루옥의는 당시 최고 장인의 솜씨로 최소 10년은 걸려 완성됐을 것으로 추측된다”며 “이 문물은 지난 1976년부터 중국 역사교과서에 실릴 만큼 고고학적으로 매우 귀중한 유물”이라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금루옥의를 통해 당시 유승의 신체 사이즈를 짐작해볼 수 있다는 것. 안내원은 “유승은 키 185~186cm의 건장한 체격을 가졌다”다며 “다만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인지 배가 불룩 튀어나온 전형적인 중년 아저씨의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유비에 대한 자부심

유비의 조상 유승의 묘가 이곳에 있어서인지 이곳 사람들의 유비에 대한 애정은 특히 남달랐다.

만청현의 한 주민 왕씨는 “유비 황족의 무덤이 우리 마을에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곳에서 태어나 자라온 안내원은 “이곳 만청현에는 유비의 탄생 비화도 전해져 내려온다”며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가문이 몰락해 일반 백성으로 근근이 이곳 만청현에서 삶을 이어가던 유비의 조부가 병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자 당시 유비의 부모에게 “이곳에서 서북쪽으로 걸어가다가 신발이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질 때쯤 나무 위에 수레가 있고, 집 위에 소가 있는 곳에서 정착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유비의 부모는 유언대로 길을 가던 중 비바람을 만나 어느 지점에 멈춰 섰는데 신발은 물이 차 이미 무거워 질대로 무거워져 있었다. 이에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멀지 않은 한 초가집 위에 황소가 풀을 뜯고 있고, 나무 위에 수레가 있는 것이 아닌가. 유비의 부모는 그대로 이 허름한 초가집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 초가집의 주인은 무과에 급제한 무인(武人)이었다. 한 부부가 자신의 초가집에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 곳을 찾아가던 중 마을을 순찰하러 나온 이곳 현장과 눈이 딱 마주쳤고, 때 마침 초가집에서 “응애 응애”하며 아기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인과 현장은 “우리 둘이 마주친 바로 이 때에 이곳에서 아이가 태어났으니 이 아이는 장차 문무를 겸비한 훌륭한 영웅이 될 것이오.”라고 우스갯 소리를 했다는 이야기다.

어찌 들으면 황당무계한 전설처럼 들릴 수 있지만 이곳 만청 사람들의 유비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을 드러내는 이야기가 아닐 듯싶다.

물론 유비가 한나라 황실의 후손이냐 아니냐를 둘러싸고도 아직 논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중산정왕 이후 후손에 대한 기록이 없을뿐더러 당시 조조의 기세에 불안했던 헌제가 유씨 성을 가진 유비를 황족으로 인정함으로써 조조에 대한 견제세력으로 삼았다는 것.

‘민심을 얻지 못하면 결코 천하를 얻을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어찌됐던 간에 유비는 한나라 황실의 후예라는 하늘이 내린‘정통성’과 스스로 쌓아올린 ‘인의군자’라는 덕목, 이 두 가지를 모두 갖췄기에 유능한 장수와 신하를 거느리고 민심을 얻고 난세의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중산정왕 유승의 묘로 가는 산 중간에 있는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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